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먼저였다.
서울의 밤하늘을 가르며 수천 개의 푸른 실타래가 건물 사이로 솟구쳤다. 중앙 타워 꼭대기에서 시작된 파장이 동심원을 그리며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고, 하은은 무릎을 꿇은 채 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영혼들이었다.
타인의 몸속에 억지로 밀어 넣어진 빛의 덩어리들이 하나둘 육체를 빠져나와 밤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어떤 것은 창문을 뚫고, 어떤 것은 벽을 관통했다. 소리는 없었다. 다만 하은의 귀 뒤에서 타투가 미세하게 진동하며 그 파장들을 읽어냈다. 수백, 수천 개의 영혼 파장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주파수.
"작동하고 있어."
정세진의 목소리가 이어폰 너머로 들렸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그 뒤에 깔렸다.
"전이 대상 목록의 87퍼센트가 리셋 완료. 영혼관리국 서버도 완전히 먹통이야."
하은은 대답 대신 앞을 보았다. 바닥에 누운 남자의 몸 위로 두 개의 빛이 엉켜 있었다. 재하의 육체. 그 안에서 설계자의 잔여 파장이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청색과 회색이 뒤섞인 빛의 소용돌이가 남자의 가슴팍 위에서 천천히 분리되기 시작했다.
하은은 기어가듯 다가갔다. 콘크리트 바닥이 무릎을 긁었지만 느끼지 못했다. 손을 뻗었다. 재하의 손등에 닿자 체온이 전해졌다. 미지근하고, 살아 있는 온기.
회색 빛이 마지막으로 한 번 요동쳤다. 설계자의 흔적이 육체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순간, 하은의 시야에 영혼 파장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재하 고유의 파장. 연한 금빛. 오래전 처음 그를 만났을 때 보았던 것과 같은 색이었다.
"세진, 지금 이쪽 상태 보여?"
"영혼 각인 수치가 떨어지고 있어. 설계자의 파장이 거의 소멸됐고… 잠깐."
타이핑이 멈췄다.
"재하 씨 고유의 파장이 육체와 재동기화하고 있어. 근데 뇌파 패턴이 이상해. 기억 영역이 거의 백지야."
손가락이 차가워졌다. 재하의 손을 잡은 하은의 손가락 끝에서 혈색이 빠졌다. 알고 있었다. 레테를 100일 가까이 투여받은 육체에 원래 주인의 영혼이 돌아온다 해도, 억제제가 지워버린 기억까지 복구될 수는 없다는 것을.
세진이 카타콤에서 가져온 외장 하드에는 그 가능성이 수치로 적혀 있었다. 기억 복구 확률 11퍼센트. 숫자를 처음 본 날 밤, 하은은 약혼자의 음성 메시지를 재생하지 않았다. 대신 베란다에 서서 한강 너머를 멍하니 바라봤다. 열한 번 중 한 번. 그게 재하가 그녀를 기억할 확률이었다.
남자의 눈꺼풀이 떨렸다.
하은의 숨이 가늘어졌다.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가, 다시 풀었다. 너무 세게 쥐면 부서질 것 같았다. 재하의 손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은 씨, 들려?"
세진의 음성이 다급해졌다.
"의식이 돌아오고 있어. 심박수 정상 범위 진입. 그런데 기억 영역 활성도가 3퍼센트야. 거의…"
"알아."
짧게 끊었다. 목소리가 갈라지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재하의 입술이 벌어졌다. 소리 없이 공기를 들이마시는 움직임. 속눈썹이 한 번 더 떨리고, 천천히 눈이 열렸다. 검은 동공이 천장의 푸른 빛을 반사했다. 초점이 없었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빛 자체에만 반응하는 눈.
그 눈이 하은 쪽으로 돌아왔다.
시선이 마주쳤다. 하은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굳었다. 웃어야 하는지, 울어야 하는지.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얼굴이 그대로 멈춰 있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쉰 목소리. 오랫동안 쓰지 않은 성대가 공기와 마찰하며 내는 거친 소리.
