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성당 뒷골목을 빠져나온 뒤로 두 사람은 말없이 걸었다. 이른 저녁의 한강 둔치. 바람이 차가웠고, 재하의 육체는 하은보다 반 보 앞서 걷고 있었다.
아버지의 얼굴이 담긴 낡은 사진 한 장이 하은의 코트 안주머니에서 체온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세진이 카타콤 서버에서 복원해준 파일이었다. 1998년, 대한생명공학연구소 개소식에서 찍힌 단체 사진 속 아버지는 하은이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젊었고, 그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은 흐릿하게 지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최초의 실험체였다는 사실. 확인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입 안의 쓴맛은 가시지 않았다.
"걸음이 빨라."
하은이 말하자 재하의 몸이 멈췄다. 돌아보는 얼굴.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왼쪽 눈을 먼저 깜빡이는 동작에 하은의 턱이 굳었다. 재하의 버릇이 아니었다.
"미안. 생각이 많아서."
그가 말했다. 목소리는 재하의 것이었고, 억양은 아니었다. 낮게 깔린 음색 사이로 긴장이 배어 나왔다.
"무슨 생각?"
"모르겠어. 그냥…… 머리가 무거워."
재하의 손이 관자놀이를 눌렀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영혼 각인 기간이 거의 끝나가는 지금, 기억 역류 현상은 줄어들어야 정상이었다. 오히려 빈도가 늘고 있다는 건 레테의 효과가 감소하고 있다는 뜻이거나, 혹은.
그의 오른손 손목 안쪽에 푸른 정맥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있었다.
"재하."
하은이 한 발 다가섰다. 이름을 부르는 건 의식적인 선택이었다. 강준혁이 아닌, 그 육체의 본래 주인의 이름. 매번 입에 올릴 때마다 목구멍 안쪽이 조여왔지만, 영혼 공명의 가능성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재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홍채 가장자리에서 푸른 빛이 번졌다. 하은이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영혼 파장을 시각화하는 능력으로 읽어낸 그의 오라는 늘 탁한 회색과 붉은색의 혼합이었는데, 지금은 달랐다. 짙은 남색이 심장 부근에서 소용돌이치며 바깥으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재하, 눈 좀 봐."
그가 고개를 저었다. 한 발 물러섰다.
"Dies irae, dies illa."
라틴어였다. 심판의 날. 진노의 날. 재하의 목소리가 아닌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성대를 빌려 울려 퍼졌다. 저음이 갈라지며 공기를 찢었다.
"Solvet saeclum in favilla."
두 번째 구절이 이어졌을 때, 재하의 발밑 아스팔트에 금이 갔다. 물리적 균열이 아니었다. 하은의 시야에서 현실의 표면이 종잇장처럼 들떠올랐고, 그 틈새로 푸른 입자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강변의 가로등이 일제히 점멸했다. 세 개가 연달아 터지며 유리 파편이 비처럼 흩날렸다.
하은이 팔로 얼굴을 가렸다. 유리 조각이 코트 소매에 박혔다. 통증보다 먼저 온 건 피부 표면을 훑고 지나가는 정전기 같은 감각이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섰고, 귀 뒤의 타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재하의 몸이 지면에서 삼십 센티미터쯤 떠올랐다. 두 팔이 벌어졌다.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목덜미의 레테 주입 흔적에서 검은 액체가 흘러내렸다. 억제제가 체외로 밀려나오고 있었다.
"재하, 멈춰!"
하은이 외쳤지만 목소리는 입자의 진동에 묻혔다. 하은의 목소리가 본래 영혼을 일깨울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공명이 일어나야 할 순간이었다. 그런데 재하의 파장이 읽히지 않았다. 회색도 붉은색도 없었다. 남색 소용돌이만이 육체 전체를 감싸고 있었고, 그건 재하도 강준혁도 아닌 제삼의 무언가였다.
둔치 위로 검은 차 세 대가 미끄러지듯 진입했다. 헤드라이트가 꺼진 채였다. 문이 열리기도 전에 한 인물이 달리고 있었다. 검은 택티컬 슈트, 얼굴을 덮은 백색 마스크. 코드네임 K.
오민준의 직속 부대가 아니었다. K는 단독이었다. 그의 손에는 하은이 처음 보는 장비가 들려 있었다. 권총 형태이되 총구가 없고, 대신 청백색으로 빛나는 원통형 코어가 장착된 물건.
K가 재하를 향해 뛰었다.
"비켜."
마스크 너머로 변조된 목소리가 흘렀다. 하은을 향한 말이었다.
"누구야."
하은이 물러서지 않았다. 코트 안주머니에서 아버지의 사진이 구겨지는 감촉이 손끝에 전해졌다. 뒤에서는 재하의 라틴어가 세 번째 구절로 넘어가고 있었고, 푸른 입자의 밀도가 높아지면서 강변의 물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저걸 놔두면 반경 이백 미터가 사라져."
K가 하은의 어깨를 잡았다. 장갑 낀 손의 힘이 짐승 같았다. 하은이 잡힌 팔을 비틀며 뿌리쳤다. K의 균형이 흔들린 틈에 하은은 재하 쪽으로 두 걸음을 내디뎠다.
"이 몸에 손대면 안 돼. 재하의 몸이야."
"알고 있어."
