가로등 불빛이 한 번 깜빡였다.
다시 들어올 때 하은의 손은 이미 강준혁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었다. 등이 골목 벽에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가 좁은 공간을 채웠고, 준혁의 뒤통수에서 시멘트 가루가 후두둑 떨어졌다.
"누구야."
낮고 갈린 목소리였다. 하은의 오른손에는 가방에서 꺼낸 만년필이 들려 있었다. 검은 몸체의 촉이 준혁의 턱 밑, 경동맥이 뛰는 자리에 정확히 닿아 있었다. 촉 끝에서 잉크가 아닌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피부를 눌렀다.
준혁이 움직이지 않았다. 가로등 빛이 다시 깜빡이며 그의 얼굴 절반을 비췄다. 재하의 얼굴. 왼쪽 눈 밑의 작은 점까지 똑같은.
하은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코끝으로 밀려드는 냄새. 재하가 즐겨 쓰던 향이 아니었다. 비슷하되 다른, 더 건조하고 날카로운 체취가 옷깃에서 올라왔다. 그 미묘한 차이가 오히려 하은의 악력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묻고 있잖아. 누구냐고."
"서하은 씨."
재하의 성대에서 나오는 목소리. 억양이 달랐다. 재하는 자기 이름을 부를 때 '은'자를 길게 끌었는데, 이 남자는 짧게 끊었다.
"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만년필 촉이 살갗을 파고들었다. 아주 얇은 선 하나. 가로등 빛 아래 준혁의 턱 밑으로 한 줄기 피가 흘러내렸다.
준혁의 눈이 좁아졌으나 고통의 표시는 아니었다. 오히려 하은의 떨리는 손가락을 내려다보는 시선이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양손을 가만히 늘어뜨리고, 반항할 의사가 없다는 걸 몸으로 보여주었다.
"죽일 거면 죽여."
"대답이 아닌데."
"강준혁. 서른둘. 그 외에 뭘 더 알고 싶어?"
하은의 왼손이 멱살을 더 조였다. 셔츠 단추 하나가 뜯겨 나가 바닥에 떨어졌고, 그 소리가 골목에 작게 울렸다.
"재하 몸으로 뭘 한 거야. 어떻게 한 건지 하나도 빠짐없이."
"여기서?"
준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재하가 종종 하던 것과 같은 각도. 하은의 검지가 만년필 위에서 꿈틀했다.
"알아들을 수 있게 설명해줄 수도 있어. 근데 조건이 있지."
"너한테 조건을 들을 이유가 없어."
"그래? 그러면 찔러. 찌르면 이 몸에 상처가 남아. 이 얼굴에."
하은의 호흡이 한 박자 늦어졌다. 만년필을 쥔 손이 1밀리미터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밀착됐다. 준혁은 그 미세한 진동을 놓치지 않았다.
"죽은 약혼자가 살아 돌아왔길 바라는 거야, 아니면 내가 죽길 바라는 거야?"
골목 끝에서 택시 한 대가 지나갔다. 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의 그림자를 벽 위로 길게 늘였다가 거둬갔다. 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질문이 정확히 자신의 내부를 갈라놓는 단층선 위에 놓여 있었으므로.
"너 지금 떨고 있어."
"닥쳐."
"이 몸을 해치면 윤재하의 몸이 망가져. 그건 알고 있지?"
하은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조여졌다. 만년필 촉에 묻은 핏방울이 가로등 빛 아래에서 검붉게 응고되어 가고 있었다. 아니, 검붉은 정도가 아니었다. 핏방울은 마치 잉크를 흡수하듯 빠르게 검어지고 있었다. 비정상적인 속도로. 하은의 시선이 그 위에 잠시 머물렀으나 지금은 따질 겨를이 아니었다.
"재하가 뇌사 판정받은 게 작년 11월 17일이야."
하은의 목소리가 톤을 바꿨다. 멱살을 쥔 왼손의 손가락 마디마디에 힘이 들어갔고, 셔츠 원단이 주먹 안에서 뒤틀렸다. 취재할 때의 목소리. 사실을 나열하되 감정을 칼로 도려낸 건조한 음성이었다.
"12월 3일에 장례를 치렀어."
손등의 힘줄이 도드라졌다. 준혁의 쇄골 위로 하은의 손가락 관절이 파고들었고, 준혁이 미세하게 이를 악물었다.
"근데 12월 28일에 재하의 체세포 기록이 영종도의 한 클리닉에서 조회됐더라."
준혁의 눈꺼풀이 한 번 떨렸다.
"서하은 씨가 꽤 많이 파고들었네."
"대한생명공학연구소 소속 연구원 두 명이 그 클리닉 지하층에 출입한 CCTV도 확보했어."
하은이 말을 끊고 만년필 촉의 각도를 틀었다. 금속면에 묻은 검은 핏방울이 준혁의 목선을 따라 흘러내렸다. 멱살을 쥔 손이 준혁을 벽 쪽으로 한 번 더 밀어붙였다. 시멘트 벽에 등이 부딪히는 소리. 준혁의 숨이 짧게 끊겼다.
"같은 날 재하의 뇌사 판정이 '의료 착오'로 번복됐어. 뇌사에서 깨어난 사람이 한 달 만에 완전한 사회생활을 하고 있고. 원래 직장도, 인간관계도 다 끊은 채. 이름만 같은 전혀 다른 사람처럼."
"그래서 결론이 뭔데."
"네가 재하가 아니라는 건 확실해. 문제는 네가 어떻게 재하의 몸 안에 들어갔느냐는 거야."
