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스트가 타는 냄새에 하은이 고개를 들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토스터 앞에서 재하가 멍하니 서 있었다. 왼손으로 버터 나이프를 쥔 채. 재하는 오른손잡이였다. 늘 그랬다. 수술실에서도, 하은의 머리카락을 넘겨줄 때도.
왼손.
하은은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검은 액체 위로 천장 조명이 작은 원을 그렸다. 손목 안쪽의 관찰자 표식이 미세하게 열을 내고 있었다. 어젯밤부터 시작된 증상이었다. 붉은 빛이 피부 아래에서 맥박처럼 깜빡이며, 재하의 심장 박동과 정확히 같은 간격으로 뛰었다.
"탔어."
하은이 말하자 재하가 고개를 돌렸다. 그 동작이 낯설었다. 재하는 원래 몸 전체를 돌리는 사람이었는데, 이 남자는 목만 꺾었다. 짧게. 날카롭게.
"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그 말이 식탁 위를 굴렀다. 하은은 포크를 집었다가 내려놓았다. 재하가 하은에게 존댓말을 쓴 건 처음 만난 날과 오늘, 딱 두 번이었다.
"커피 줄까."
"감사합니다. 블랙으로요."
재하도 블랙을 마셨다. 그건 같았다. 하은은 머그잔을 들어 커피를 따랐다. 재하의 시선이 하은의 손목 안쪽, 표식이 있는 자리를 훑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하은은 손잡이를 꽉 쥐어 떨림을 눌렀다. 재하의 손이 머그잔을 받았다. 길고 마른 손가락. 검지 끝에 메스 자국이 남아 있는 외과의사의 손.
그 손이 세 사람을 죽였다.
아니. 저 손이 아니라 저 안의 것이.
"앉아."
하은이 맞은편 의자를 턱으로 가리켰다. 재하는 잠시 망설이다 앉았다. 식탁 위에는 잼 병과 접시 두 개, 그리고 하은이 어젯밤 꺼내놓은 파란 봉투가 있었다. 세 번째 서랍에서 찾아낸 것. 재하의 육체가 벙커에서 처음 깨어났을 때 말한 그 봉투였다.
봉투 안에는 USB 하나와 손으로 쓴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 필체는 재하의 것이었지만, 내용은 하은이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암호 체계로 쓰여 있었다. 정세진이 해독을 시도하다 포기한 문서.
재하의 시선이 파란 봉투 위에 멈췄다.
"그게 뭡니까."
"네 거야."
하은의 대답에 재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봉투를 집어 들지는 않았다. 손가락만 식탁 위에서 미세하게 움직였다. 무언가를 쓰는 것 같은 동작. 재하가 생각에 잠길 때 하던 버릇이었다.
"제 거라고 하셨는데, 전 기억이 없습니다."
"알아."
하은은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쓴맛이 혀 안쪽을 긁었다. 손목의 표식이 다시 뜨거워졌다. 재하의 심장이 빨라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은은 그 열기를 왼손으로 감싸 가렸다.
"여기서 얼마나 지내야 합니까."
"위험하니까 당분간."
"위험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어떤 건지 알 수 있을까요."
재하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아니, 차분한 척했다. 말끝이 살짝 올라가는 걸 하은은 놓치지 않았다. 재하의 버릇이 아니었다. 강준혁이 법정에서 증인을 심문할 때 쓰던 어조와 닮아 있었다.
하은은 대답 대신 일어섰다. 싱크대 앞으로 가서 컵을 헹궜다. 수돗물이 손등 위로 흘렀다. 차가웠다.
"네가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어?"
등 뒤에서 의자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하가 일어선 것 같았다.
"제가 누구인지는 압니다. 윤재하. 서른두 살. 신경외과 전공. 그 정도는 들었으니까요."
"들은 거지. 기억하는 게 아니라."
하은이 돌아섰다. 재하가 식탁 너머에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그의 왼쪽 어깨를 비추고 있었는데, 바닥에 드리운 그림자가 흔들렸다. 재하의 윤곽이 아닌 다른 형상이 그 안에서 일렁이는 것처럼. 하은의 동공에 영혼 파장이 잡혔다. 재하의 것이 아닌 검붉은 실타래가 그의 목 언저리에서 꿈틀거렸다.
아직 남아 있었다.
"기억은 사라졌어도, 네 몸은 여전히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어."
하은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재하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 사람이 누굽니까."
"나."
한 글자가 부엌을 채웠다. 재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가슴팍을 짚었다. 정확히 심장 위. 그리고 눈을 감았다.
하은의 손목이 타들어가듯 뜨거웠다. 표식이 붉은색에서 주황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동기화가 깊어지고 있다는 신호.
"이상하네요."
재하가 눈을 뜨며 말했다.
