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트리마제 62층. 서울의 야경이 통유리 너머로 쏟아졌다.
강준혁은 그 불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거울 앞이었다. 욕실 거울이 아니라 현관 옆 전신거울,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틀 없는 유리판. 거기에 비친 얼굴이 자기 것이 아니었다.
턱선을 손가락으로 더듬었다. 매끄럽고 단단한 피부. 서른한 살의 남자치고 지나치게 깨끗했다. 자기 몸은 마흔넷이었고, 오른쪽 광대뼈 아래 흉터가 있었고, 왼손 약지가 살짝 안쪽으로 굽어 있었다. 이 손가락은 곧고 길었다. 피아노를 쳤을 법한 손이다.
아니. 이 남자는 피아노를 쳤다.
그 기억이 어디서 온 건지 분간이 안 됐다. 강준혁은 거울에서 한 발 물러섰다. 숨이 거칠었다. 펜트하우스의 공기가 23도로 유지되고 있었지만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세면대 위에 은색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뚜껑을 열자 유리 주사기 세 개가 벨벳 안감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고, 투명한 액체가 형광등 아래서 미세하게 빛났다. 레테. 하루 한 번, 목덜미 경추 3번과 4번 사이에 정확히 꽂아 넣어야 하는 약물이다.
주사기 하나를 집어 들었다. 바늘 보호캡을 이빨로 뽑고 왼손으로 목덜미 뒤를 더듬었다. 거울 속의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혔다.
윤재하의 눈이었다.
검고 깊은, 약간 축 처진 눈꺼풀. 한 시간만 더 자면 안 되냐고 투정 부리던 아침의 눈. 아니, 그런 기억은 강준혁의 것이 아니다. 이 육체의 잔상이다. 찌꺼기다.
그런데 그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원망이 서린 것처럼, 혹은 경멸하듯. 거울 속 동공의 수축이 자기 의지와 어긋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주사기를 든 오른손이 멈췄다.
"뭘 봐."
자기 입에서 나온 목소리가 낯설었다. 강준혁은 목을 움켜쥐었다. 성대를 울리고 지나간 진동이 손바닥에 남아 있었다. 자기 것이 아닌 울림이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가, 이를 악물며 거울을 향해 주사기를 내던졌다.
유리관이 거울 표면에 부딪혀 산산이 깨졌다. 거울에는 금이 가지 않았다. 강화유리였으니까. 대신 주사기 파편이 대리석 바닥 위로 흩어졌고, 투명하던 액체가 바닥 위에서 천천히 색을 바꿨다.
보라색이었다.
공기와 접촉하면 무색이어야 할 레테의 용액이, 바닥의 온기를 만나자 묽은 보랏빛으로 번지고 있었다. 강준혁은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다리에서 힘이 빠진 것이다.
파편 사이로 보라색 액체가 관절 틈으로 기어들었다. 무릎뼈가 차가운 대리석에 닿는 감촉. 이 육체의 무릎에는 오래된 상처 자국이 있었다. 고등학교 때 축구하다 넘어진 흔적이라고, 누군가 웃으면서 말해준 적이 있었다.
누가.
강준혁은 양손을 바닥에 짚었다. 유리 파편이 손바닥을 찔렀지만 그 통증이 오히려 현실의 닻이 되어주었다. 이 몸이 기억하는 것들이 자꾸 밀려왔다. 파도처럼이 아니라, 지하수처럼. 바닥 아래에서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차오르는 물.
어떤 여자의 손. 가늘고 차가운 손가락이 이 무릎 위에 밴드를 붙여주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올라왔다. 그 손에서 블랙커피 냄새가 났다. 달지 않은 냄새. 설탕 없이, 크림 없이, 원두의 쓴 향만 남은.
이 육체의 근육이 그 냄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팔뚝 안쪽의 힘줄이 미세하게 수축하고, 갈비뼈 사이 늑간근이 호흡 패턴을 바꾸려 했다. 더 깊이, 더 천천히 숨을 쉬려고. 마치 그 여자 옆에서 잠들기 직전의 호흡으로 돌아가려는 것처럼.