준혁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재하의 웃음과는 완전히 다른 모양이었다. 재하는 웃을 때 눈이 먼저 좁아졌는데, 이 남자는 입술만 움직이고 눈은 차가웠다.
"증거를 갖고 있으면 경찰에 가지, 왜 만년필을 들고 골목에서 날 기다려?"
"경찰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
하은의 반문에 준혁이 잠깐 침묵했다. 그 침묵이 답이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이건 경찰이 손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 뭐. 솔직히 말하면."
준혁이 벽에서 등을 뗐다. 하은이 만년필을 밀어 제지하려 했으나, 그는 촉을 피하지 않고 반 걸음 앞으로 나왔다. 촉이 목에서 쇄골 쪽으로 미끄러졌다.
"나도 서하은 씨가 필요해."
"뭐?"
"이 몸에 문제가 있거든."
준혁이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가끔 내가 아닌 누군가의 기억이 튀어나와. 통제가 안 돼. 당신 목소리를 들으면 특히."
하은의 손에 힘이 빠졌다. 의도한 게 아니었다. 멱살을 쥔 왼손의 관절이 저절로 풀렸고, 셔츠 천이 주름진 채 손바닥에서 미끄러져 내렸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준혁의 손이 올라갔다. 뒷머리를 쓸어 넘기는 동작. 왼손으로, 손바닥 전체가 아니라 손가락 네 개만 써서, 정수리부터 뒷목까지 한 번에 길게.
재하의 버릇이었다.
생각이 복잡할 때, 말을 고를 때, 샤워하고 나와서 젖은 머리를 대충 정리할 때. 왼손 네 손가락으로 정수리에서 뒷목까지. 하은은 그 동작을 수천 번 봤다. 눈을 감고도 그릴 수 있었다.
골목에 바람이 불지 않았다. 가로등이 이번엔 꺼지지 않고 일정한 빛을 내렸다. 두 사람 사이에 한 걸음 반 정도의 거리. 하은의 만년필이 내려간 채 허벅지 옆에 매달려 있었고, 준혁의 왼손은 뒷목에 머물러 있었다.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가 끊겼다.
하은의 귀에 자신의 숨소리가 들렸다. 거칠고 고르지 못한 호흡. 그리고 그 사이로 준혁의 숨소리. 더 느리고 깊은, 그러나 역시 고르지 못한 들숨과 날숨. 코끝에 닿는 차가운 밤공기 속에 두 사람의 체온이 섞여 희미한 온기를 만들었다.
하은의 시선이 준혁의 왼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뒷목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그 손. 재하도 그랬다. 한번 올린 손을 바로 내리지 못하고, 뒷목을 감싸 쥔 채 3초, 4초를 멈추곤 했다. 뜨겁고 날카로운 무엇이 목 안쪽을 타고 올라왔다.
"그거."
하은의 입술이 움직였다. 거의 소리가 나지 않는, 공기만 새어 나오는 말이었다.
"뭐?"
"지금 한 거. 머리 넘기는 거."
준혁이 자기 왼손을 내려다봤다. 자신이 무슨 동작을 했는지 인식하지 못한 눈. 하은은 그 반응까지 읽었다. 의도한 게 아니라는 것. 이 남자의 몸이, 재하의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윤재하 씨의 습관이야?"
하은이 대답하지 않았다. 입술을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왼손이 올라가 귀 뒤의 타투를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
"나한테 왜 필요하다고 했지."
목소리를 고쳐 잡는 데 몇 초가 걸렸다.
"기억 역류. 그게 점점 심해지고 있어. 억제제를 맞아도 당신 근처에만 오면 이 몸이 반응해."
준혁이 한 발짝 다가왔다. 하은이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수 없었다. 등 뒤가 맞은편 벽이었다.
"그 기억 속에 이 몸의 원래 주인이 남긴 게 있을 수 있어. 서하은 씨가 찾는 답이."
"이용하려는 거잖아."
"서로 이용하자는 거지."
준혁의 오른손이 천천히 뻗어 하은의 왼손을 잡았다. 만년필을 쥔 손이 아닌, 비어 있는 쪽. 하은이 뿌리치려는 순간 그가 그 손을 자기 가슴 위에 가져다 놓았다. 셔츠 아래로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규칙적이고 단단한 맥박. 재하의 심장이 뛰는 감촉.
그때 하은의 손바닥 아래에서 준혁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하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는 리듬. 짧게 두 번, 길게 한 번, 다시 짧게 세 번.
하은의 호흡이 멈췄다.
재하와 하은만 아는 신호였다. 취재 현장에서 위험할 때, 전화를 끊기 전에, 사람 많은 자리에서 먼저 나가자고 할 때. 둘만의 모스 부호. 누구에게도 알려준 적 없는.
준혁의 눈동자는 여전히 차갑고 낯설었다. 그런데 그의 손가락은, 재하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짧게 둘, 길게 하나, 짧게 셋.
하은이 만년필을 떨어뜨렸다. 검게 변한 핏방울이 묻은 촉이 아스팔트 위에서 쨍, 하고 울렸다.
"지금 그 손가락. 멈춰 봐."
준혁이 고개를 숙여 자기 손을 봤다. 손가락이 여전히 같은 리듬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건 내가 하는 게 아닌데."
하은이 준혁의 손목을 잡아 뒤집었다.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듯 가까이 끌어당겼다. 가로등 아래, 준혁의 검지가 다시 허공에서 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짧게 둘, 길게 하나, 짧게 셋.
하은의 입술이 소리 없이 그 리듬을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