"당신 목소리를 들으면 여기가 아픕니다. 왜 아픈지는 모르겠는데."
하은은 수건으로 손을 닦았다. 천천히, 손가락 하나하나를.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는 걸 삼켜야 했으니까.
"아프면 좀 쉬어."
"아프다는 게 나쁜 건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재하가 식탁 위의 파란 봉투를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봉투의 모서리를 더듬었다. USB를 꺼내 불빛에 비춰보더니 표면에 새겨진 작은 글씨를 읽었다.
"LZR-09. 이게 뭘까요."
하은의 숨이 짧아졌다. LZR. 라자로. 프로젝트 라자로의 아홉 번째 프로토콜. 재하가 뇌사 판정을 받기 직전까지 연구소에서 접근하려 했던 파일 번호였다. 정세진이 해독하지 못한 메모지의 암호 체계가 이 USB의 복호화 키일 가능성이 있었다.
"잠깐."
하은이 손을 뻗었다. 재하가 USB를 쥔 채 반보 물러났다. 반사적인 동작이었다. 하은의 손가락이 허공을 잡았다.
"돌려줘."
"제 거라며요."
재하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는 건지 아닌지 모를 표정. 재하의 미소가 아니었다. 하은은 그 표정을 알고 있었다. 강준혁이 법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을 때 카메라 앞에서 지었던 바로 그 입 모양.
손목의 표식이 따끔거렸다가 가라앉았다. 동기화 패턴이 흐트러졌다. 재하의 심장 박동이 불규칙해지고 있었다.
"재하야."
하은이 이름을 불렀다. 재하의 손가락이 USB 위에서 경련하듯 떨렸다. 영혼 공명의 전조였다. 재하의 눈동자 안에서 검붉은 파장이 요동치는 게 보였다. 그 아래, 아주 깊은 곳에서 익숙한 파란빛이 한 번 깜빡였다.
"……하은아."
그 목소리는 재하의 것이었다. 1초. 아니, 0.5초도 안 되는 순간. USB가 식탁 위에 떨어졌다. 재하의 눈이 다시 낯선 것으로 채워졌다. 이마에 땀이 맺혀 있었다. 목덜미 뒤쪽, 레테 주사 자국이 있던 자리를 손으로 더듬었다.
"지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몰라도 돼."
하은은 식탁 위에 떨어진 USB를 주웠다. 손가락에 재하의 체온이 남아 있었다. 따뜻했다. 살아 있는 온도.
거실로 나온 하은은 소파에 앉아 USB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LZR-09. 정세진에게 보내야 했다. 카타콤의 장비라면 복호화가 가능할 수도 있었다.
창밖으로 오후의 햇살이 내려앉고 있었다. 건너편 공원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느긋한 웃음소리, 자전거 벨, 누군가를 부르는 목소리. 이 방 안에 두 개의 영혼이 한 몸속에서 경계를 다투고 있다는 사실과는 아무 상관없는 평화로운 소음이었다.
하은은 귀 뒤의 타투를 세 번 문질렀다. 습관이었다. 재하의 이름이 머릿속을 스칠 때마다 손이 올라갔다. 타투의 표면이 거칠었다. 처음 새겼을 때보다 두꺼워진 것 같았다.
부엌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재하가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하은이 쓰던 컵까지 함께. 재하의 습관이었다. 누가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는 동작.
하은은 일어서서 복도를 걸었다. 화장실 문 앞을 지나치다 멈췄다. 문이 열려 있었다. 재하가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거울을 보고 있었다.
아니.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있는 게 아니었다. 거울 속 형상의 그림자가 재하의 윤곽과 어긋나 있었다. 하은의 눈에는 보였다. 거울 표면에 비친 영혼 파장. 재하의 파란빛 위로 강준혁의 검붉은 실타래가 덮여 있었고, 두 색이 경계를 다투며 번갈아 깜빡이고 있었다.
재하의 오른손이 거울 표면을 짚었다.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렸다.
"재하야, 괜찮아?"
하은이 문턱을 넘으려는 순간이었다.
재하의 손이 거울에서 떨어졌다. 몸이 돌았다. 하은이 반응하기 전에 그의 손바닥이 하은의 어깨를 밀었다. 등이 복도 벽에 부딪혔다. 충격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재하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눈이 달랐다.
재하의 눈이 아니었다. 동공 안에서 검붉은 파장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입꼬리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올라갔다.
"나를 살린 게 정말 재하를 위해서야."
목소리가 반음 낮아져 있었다. 재하의 성대에서 나오는 강준혁의 억양.
하은의 손목 표식이 새빨갛게 타올랐다. 동기화가 끊겼다. 재하의 심장 박동이 아닌 다른 것이 그 안에서 뛰고 있었다.
"아니면 너의 죄책감 때문이야?"
재하의 손이 하은의 턱을 잡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