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청동 골목은 밤이 되면 관광객의 발길이 끊겼다. 낮에는 전통 찻집과 갤러리가 늘어선 한적한 거리도 어둠 속에선 제 색을 잃었다. 하은은 모자를 깊이 눌러쓴 채 K의 뒤통수만 응시하며 보폭을 맞췄다.
재하의 걸음걸이가 아니었다.
어깨를 살짝 오른쪽으로 트는 버릇. 왼발을 내딛을 때 미세하게 기우는 각도. 재하의 몸이지만 그의 리듬이 아니었다. 그 위화감이 목 안을 쓰리게 했다. K는 삼청동 끝자락의 고미술품 경매장 '묵향재' 앞에서 발을 멈추더니 주머니에서 검은 카드를 꺼냈다.
카드를 리더기에 대자 잠겨 있던 유리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하은은 열두 걸음 뒤에서 그 장면을 지켜봤다. 코트 안주머니에 넣어둔 외장 하드의 무게가 옆구리를 눌렀다. 세진이 목숨으로 바꿔 넘긴 데이터. 거래 내역 속에 '묵향재'라는 이름이 세 번 등장했다. 그 사실을 되새기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K가 사라진 뒤 이십 초를 세고 문 앞으로 다가갔다. 리더기 옆에 작은 인터폰이 달려 있었다. 버튼을 누르자 짧은 잡음 뒤로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예약 번호."
"서른일곱."
세진이 해킹으로 빼낸 이번 달 경매 예약 리스트 중 아직 출석 확인이 되지 않은 번호였다. 이초의 정적. 문이 열렸다.
안쪽은 예상과 달랐다. 낡은 병풍과 도자기가 진열된 1층 전시실은 텅 비어 있었다. 바닥의 한지 위로 은은한 백단향이 퍼져 있었고, 정면의 좁은 복도 끝에 엘리베이터가 하나 서 있었다. 하은은 주위를 둘러보다 벽면의 족자 하나를 발견했다.
산수화처럼 보이는 그림 하단에 작은 글씨. 'B2 — 당일 관람만 허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자 문이 곧바로 열렸다. 내부에는 B2 버튼만 남아 있었고, 나머지 층수 표시는 전부 지워져 있었다. 하은은 안으로 들어서며 코트 깃을 여몄다.
하강하는 동안 귀 뒤 타투가 미세하게 따끔거렸다. 지난번 벙커에서 푸르게 빛났던 바로 그 자리. 손끝이 올라가 피부를 더듬었지만 빛은 없었다.
문이 열렸다.
지하 2층은 호텔 연회장 규모의 넓은 공간이었다. 천장의 간접 조명이 대리석 바닥을 따뜻하게 비추고,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이 번호판이 달린 좌석에 앉아 있었다. 정면 무대 위 유리 진열대 안에서 작은 앰플 하나가 푸른 빛을 내뿜고 있었다.
앰플 속 액체가 움직였다. 생물처럼. 찬찬히 회전하며 내부에서 미세한 빛 입자를 뿜어내는 모습이 눈보라를 압축해 놓은 것 같았다.
"영혼 정수."
옆자리에 앉은 중년 남자가 중얼거렸다. 하은이 시선을 돌리자 남자는 경매 카탈로그를 가리켰다.
"처음이시군요. 올 초부터 관리국이 무너지면서 물건이 쏟아졌어요. 저건 등급 B플러스. 순도 높은 건 오늘 마지막에 나옵니다."
하은은 카탈로그를 받아들었다. 표지에 'Essence Auction — Private Session'이라고 적혀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앰플마다 번호와 등급, 그리고 '추출 원체'라는 항목이 눈에 들어왔다.
추출 원체. 영혼을 뽑아낸 원래 육체의 정보.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건 도자기나 골동품이 아니었다. 사람의 영혼을 정제하여 액체로 만든 것을 경매에 부치고 있었다.
"높은 순도의 정수는 전이 안정률을 극적으로 올려줍니다."
