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 하나가 전부였다.
명동성당 뒤편,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철문 너머로 돌계단이 이어졌다. 하은은 벽을 짚었다. 돌은 축축했다. 거칠었다. 장례식 후 이틀째, 강준혁의 얼굴을 한 그 남자와 마주친 뒤로 잠을 이루지 못한 눈 밑이 퉁퉁 부어 있었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면의 십자가 문양이 길어졌다 줄어들었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습기가 목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혀끝에 곰팡이 비슷한 맛이 번졌다. 어딘가에서 물이 새는 소리가 일정한 간격으로 떨어졌다.
열두 번째 계단에서 하은은 멈췄다. 귀 뒤의 타투를 손끝으로 더듬었다. 재하가 디자인해준 작은 별자리. 그 윤곽을 세 번 문지르고 나서야 다시 발을 뗐다.
카타콤 입구에는 문이 없었다. 낡은 비닐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그 너머로 모니터 여러 대의 푸른빛이 새어나왔다. 커튼을 젖히자 냉각팬 돌아가는 소음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노크도 없이?"
등을 보인 채 의자에 앉아 있던 여자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짧게 자른 머리 아래로 목덜미의 작은 화상 자국이 보였다. 모니터 다섯 대 위로 숫자와 코드가 빠르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정세진 씨?"
"문 앞에서 3분 47초 서 있다가 들어온 사람치고는 목소리가 꽤 단단하네."
세진이 의자를 반 바퀴 돌렸다. 날카로운 턱선, 깊은 다크서클. 손가락에는 반창고가 세 개 붙어 있었고, 키보드 옆에 에너지 드링크 빈 캔이 네 개 쌓여 있었다.
"누가 보냈어?"
"김도영 기자요."
하은은 주머니에서 접힌 명함을 꺼내 세진의 책상 위에 놓았다. 세진이 명함을 집어 뒷면을 확인했다. 볼펜으로 휘갈긴 숫자 네 자리. 세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도영이 형이 아무한테나 이 번호를 주진 않는데."
"아무나는 아니니까 여기 서 있는 거예요."
세진이 명함을 책상 위에 툭 떨어뜨렸다. 의자를 다시 모니터 쪽으로 돌리며 입을 열었다.
"용건."
"윤재하. 그 이름으로 검색해주세요."
타이핑 소리가 멈췄다. 세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한 박자 떠 있었다.
"뇌사 판정받은 그 윤재하?"
하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세진이 천장을 올려다보며 혀를 찼다.
"그 사건은 건드리면 안 돼. 영혼관리국 직할 관리 대상이야."
"알아요."
"알면서 왔어?" 세진이 의자를 돌렸다. "여기가 아무리 자기장 교란 지대라지만, 그쪽 데이터에 접근하는 순간 추적 트리거가 걸려. 나까지 타."
하은의 시선이 작업실 구석으로 향했다. 먼지 쌓인 선반 위에 구형 장비가 놓여 있었다. 둥근 외형, 은색 본체. 옆면에 영혼관리국의 로고―겹쳐진 두 개의 원―가 반쯤 긁혀 있었다. 세진이 그 시선을 따라가더니 표정이 굳었다.
"구경 그만하고 돌아가."
"세진 씨도 피해자잖아요."
세진의 어깨가 미세하게 경직됐다. 반창고 붙은 손가락이 무릎 위에서 접혔다 펴졌다.
"나는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야. 차이를 알아?"
"저한테 설명해줄 시간은 없어요." 하은이 한 발 다가섰다. "재하 신체가 블랙 마켓 하데스에서 거래됐다는 걸 확인만 하면 돼요."
하은은 가방에서 태블릿을 꺼내 세진 앞에 놓았다. 화면에는 하은이 직접 정리한 타임라인이 떠 있었다. 재하의 뇌사 판정 시각, 장례식 일정, 강준혁이 해외 교통사고로 사망 처리된 날짜. 세 개의 시점이 이틀 간격으로 나란히 정렬되어 있었다.
세진이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스크롤을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거 혼자 만든 거야?"
"네."
"기자 출신이라더니, 집요한 건 맞네."
세진이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한동안 모니터를 바라봤다. 냉각팬 소음 사이로 물 떨어지는 소리만 이어졌고, 하은은 재촉하지 않았다. 세진의 손가락이 다시 키보드 위로 올라가는 순간을 기다렸다.
"한 가지만 보여줄게." 세진이 고개를 꺾었다. "그 이상은 안 해."
손가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빠르지 않았다. 한 글자씩 신중하게 입력하는 것이 모니터에 비친 세진의 눈동자 움직임으로 드러났다. 암호화된 데이터베이스의 레이어가 하나씩 벗겨질 때마다 화면의 색이 바뀌었다. 검정에서 진한 남색으로, 다시 붉은 경고창으로.
