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중시계의 뒷면을 열자 유리 아래 고순도 정수가 맥박처럼 명멸했다. 투명한 결정체가 품은 빛은 청색도 백색도 아닌, 하은의 귀 뒤 타투가 내뿜는 것과 동일한 파장이었다. 루페를 대고 결정의 표면을 살폈다. 현미경이 필요한 수준의 미세한 문양이 정수 내부에 새겨져 있었다.
아버지의 유품.
이것이 단순한 기념품이 아니라는 건 진작 직감했지만, 결정의 빛이 타투와 같은 색이라는 사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하은은 루페를 내려놓고 양손으로 시계를 감쌌다. 금속 케이스가 체온에 반응하듯 미지근해졌다.
노트북 화면이 깜빡였다.
커서가 혼자 움직이고 있었다. 마우스에서 손을 뗀 지 이미 십 분이 넘었는데, 화면 위로 텍스트가 한 글자씩 찍혔다. 하은의 맥이 뛴다. 한 박. 'ㅎ'. 두 박. 'ㅏ'. 관자놀이 안쪽에서 혈류가 울릴 때마다 글자가 하나씩 올라왔다. 'ㅇ', 'ㅡ', 'ㄴ', 'ㅇ', 'ㅏ'. 일곱 번의 맥동이 끝나자 완성된 단어가 화면에 남았다.
하은아.
손가락 끝이 차가워졌다. 의자를 뒤로 밀지 않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글자들이 다시 줄을 바꿨다.
세진이야. 여기 있어.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치기 전에 잠시 멈춰,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세진을 마지막으로 본 것은 벙커 습격 때였다. 관리국 요원들이 돌입하기 직전, 외장 하드를 하은의 품에 밀어넣고 서버실 쪽으로 뛰어간 뒷모습이 전부였다.
살아 있는 거야?
대답이 왔다. 글자가 아니라 파일 하나가 바탕화면에 생성되었다. 확장자 없는 파일명. 'listen_first'. 클릭하자 오디오가 재생됐다.
"하은아."
세진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질감이 달랐다. 사람의 성대를 거친 진동이 아니라 디지털 합성의 매끈한 표면이 느껴졌다. 원본을 수천 번 복사한 끝에 남은 잔상 같은 소리.
"난 이제 사람이 아니야."
하은의 왼손이 책상 위를 더듬어 회중시계를 찾았다. 차갑던 금속이 이제 손바닥과 같은 온도였다.
"하지만 이 시스템의 눈이 될 순 있어."
오디오가 끊겼다. 곧이어 텍스트가 쏟아졌다. 세진이 설명하는 방식은 예전과 같았다. 핵심을 먼저, 부연을 나중에, 감정은 빼고.
벙커 습격 때 서버실에서 관리국의 신경망에 접속했어.
탈출할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 내 의식 데이터를 시스템에 직접 주입했어.
지금 나는 영혼관리국 메인 서버 안에 있어.
데이터 유령이야. 물리적 몸은 없어.
하은은 키보드를 두드렸다.
되돌릴 수 있어?
긴 침묵이었다. 커서가 깜빡이기만 했다. 열다섯 번째 깜빡임 뒤에 답이 왔다.
모르겠어. 그건 나중에.
먼저 들어. 시간이 없으니까.
하은은 손을 거두고 화면에 집중했다. 등을 세웠다. 세진이 보내는 정보는 짧은 문장들의 연속이었지만 내용의 무게는 하나하나가 달랐다.
영혼관리국은 하부 조직이야.
그림자 이사회도 중간 관리자에 불과해.
최상위에 '라자루스 위원회'가 있어.
1947년에 설립됐어. 냉전 시기.
영혼 전이는 한국만의 기술이 아니야.
위원회가 전 세계 일곱 개 거점에 동시 배포한 거야.
서울, 취리히, 싱가포르, 두바이, 샌프란시스코, 상파울루, 나이로비.
하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머릿속에서 지금까지 모은 퍼즐 조각들이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그림자 이사회를 정점이라고 생각했다. 그 위에 또 다른 층이 있다면, 지금까지의 추적은 건물의 로비만 서성인 것과 다름없었다.
규모가 어느 정도야?
위원회 구성원은 확인 불가.
다만 각 거점마다 '관리국' 역할의 조직이 있고,
그 위에 각국의 이사회, 그리고 최종 의사결정은 위원회.
피라미드 구조야.
하은은 손등으로 이마를 눌렀다. 피부가 축축했다. 난방을 끈 방 안이었는데 등줄기에 열기가 올랐다.
세진아. 네가 거기서 빠져나올 방법부터 찾자.
텍스트가 멈췄다. 다시 오디오 파일이 생성됐다. 이번에는 세진의 목소리가 더 선명했다. 시스템 안에서 자기 자신을 최적화하는 법을 실시간으로 배우고 있는 것 같았다.