강준혁의 턱이 떨렸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이 아니었다. 이 뼈와 근육과 신경에 새겨진 다른 남자의 흔적이었다. 죽은 남자의. 아니, 자기가 죽인 남자의.
바닥에 번진 보라색 액체 위로 형광등 빛이 내려앉았고, 그 빛이 윤재하의 손등 위에서 일렁였다. 강준혁의 손등이 아니라 윤재하의 손등. 구분이 흐려지고 있었다. 어디까지가 그릇이고 어디서부터가 안에 담긴 것인지.
유리 파편 하나가 검지 끝에 박혀 피가 맺혔다. 붉은 피. 누구의 피인지 알 수 없는 피.
현관 도어락이 해제되는 전자음이 적막을 갈랐다.
강준혁이 고개를 들기도 전에 구두 소리가 대리석을 두 번 두드렸다. 검은 코트, 검은 슬랙스, 왼쪽 귀에 통신 이어피스를 낀 남자가 현관에 서 있었다. 오민준. 영혼관리국 소속, 강준혁의 전담 감시관.
오민준의 시선이 바닥의 보라색 얼룩과 흩어진 유리 파편을 훑었다. 그리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강준혁의 피 묻은 손을 봤다.
"투여 시간 40분 초과."
감정 없는 목소리였다. 오민준은 코트 안주머니에서 동일한 은색 케이스를 꺼내 커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예비분이었다.
"맞아야 합니다."
강준혁은 일어서지 않았다. 무릎 위의 피가 바지를 적시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아니, 표정이라기보다는 부재에 가까웠다. 윤재하의 얼굴에서 일체의 감정이 빠져나간 상태.
"이 몸의 주인이 자꾸 나를 밀어내는데, 이게 정말 성공한 시술이라고?"
오민준의 걸음이 한 박자 늦었다. 그는 케이스에서 주사기를 꺼내 보호캡을 제거하면서 대답했다.
"시술은 완벽했습니다. 각인 기간 중 기억 역류는 정상 범주입니다."
"정상?"
강준혁이 웃었다. 윤재하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각도가 부자연스러웠다. 원래 이 얼굴은 그런 식으로 웃지 않았으니까.
"방금 나는 이 몸이 사랑했던 여자의 손을 기억했어. 내가 만져본 적도 없는 손을."
오민준이 주사기를 든 채 강준혁 앞에 섰다. 그의 왼손이 강준혁의 턱을 잡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강제로 목덜미를 노출시키는 동작이었다. 강준혁이 손목을 붙잡아 저항했지만, 오민준은 관절을 비틀어 자세를 무너뜨렸다.
바늘이 경추 사이를 파고들었다.
차가운 액체가 척수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 뒤통수에서 시작된 서늘함이 어깨뼈를 지나 등줄기까지 퍼졌다. 강준혁의 동공이 한 번 크게 흔들린 뒤 초점을 되찾았다.
"하루라도 빼먹으면 기억 역류가 폭주합니다." 오민준이 빈 주사기를 케이스에 도로 넣으며 말했다. "이사회에서 당신을 관리하는 데 얼마를 쓰고 있는지 아십니까."
"그래서 네가 여기 있는 거잖아. 감시견."
오민준의 표정이 변하지 않았다. 그는 코트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내 화면을 강준혁 앞으로 돌렸다. 지도 위에 빨간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마포구 연남동.
"서하은. 프리랜서 탐사보도 기자. 현재 연남동 단독주택 거주."
강준혁의 손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레테를 맞은 직후인데도. 오민준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이사회에서 경고합니다. 각인 기간 중 전이 대상의 연고자 접촉은 금지입니다. 영혼 공명이 발생할 경우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알아."
"아시면서 왜 어젯밤 그녀의 전화번호를 검색하셨습니까."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준혁은 일어서서 바지의 먼지를 털었다. 유리 파편이 떨어지며 바닥에서 가벼운 소리를 냈다. 그가 태블릿 화면의 빨간 점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내가 검색한 게 아니야."
오민준의 눈이 좁아졌다.
"이 손이 한 거야. 새벽 세 시에 눈을 떴더니 이 손이 이미 검색창에 그 여자 이름을 치고 있더라고."