남자가 카탈로그를 들춰가며 말을 이었다.
"관리국이 건재할 때는 이사회 직속 루트로만 유통됐는데. 지금은 뭐, 가격만 맞으면 누구든."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는 척하며 시선으로 홀 안을 훑었다. K는 맨 앞줄 구석에 앉아 있었다. 조명 아래 재하의 옆모습이 선명했다. 광대뼈의 각도, 눈썹 위 작은 흉터. 하은의 왼손이 무릎 위에서 주먹을 쥐었다.
무대 위로 진행자가 올라왔다. 사십 대 초반의 여자였다. 검은 정장에 귀걸이 하나 없는 깔끔한 차림.
"오늘 경매에 참석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마이크 없이도 또렷하게 울리는 목소리였다.
"관리국 체제가 변동된 이후, 정수 시장의 유통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그 첫걸음입니다."
하은의 눈이 좁아졌다. 관리국이 무너진 자리를 차지하려는 새로운 세력이 이미 조직화되어 있었다.
"첫 번째 물건, 출품 번호 001. B플러스 등급 정수, 추출 원체 남성, 이십팔 세."
경매가 시작되자 좌석 곳곳에서 번호판이 올라갔다. 하은은 참여하지 않은 채 진행자의 얼굴을 관찰했다. 어디선가 본 인상이었다. 확신은 없지만 영종도 클리닉 로비에서 스쳐 지나간 누군가의 윤곽과 겹쳤다.
세 번째 물건이 낙찰된 뒤 잠시 휴식이 주어졌다. 하은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하는 척 홀 뒤편을 살폈다. 비상구 옆에 작은 대기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는 앰플이 담긴 냉각 보관함이 여섯 개 늘어서 있었다.
등 뒤를 확인하고 대기실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보관함 유리 너머로 앰플들이 각기 다른 색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파란색, 보라색, 초록색. 맨 끝 보관함 안에 유독 짙은 남색 빛을 내는 앰플이 하나 있었다.
카탈로그를 펼쳤다. 마지막 출품 물건, 번호 012. 등급란에 'S'라고 적혀 있었다.
S등급. 다른 어떤 물건에도 없던 등급이었다.
비고란에는 '부속품 포함 — 골동 회중시계(추출 원체 소지품)'이라고만 쓰여 있었다. 하은은 보관함 옆에 놓인 작은 나무 상자를 열었다.
손이 멈췄다.
금빛 회중시계. 뚜껑에 새겨진 톱니바퀴 문양. 체인 끝의 작은 십자 장식.
아버지의 시계였다.
어릴 적 아버지가 늘 조끼 주머니에 넣고 다니던 것. 수리할 때마다 하은에게 톱니바퀴 맞물리는 소리를 들려주며 "세상 모든 것에는 맞물리는 짝이 있단다"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손가락이 겹쳐 보였다.
하은은 시계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자 시곗바늘은 멈춰 있었다. 3시 17분. 아버지가 실종된 날 마지막으로 통화한 시각.
시계 뒷면의 덮개가 미세하게 들떠 있었다. 손톱으로 밀어 열자 내부 공간에 앰플보다 작은 유리관 하나가 끼워져 있었다. 그 안에서 진한 금빛이 맥박처럼 뛰고 있었다.
정수. 정제되지 않은 원액 상태의 고순도 정수.
코트 안주머니의 외장 하드가 갑자기 더 무겁게 느껴졌다. 세진이 건넨 데이터 속 아버지의 이름 옆에 찍혀 있던 'Origin' 태그.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정수의 원천을 알고 있던, 어쩌면 직접 만들어낸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등줄기를 싸늘하게 훑고 내려갔다.
"마음에 드셨나요."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하은이 돌아섰다. 진행자 여자가 대기실 문틀에 기대서 있었다. 팔짱을 낀 자세.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지 않았다.
"관람객 구역이 아닌데요, 여기."
"죄송합니다. 화장실을 찾다가."
"화장실은 반대편이에요."