"하은아. 내 얘기 들어."
의자 등받이에 기댄 하은의 어깨가 경직됐다.
"나를 꺼내려고 하면 위원회가 움직여. 내가 서버 안에 있다는 사실이 들키면 즉시 포맷당해. 지금은 내가 여기 있는 게 우리한테 유리해."
"유리하다고?"
하은이 소리 내어 말했다. 빈 방에 자기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데이터가 됐는데 그게 유리하다고?"
응답은 텍스트로 왔다.
감정적으로 반응하지 마.
나는 이미 선택했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위원회의 데이터를 네 쪽으로 빼돌리는 것뿐이야.
밖에서 싸울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하은은 입을 다물었다. 왼손이 귀 뒤로 올라가 타투를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서 멈추고 손을 내렸다.
시계를 집어 들었다. 정수의 빛이 아까보다 밝아져 있었다. 방 안이 어두워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발광 강도가 변한 것인지 구분이 어려웠다. 시계를 모니터 옆에 놓자 화면 위의 텍스트가 잠깐 흔들렸다.
그 시계.
방금 뭔가 간섭이 들어왔어.
니가 들고 있는 게 뭐야?
"아버지 유품. 회중시계. 안에 정수가 들어 있어."
정수? 잠깐만.
텍스트가 멈추고 진행 바가 나타났다. 세진이 서버 내부에서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다. 하은은 기다리는 동안 시계를 뒤집었다. 뒷면의 각인이 루페 없이도 보였다. 'S.W.' 아버지의 이니셜이라고 생각했던 두 글자.
하은아.
그 시계 안의 정수, 위원회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돼 있어.
분류명: '직조자의 매듭'.
카테고리: 혈통 인증 키.
하은의 손이 멈췄다. 시계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관절이 하얘졌다.
뭐라고?
더 있어.
S.W.는 이니셜이 아니야.
Soul Weaver의 약자야.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온도가 아니라 밀도가. 시계의 정수가 뚜렷하게 맥동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하은의 맥박과 정확히 같은 간격이었다.
하은은 시계를 내려놓고 키보드를 잡았다. 손가락이 떨리지 않게 의식적으로 힘을 조절했다.
Soul Weaver가 뭔데.
위원회 창설 이전부터 존재한 혈통이야.
영혼을 직접 짤 수 있는 능력자들.
영혼 전이 기술의 원형이 이 혈통에서 나왔어.
위원회가 그 기술을 산업화한 거야.
하은은 의자에서 일어섰다. 좁은 원룸의 창가까지 세 걸음. 블라인드 틈으로 새벽 서울의 불빛이 보였다. 한강 방향의 가로등이 주황색 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럼 아버지가 직조자였다는 거야?
텍스트 대신 파일이 또 하나 생성됐다. 이번에는 이미지 파일이었다. 열자 가계도가 나타났다. 위원회 데이터베이스에서 직접 추출한 듯, 문서 상단에 '극비 — 라자루스 위원회 아카이브 7등급' 워터마크가 찍혀 있었다.
가계도의 상단에서 시선을 내렸다. 이름들이 한글과 한자로 병기되어 있었다. 최소 삼백 년은 거슬러 올라가는 족보였다. 중간중간 끊긴 곳에는 '소실'이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하은의 시선이 가계도 하단에 도달했다. 서정환. 그 옆에 '제7세대 직조자 — 능력 발현 확인'이라는 주석.
그리고 서정환의 아래에 선이 하나 내려와 있었다.
서하은. 이름 옆에 빨간 글씨.
'제8세대 — 잠재 직조자. 2012 대각성 시 능력 변이 발현. 관찰 대상.'
손끝이 차가워졌다. 아니, 손끝만이 아니었다. 발바닥부터 올라온 한기가 척추를 타고 목덜미까지 번졌다.
하은은 창가에서 돌아섰다. 모니터 앞에 다시 앉았다.
내 능력이 돌연변이가 아니라 혈통이라는 거야?
그래.
영혼 파장을 시각화하는 건 직조자 혈통의 기본 능력이야.
2012년 대각성은 네 능력의 트리거였을 뿐, 원인이 아니야.
세진의 텍스트가 이어졌다.
그리고 하은아.
위원회가 너를 관찰 대상으로 분류한 시점이 있어.
네가 태어났을 때가 아니야.
네 아버지가 실종된 직후야.
하은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아버지의 실종. 열네 살이던 해. 아침에 출근한다며 현관을 나선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경찰은 가출로 처리했고, 어머니는 그해 겨울 세상을 떠났다.
타투를 다시 만지려던 손을 의식적으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아버지가 왜 실종됐는지도 나와 있어?
확인 중이야.
데이터가 7등급이라 접근 권한을 우회하는 데 시간이 걸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
텍스트가 잠시 멈췄다가 이어졌다.