"이름이 뭐예요?"
세 글자가 갈비뼈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은의 왼손이 귀 뒤 타투를 짚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손끝이 타투 위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재하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친숙함도, 그리움도, 원망도. 그저 처음 보는 사람을 향한 순수한 호기심만이 고여 있었다.
"서하은."
가까스로 이름을 말했다. 목 안쪽이 뜨거웠지만 눈은 마른 채였다.
"서… 하은."
남자가 따라 읽듯 중얼거렸다. 그 입술의 움직임은 재하의 것이었다. 발음의 끝을 살짝 올리는 버릇까지 그대로. 몸이 기억하는 것과 정신이 기억하는 것 사이의 간극이 하은의 흉골 위를 눌렀다.
"당신은 윤재하야."
"윤… 재하."
자기 이름을 낯선 단어처럼 굴리는 남자의 얼굴을 하은은 오래 들여다보았다. 이마의 작은 흉터, 왼쪽 눈꼬리 밑의 점, 면도를 못 해서 거칠어진 턱선. 전부 재하의 것이었다.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나는 거 없어?"
"……하얀 방. 차가운 바늘. 그것뿐이에요."
영종도 클리닉의 시술실이었을 것이다. 하은은 눈을 감았다. 잠깐, 아주 잠깐만 감았다가 떴다.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아."
손을 다시 뻗어 남자의 이마 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손가락 사이로 전해지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익숙했다. 재하는 항상 앞머리가 눈을 가렸다. 그때마다 하은이 이렇게 넘겨주곤 했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남자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이 아니었다. 이해하고 싶다는 표정이었다. 하은의 손길을 피하지 않는 것이 그 증거였다.
세진의 음성이 다시 들렸다.
"상태 안정화 확인. 나머지 리셋도 순차적으로 완료되고 있어. 하은 씨, 일단 이동해. 관리국 서버가 먹통이라고 해도 영원하진 않아."
하은이 재하의 팔을 자기 어깨에 걸쳤다. 남자의 체중이 쏟아졌다. 근육이 오랫동안 쓰이지 않은 탓에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은은 이를 악물고 일어섰다. 허리가 휘청거렸지만 버텼다.
"걸을 수 있어?"
"…모르겠어요."
"해봐."
재하가 한 발을 내디뎠다. 비틀거렸다. 하은이 허리를 잡아 중심을 잡아줬다. 두 번째 발. 조금 나았다. 세 번째. 하은의 어깨를 잡은 재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잘하고 있어."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하은 자신도 몰랐다.
명동성당 지하 카타콤까지는 도보로 사십 분 거리였다. 두 사람은 새벽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리셋의 여파로 곳곳에서 비상등이 점멸하고, 먼 곳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하은은 골목길을 택했다.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좁은 길. 외장 하드가 든 가방이 등에서 무게를 주장했다. 그 안에 담긴 소울코인 거래 내역은 이제 그림자 이사회를 무너뜨릴 마지막 증거였다.
재하가 걸음을 멈추었다.
"왜?"
"저기… 고양이."
골목 끝에 길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재하가 멈춰 선 것은 고양이를 무서워해서가 아니었다. 웅크린 채 고양이를 향해 손을 뻗는 남자의 모습에서 하은은 오래된 장면을 보았다. 성수동 카페 앞에서 길고양이를 만날 때마다 같은 자세를 취하던 재하.
몸이 기억하는 것들.
고양이가 코를 킁킁거리며 다가왔다. 재하의 손가락 끝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았다.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 미소를 보는 하은의 코끝이 시큰해졌다. 왼손이 다시 귀 뒤로 갔지만, 이번에는 타투를 문지르지 않았다. 그냥 그 자리에 손을 얹은 채 재하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좋아하나 봐."
"뭘요?"
"고양이."
재하가 고개를 돌렸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좋아했어요? 나, 원래?"
"응. 엄청."
"그래요?"
남자가 다시 고양이를 보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기억이 없었다. 대신 기억보다 오래된 무언가, 뼛속에 새겨진 습성 같은 것이 있었다.