세진이 경고창을 우회하는 동안 하은은 작업실 내부를 둘러봤다. 성당 지하의 원래 용도였을 석조 벽감에 서버 장비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벽면 한쪽에 포스트잇이 수십 장 붙어 있고, 사람 이름과 날짜가 적혀 있었다. 몇몇에는 빨간 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들인지, 구해낸 사람들인지. 알 수 없었다.
"여기."
세진이 모니터 하나를 하은 쪽으로 돌렸다. 스프레드시트 형식의 표가 떠 있었다. 상단에 '블랙 마켓 하데스 — 2024년 3분기 거래 내역'이라는 제목.
하은의 시선이 표를 훑어 내려갔다.
열세 번째 줄에서 멈췄다.
상품 코드 H-0913. 성별 남. 연령 29. 혈액형 AB+. 신체 등급 S. 낙찰가 320만 소울코인. 비고란에 '뇌사 유도 완료, 수령자 확인 대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 옆의 식별 태그가 재하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와 일치했다.
목이 조여왔다. 하은은 의자 등받이를 잡고 서 있었는데,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시야가 좁아졌다.
"이건 단순한 살인이 아니야."
세진이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영혼을 도려내고 껍데기를 판 거지. 쇼핑하듯이."
하은은 입을 열지 못했다. 화면 속 숫자들이 재하의 몸에 매겨진 가격표였다. 팔, 다리, 심장, 뇌파까지 항목별로 등급이 나뉘어 있었다. 세진이 스크롤을 조금 더 내리자 수령자란에 코드명이 떴다. 'BUYER-J7'. 하은이 그 코드를 태블릿에 옮겨 적으려 하자 세진이 손으로 화면을 가렸다.
"복사 안 돼. 기억해."
"세진 씨, 이 파일―"
"안 된다고 했어."
세진의 목소리가 단단했다. 화면을 가린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은은 그 떨림을 봤고, 세진도 자신이 들킨 것을 알았다.
침묵이 흘렀다.
세진이 의자에서 일어나 작업실 구석의 소형 냉장고를 열었다. 캔커피 두 개를 꺼냈다. 블랙 하나, 카라멜 라떼 하나. 잠깐 하은을 보더니 블랙을 다시 냉장고에 넣고 카라멜 라떼만 하은 앞으로 밀었다.
"블랙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아뇨."
짧은 대답이었다. 블랙은 재하가 좋아하던 것이었다. 하은은 늘 카라멜이나 바닐라를 골랐지만, 재하가 죽은 뒤로는 블랙만 마셨다. 그 쓴맛이 입안에 남아 있으면 뭔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캔을 따는 소리가 석조 천장에 부딪혀 울렸다. 한 모금 마셨다. 달았다. 혀끝에 퍼지는 캐러멜의 온기가 오랫동안 잊고 있던 감각이었다.
세진이 자기 캔을 따지 않은 채 하은을 보고 있었다. 하은의 양쪽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카타콤의 습한 공기가 피부를 감싸고, 냉각팬이 일정한 소음을 내뱉고, 물방울이 어딘가에서 똑, 하고 떨어졌다. 모니터의 푸른빛이 하은의 옆얼굴에 번졌다. 그 빛 아래서 턱선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세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빈 캔 하나를 손가락으로 천천히 굴렸다. 금속이 책상 위에서 구르는 작은 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하은이 캔커피를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알루미늄의 온기가 손바닥에서 손목을 타고 올라와 어깨의 떨림을 아주 조금 가라앉혔다.
세진이 먼저 움직였다. 의자를 모니터 쪽으로 돌려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빨랐다.
"전부는 못 줘. 근데 이 정도면 시작은 할 수 있을 거야."
화면에 새로운 파일이 열렸다. 거래 내역의 축약본, 수령자 코드, 시술 일시, 영종도 클리닉의 VIP 병동 입원 기록. 세진이 USB를 뽑아 하은 앞에 놓았다.
하은이 USB를 집어 들다가 손을 멈췄다. 파일 목록 하단에 또 다른 스프레드시트가 보였다. '관리 대상 목록 — 2024년 4분기'라는 제목이었다.
"이건 뭐예요?"
세진이 고개를 돌렸다. 하은이 이미 파일을 열고 있었다. 세진이 마우스를 빼앗으려 했지만 하은이 더 빨랐다.
이름 목록이 화면을 채웠다. 서른두 번째 줄. 서하은. 분류: 제거 대상이 아닌 관찰 대상. 담당 코드: J7.
같은 코드였다. 재하의 몸을 산 자와 하은을 감시하는 자가 동일인이었다.
"이거 언제부터―"
하은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휴대전화를 꺼내 화면을 보았다.
발신번호 제한. 그 아래, 표시되어서는 안 되는 번호가 찍혀 있었다. 재하의 번호.
세진이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하은의 손목을 잡았다.
"받지 마."
네 번째 진동이 하은의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