K의 대답이 짧았다. 그 짧은 음절 속에 하은이 예상하지 못한 것이 섞여 있었다. 아는 사람의 억양. 변조기를 통과했는데도 남아 있는 호흡의 리듬.
K가 원통형 코어를 재하의 가슴팍을 향해 겨눴다. 청백색 빛이 점멸했다. 발사가 아니었다. 주파수였다. 코어에서 가청 영역 밖의 진동이 퍼져 나갔고, 재하의 몸을 감싸던 남색 소용돌이가 찢어지듯 벌어졌다.
재하가 비명을 질렀다. 재하의 목소리였다. 강준혁의 것도, 제삼의 것도 아닌, 하은이 새벽마다 반복 재생하던 음성 메시지 속 그 톤. 짧고 날카로운 고통의 소리.
하은의 다리가 풀렸다. 무릎이 아스팔트에 부딪혔다. 그 비명이 귀를 지나 흉골 안쪽까지 파고들었다.
K가 코어의 출력을 올렸다. 진동이 강해지자 재하의 몸이 지면으로 끌려 내려왔다. 발이 닿는 순간 충격파가 퍼지며 주변 벤치 두 개가 뒤집어졌다.
"그만!"
하은이 K의 팔을 잡았다. 매달리다시피 했다. K의 코어를 잡은 손이 흔들렸지만 놓지 않았다.
"이 몸은 단순한 그릇이 아니야."
재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었다. 아까의 라틴어와는 달랐다. 한국어. 또렷한 발음. 눈동자에서 남색이 걷히며 드러난 건 재하도 강준혁도 아닌 차가운 의식의 초점이었다.
"세상의 문을 여는 열쇠지."
재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하은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오만과 확신이 뒤섞인 미소. 그 순간 K가 코어를 최대 출력으로 전환했다.
청백색 광선이 재하의 명치를 감쌌다. 빛이 흉곽을 조여오며 남색 입자를 밀어냈다. 재하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가, 힘없이 앞으로 꺾였다.
하은이 쓰러지는 몸을 받았다. 무게가 실렸다. 재하의 체온이 손바닥에 닿았다. 뜨거웠다. 열이 비정상적으로 높았고, 맥박은 빠르되 불규칙했다. 귀를 가슴에 대자 심장 소리 사이사이에 잡음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두 개의 리듬이 겹쳐 울리는 소리.
K가 코어를 내렸다. 숨이 거칠었다. 마스크 아래로 턱선에 맺힌 땀이 보였다.
"데려가야 해. 여기 오래 있으면 관리국이 온다."
"어디로."
"카타콤은 안 돼. 이 주파수 흔적을 따라가면 자기장이고 뭐고 뚫려."
하은은 재하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린 채 K를 올려다봤다. 코트 안주머니의 사진이 구겨진 채 반쯤 빠져나와 있었다. 바람에 모서리가 펄럭였다.
"당신이 뭔데 이 사람을 알아."
K가 멈칫했다. 마스크 뒤의 눈이 하은을 내려다보았다. 재하를. 다시 하은을.
"시간 없어."
K가 재하의 팔을 잡아 일으키려 했다. 하은이 그 손을 쳤다.
"대답해."
"……나중에."
"지금."
하은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떨림이 없었다. 감정을 누르는 데 써야 할 에너지를 전부 시선에 실었다. K의 마스크 가장자리, 목 옆으로 드러난 피부에 흉터가 있었다. 레테 주입 흔적과 같은 위치. 같은 형태.
멀리서 사이렌이 울렸다. 한 대가 아니었다. 여러 대. 하은의 귀 뒤 타투가 다시 열을 냈다. 관리국의 추적 비콘이 반응하고 있었다.
K가 결정을 내렸다. 코어를 허리에 꽂고, 재하의 몸을 한쪽 어깨에 걸쳤다. 하은이 일어서며 따라붙었다. K가 검은 차 중 한 대의 뒷문을 열었다.
"타."
하은이 먼저 올라탔다. K가 재하를 뒷좌석에 눕혔다. 재하의 눈이 반쯤 떠져 있었다. 초점이 없었다.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하은이 재하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열이 내려가고 있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K가 운전석에 앉으며 마스크의 변조기를 껐다. 백미러에 비친 하은과 눈이 마주쳤다. 변조 없는 목소리가 차 안을 채웠다.
"그 사진."
K가 말했다.
"코트에서 빠져나온 거. 연구소 개소식 사진이지."
하은의 손가락이 재하의 이마 위에서 멈췄다. K가 그 사진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세진이 카타콤 서버에서 복원한, 외부에 유출된 적 없는 파일.
"거기서 얼굴이 지워진 남자."
K의 손이 마스크 아래쪽을 잡았다. 턱 끝에서부터 천천히 위로 벗겨 올렸다.
하은은 백미러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눈을 봤다. 이마를, 코를, 입을 순서대로 읽었다.
손이 재하의 이마에서 미끄러졌다.
아버지의 얼굴이었다. 1998년의 젊은 모습이 아닌, 하은이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 그대로. 주름의 위치. 왼쪽 눈꼬리의 흉터. 코끝의 각도.
K가 백미러 너머로 하은을 바라보았다.
"설명은 이동하면서 할게."
차가 출발했다. 하은의 왼손이 귀 뒤 타투를 세 번 문질렀다. 재하의 몸이 뒷좌석에서 미약하게 경련했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백미러 속 그 얼굴이 입을 열었다.
"네 아버지는 한 번도 죽은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