카타콤에 도착한 것은 새벽 네 시 반이었다.
세진이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노트북을 겨드랑이에 낀 채 두 사람의 상태를 훑었고, 말없이 안쪽으로 안내했다. 지하 통로의 습한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오래된 석조 벽에서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다.
세진이 간이 침대를 펴주었다. 재하가 누웠다. 눈을 감지 않았다. 천장을 보며 무언가를 더듬는 표정이었다.
"자도 돼. 안전한 곳이야."
"안전한지 어떻게 알아요?"
"내가 확인했으니까."
재하가 하은을 보았다. 길게, 천천히.
"당신이 확인하면 안전한 거예요?"
"그래."
"…왜요?"
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 옆 바닥에 앉았다. 등을 벽에 기댔다. 가방에서 외장 하드를 꺼내 무릎 위에 올렸다. 작고 단단한 금속 케이스. 세진이 목숨을 걸고 확보한 것. 하은은 엄지로 케이스의 모서리를 천천히 쓸었다. 이 안에 들어 있는 거래 기록이 세상에 공개되면 모든 것이 바뀔 터였다. 강준혁이 윤재하의 몸을 사들인 영수증까지.
"서하은 씨."
"응."
"나, 당신한테 중요한 사람이었어요?"
하은의 엄지가 케이스 위에서 멈추었다.
"…응."
"어떤 사이였는데요?"
"그건 나중에."
"지금 알고 싶은데."
재하가 옆으로 고개를 돌려 하은을 보았다. 간이 침대의 낮은 높이 때문에 두 사람의 시선이 거의 수평이었다. 이 가까운 거리에서 재하의 눈동자 속 금빛 파장이 하은의 시야에 또렷이 잡혔다. 잔잔하고, 따뜻하고, 재하만의 것.
"약혼자였어."
남자의 눈이 깜빡였다.
"약혼자."
"응."
"그러면 나는 당신을… 많이 좋아했겠네요."
하은의 손가락이 외장 하드의 모서리를 꽉 쥐었다. 금속이 손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그랬어."
"다행이다."
왜 다행이냐고 물으려다 멈추었다. 재하의 눈이 감기고 있었다. 잠이 오는 것인지, 아직 완전히 적응하지 못한 육체가 한계를 보이는 것인지. 호흡이 고르게 가라앉았다. 잠든 것이다.
하은은 한참을 그 얼굴을 보았다.
세진이 통로 끝에서 커피 두 잔을 들고 돌아왔다. 블랙. 하은의 취향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컵을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외장 하드 데이터 정리 끝났어. 내일 아침이면 언론사 서버에 올릴 수 있어."
"고마워."
"고맙긴." 세진이 노트북을 펴며 맞은편 벽에 등을 기댔다. "영혼관리국 서버 복구까지 최소 72시간. 그 안에 다 터뜨려야 해."
하은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혀 위에서 퍼졌다. 따뜻함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삼 주가 지났다.
외장 하드의 데이터는 세진의 손을 거쳐 중앙일간지 1면에 실렸다. 소울코인 거래 내역, 영종도 클리닉의 시술 기록, 그림자 이사회 멤버 명단. 서울이 뒤집혔다. 검찰 특별수사팀이 꾸려졌고, 영혼관리국 수석 요원 오민준이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한남동 유엔빌리지의 '안식의 집'이 급습당하는 장면이 생중계된 날, 하은은 성수동 오피스텔 거실에서 세진과 나란히 소파에 앉아 그 화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재하는 안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화면 속에서 검은 조끼를 입은 수사관들이 철문을 부수고 진입했다. 로비에 쏟아지는 조명탄의 섬광이 카메라 렌즈를 하얗게 태웠다. 세진이 노트북 화면과 텔레비전을 번갈아 보며 중얼거렸다.
"오민준 체포 영상 떴다. SNS 실시간 트렌드 1위."