위원회는 직조자 혈통을 보존하려고 해.
동시에 통제하려고 해.
네 아버지를 없앤 건 위원회일 가능성이 높아.
그리고 지금 너를 살려두는 것도 같은 이유야.
하은은 회중시계를 다시 집었다. 정수의 맥동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번에는 루페 없이도 내부의 문양이 보였다. 아니, 보인다기보다 느껴졌다. 문양의 형태가 눈이 아니라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었다. 나선형. 서로 교차하며 직조되는 실처럼 꼬인 구조.
이것이 혈통 인증 키라면.
하은은 시계를 모니터 가까이 가져갔다. 정수의 빛이 한 단계 강해지며 화면이 다시 흔들렸다. 세진의 텍스트가 빠르게 올라왔다.
간섭 강도 상승.
니 손에서 나오는 거야, 시계에서 나오는 거야?
"모르겠어."
하은은 시계를 내려놓지 않았다. 대신 왼손으로 키보드를 쳤다.
세진아. 데이터 맵 전체를 보내줄 수 있어?
위험해. 전송량이 크면 위원회 감시망에 걸려.
"분할 전송은?"
화면이 잠시 멈췄다. 세진이 계산하고 있었다.
가능해. 세 번에 나눠서.
첫 번째 패킷 지금 보낸다.
파일이 생성됐다. 압축된 데이터 맵의 첫 번째 조각. 하은은 파일을 열었다. 전 세계 일곱 거점의 영혼 전이 네트워크가 시각화된 지도 위에 점으로 찍혀 있었다. 각 점에서 뻗어 나온 선들이 서로 연결되어 거미줄 같은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두 번째 패킷.
이번에는 인물 데이터베이스 일부였다. 위원회 산하 조직의 구성원 목록. 스크롤을 내리다 익숙한 이름에 시선이 걸렸다. 오민준. 영혼관리국 수석 요원. 그의 프로필 옆에 '라자루스 위원회 직속 — 특수 임무 배정'이라는 태그가 붙어 있었다.
하은의 턱이 굳었다. 단순한 관리국 요원이 아니었다.
세 번째 패킷 전송 중.
이건 시간이 좀 걸려. 용량이 커.
진행 바가 천천히 차올랐다. 12퍼센트. 23퍼센트. 하은은 기다리는 동안 두 번째 패킷의 데이터를 훑었다. 오민준의 특수 임무 내역. '직조자 혈통 관리 — 서정환 회수 작전 참여. 서하은 장기 감시 프로토콜 기안.'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굳었다. 오민준이 아버지의 실종에 관여했다.
세 번째 패킷 전송 완료.
하은은 파일을 열었다. 가계도의 확장판이었다. 아까 본 것보다 훨씬 상세한 버전. 각 세대의 직조자 옆에 능력 유형과 발현 시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시선이 가계도의 맨 아래에 닿았다. 서하은의 이름 옆에 새로운 항목이 추가되어 있었다. 아까 본 빨간 글씨의 '관찰 대상'이 아니었다.
갱신일: 오늘 날짜.
'제8세대 직조자 — 능력 각성 진행 중. 회수 우선순위: 최상.'
하은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회중시계를 움켜쥐었다. 정수가 손바닥 안에서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은아, 감시망 반응 감지.
내 위치 추적 시작됐어.
지금 접속 끊는다.
텍스트가 멈추고 화면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커서가 평범하게 깜빡였다. 세진의 흔적은 바탕화면에 남겨진 세 개의 파일뿐이었다.
하은은 파일들을 외장 하드에 옮기고 노트북에서 삭제했다. 외장 하드를 서랍 깊숙이 밀어넣는 손이 빨랐다. 회중시계를 들어 눈높이에 맞췄다.
정수의 빛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문양은 여전히 선명했다. 나선형으로 꼬인 실의 구조. 직조.
현관 쪽에서 소리가 났다. 전자 도어록의 번호 입력음. 하은이 설정한 비밀번호가 아닌 다른 패턴이었다.
시계를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싱크대 아래에서 과도를 꺼내 손에 쥐었다.
도어록의 빨간 불이 초록으로 바뀌며 문이 열렸다.
문 앞에 선 남자의 얼굴을 보고 하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오민준이었다. 정장 차림, 왼쪽 귀에 통신 이어피스. 그의 뒤로 복도에 검은 코트를 입은 인원 두 명이 더 서 있었다.
오민준이 하은의 손에 들린 과도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서하은 기자. 아직도 그런 걸로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의 시선이 하은의 주머니 쪽으로 내려갔다. 정수의 잔광이 천 사이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버님 유품, 잘 보관하고 계셨군요."
오민준이 한 발 안으로 들어서며 손을 내밀었다.
"직조자의 매듭. 그건 원래 위원회 소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