진행자가 한 발 안으로 들어왔다. 하은은 시계를 손에 쥔 채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그 시계, 아시는 물건인가 봐요."
"…골동품에 관심이 좀 있어서."
"거짓말을 잘 못하시는군요."
진행자가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시선이 하은의 왼손에 머물렀다.
"뚜껑을 여셨으니 안에 뭐가 있는지도 보셨겠네요. S등급 미정제 정수. 시장에 나오면 삼천만 소울코인은 받을 물건이에요."
"누구한테서 가져온 겁니까."
하은의 목소리가 반음 낮아졌다. 진행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출품자 정보는 비공개예요. 다만."
여자가 보관함 쪽으로 걸어가 유리면을 손가락으로 톡 두드렸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어. 단지 주인이 바뀌었을 뿐이지."
말투가 달라졌다. 경매 진행자의 정중함이 벗겨지고, 무언가를 체념한 사람 특유의 건조함이 깔렸다.
"관리국이 무너져도 영혼은 여전히 상품이에요. 이사회가 쥐고 있던 유통망을 우리가 인수했을 뿐, 구조는 달라진 게 없어요."
여자가 하은을 정면으로 바라봤다.
"당신이 기자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서하은 씨."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것이 내려갔다. 하은은 시계를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진행자와의 거리를 계산했다. 문까지 네 걸음. 복도까지 일곱 걸음.
"긴장하지 마세요. 여길 들어올 수 있었다는 건 우리가 허락했다는 뜻이니까."
진행자가 문 옆 벽에 등을 기댔다. 퇴로를 막은 건지 편한 자세를 취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시계의 주인이 당신 아버지라는 것도, 아버지가 뭘 만들었는지도 알아요. 서정환 박사. 대한생명공학연구소 초기 멤버. '정수 추출의 아버지'라는 별명을 가진 사람."
하은의 손가락이 주머니 안에서 시계 체인을 감았다. 금속이 손바닥에 파고드는 감촉에 집중하며 표정을 다잡았다.
"아버지는 실종됐습니다."
"실종이 아니라 도주예요. 자기가 만든 기술이 뭘 낳았는지 깨달은 뒤에."
진행자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시계 안의 정수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어떤 것과도 달라요. 추출 원체 정보가 없거든요. 누구의 영혼도 아닌 순수한 정수. 그걸 만드는 방법을 아는 건 세상에 서정환 박사 한 사람뿐이었어요."
홀 쪽에서 경매 재개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진행자는 정장 소매를 매만지며 문을 향해 돌아섰다.
"시계는 가지세요. 출품 취소할게요. 대신."
여자가 어깨 너머로 하은을 봤다.
"아버지를 찾으면 우리한테도 알려주세요. 그분이 필요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거든요."
진행자가 사라졌다. 대기실에 홀로 남았다. 주머니 안의 시계가 체온을 빨아들이듯 차가웠다. 뚜껑을 다시 열었다. 금빛 정수가 여전히 맥박처럼 명멸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만든 것. 누구의 영혼도 아닌 순수한 정수. 그것이 영혼 전이의 핵심 재료라면, 아버지는 단순한 기술자가 아니라 이 모든 비극의 설계자였다.
하은은 시계 뚜껑을 닫았다. 3시 17분에 멈춘 바늘이 유리 너머로 흐릿하게 보였다.
복도로 나서는데 홀 입구에서 K와 마주쳤다. 재하의 얼굴이 조명 아래서 반쪽만 밝게 드러나 있었다. K는 하은을 보더니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조끼 주머니를 톡톡 두드렸다.
재하의 버릇이었다. 회중시계를 확인할 때면 늘 그렇게 주머니를 두드리던 습관. K의 의식이 아니라 육체에 새겨진 기억이 발현된 것이다.
하은의 왼손이 귀 뒤 타투를 세 번 문질렀다. K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입술이 열리더니 재하의 음색으로, 재하가 절대 하지 않았을 말이 흘러나왔다.
"그 시계, 아직도 3시 17분에 멈춰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