강준혁의 목소리는 평탄했지만, 태블릿 위의 검지가 빨간 점을 누른 채 떨어지지 않았다. 오민준이 태블릿을 빼앗아 코트 안으로 집어넣었다.
"각인이 끝나면 그런 증상은 사라집니다. 87일 남았습니다."
"87일."
강준혁은 창 쪽으로 걸어갔다. 서울의 불빛이 그의 앞에 펼쳐져 있었고, 어딘가 저 불빛들 사이에 그 여자가 있었다. 이 몸이 목숨보다 사랑했던 여자.
"87일 동안 이 몸이 가만히 있을 것 같아?"
오민준은 대답 대신 현관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멈추어 어깨 너머로 말했다.
"다음 투여는 내일 오후 2시입니다. 그 전에 이 건물을 나가면, 이사회는 시술을 되돌리는 대신 육체 자체를 폐기하는 쪽을 택할 겁니다. 당신 영혼째로."
도어가 닫혔다. 전자 잠금 소리가 두 번 울렸다.
강준혁은 유리창에 이마를 댔다. 차가웠다. 62층 높이의 바람이 유리 너머에서 울고 있었고, 그 진동이 이마뼈를 통해 두개골 안쪽까지 전해졌다. 손바닥의 상처에서 피가 마르고 있었다. 핏줄이 굳으면서 당기는 감촉이 이질적이었다. 자기 피가 아닌 것 같은.
한 시간이 지났다. 혹은 두 시간.
강준혁은 현관의 전자 잠금장치 옆 벽 패널을 뜯어냈다. 이 펜트하우스의 보안 시스템 배선 구조를 자기가 알 리 없었다. 손가락이 알았다. 윤재하는 전자공학을 부전공했고, 이 손가락들은 기판 위의 저항과 커패시터를 구분하는 감각을 기억하고 있었다.
잠금이 해제되었다.
새벽 2시 47분의 연남동은 고요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 늘어선 낮은 지붕들 위로 가로등 불빛이 주황색 원을 그리고 있었다. 강준혁은 후드를 눌러쓰고 그 골목 끝에 서 있었다. 이층짜리 단독주택 앞이었다. 대문 옆 우편함에 '서'라는 글자가 반쯤 벗겨진 채 붙어 있었다.
이 몸이 이끄는 대로 왔다. 택시를 타면서도, 골목을 걸으면서도, 발이 자동으로 방향을 잡았다. 수백 번 걸었던 길처럼.
이층 창문에 불이 꺼져 있었다. 커튼 사이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강준혁은 대문에서 세 걸음 떨어진 전봇대 옆에 서서 그 창을 올려다보았다. 이 눈이, 이 목이, 이 폐가 이곳의 공기를 기억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을이면 이 골목에 은행나무 냄새가 진하게 깔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와본 적 없는데.
대문이 열렸다.
불이 꺼진 현관에서 여자가 나왔다. 맨발에 슬리퍼를 걸치고, 왼손에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휴대폰 화면의 푸른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었다.
서하은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전봇대 옆의 그림자를 훑었다. 후드 아래로 드러난 턱선, 그 턱선의 각도, 가로등 아래서 반쯤 보이는 입술의 윤곽.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이 미끄러졌다. 슬리퍼 옆 콘크리트 바닥에 부딪히며 화면이 깜빡였다.
강준혁의 입술이 벌어졌다. 이 성대가, 이 혀가, 이 입천장이 어떤 이름을 발음하려고 했다. 두 글자. 하은. 이 입이 수천 번 불렀던 이름이 후두 깊은 곳에서 올라오고 있었고, 강준혁은 그것을 막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 맛이 번졌다.
그가 눈을 들었다. 후드가 뒤로 밀렸고, 가로등 빛이 윤재하의 얼굴을 비추었다.
하은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소리 없이, 죽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듯.
강준혁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디며 입을 열었다.
"비켜."
윤재하의 목소리로, 윤재하의 말투가 아닌 차가운 명령이 골목에 떨어졌다.
서하은의 왼손이 귀 뒤로 올라갔다. 그리고 세 번, 타투를 문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