하은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수갑이 채워진 오민준의 뒷모습이 잡혔다. 양복 소매가 구겨져 있었고, 뒷머리가 흐트러져 있었다. 저 남자가 재하의 전이 시술을 승인한 사람이었다. 서류에 도장을 찍고, 레테 투여량을 결정하고, 강준혁의 영혼을 재하의 몸에 밀어 넣는 일정을 짠 사람.
화면이 바뀌었다. 앵커가 이사회 멤버 명단을 읽어 내려갔다. 재벌 총수, 전직 장관, 대형 로펌 대표. 하은이 외장 하드에서 직접 추출한 이름들이었다.
세진이 캔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끝난 거야?"
하은은 대답하지 않았다. 텔레비전 속 오민준이 호송차에 올라타는 장면을 보았다. 차 문이 닫혔다. 그 장면이 반복 재생되었다. 문이 닫히고, 열리고, 다시 닫혔다.
가슴 안쪽이 텅 비어 있었다. 통쾌함이 차오를 줄 알았다. 이를 악물고 달려온 밤들, 카타콤의 차가운 바닥에서 새운 밤들, 재하의 빈 눈을 마주할 때마다 삼킨 비명들. 그 대가가 지금 화면 속에서 수갑 찬 남자의 뒷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런데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복수의 끝이 이런 맛이라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하은 씨."
세진이 조용히 불렀다. 하은이 고개를 돌렸다. 세진의 눈이 화면이 아닌 하은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울어도 돼."
"안 울어."
"알아. 그냥 해본 소리야."
세진이 시선을 노트북으로 돌렸다. 하은은 다시 화면을 보았다. 앵커의 목소리가 거실을 채웠다. 피해자 수, 전이 건수, 소울코인 추정 거래 규모. 숫자들이 자막으로 흘렀다. 하은은 그 숫자들 사이에서 재하의 이름을 찾지 않았다. 피해자 신원은 비공개였다. 그게 하은이 유일하게 지킬 수 있었던 것이었다.
리모컨을 집어 텔레비전을 껐다. 화면이 꺼지자 거실이 어두워졌다. 세진의 노트북 화면만이 푸르스름한 빛을 흘렸다.
"기사는 다른 기자들한테 넘길 거야."
"왜? 네 특종인데."
"재하 재활이 더 급해."
세진이 잠시 하은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하은은 소파에서 일어나 안방 문 앞에 섰다. 문틈으로 재하의 고른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왼손이 귀 뒤로 올라갔다. 타투를 한 번 짚고 내렸다.
재하는 매일 조금씩 나아졌다. 걸음이 안정되었고, 식사를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하은의 이름을 외우는 데 사흘, 커피를 블랙으로 마시는 하은의 습관을 파악하는 데 일주일, 그녀가 왼손으로 귀 뒤를 만지는 버릇이 무언가를 참는 신호라는 것을 눈치채는 데 열흘이 걸렸다.
새로운 기억이 쌓이고 있었다.
오래된 기억 대신.
4월의 첫째 주 금요일. 하은은 퇴근길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두 개를 샀다. 참치마요와 불고기. 재하가 참치마요를 고를지 불고기를 고를지 궁금했다. 예전의 재하는 항상 참치마요였다.
카타콤을 나와 세진이 마련해준 성수동의 작은 오피스텔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부엌에서 물 끓는 소리가 들렸다. 재하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냄비 앞에 서서 젓가락으로 면을 들어 올리는 자세가 어색했다.
"삼각김밥 사왔어."
"뭐 맛이에요?"
"참치마요랑 불고기."
재하가 잠시 둘을 번갈아 보더니 불고기를 집었다.
하은은 참치마요의 포장을 뜯으며 입꼬리를 올렸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일이어야 했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뒤, 하은은 베란다에 나갔다. 4월의 밤공기가 서늘했다. 한강 너머로 도시의 불빛이 흩어져 있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음성 메시지 폴더. 재하의 목소리가 담긴 파일이 열두 개. 삼 주 동안 한 번도 재생하지 않았다.
엄지가 재생 버튼 위를 맴돌았다.
누르지 않았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거실로 돌아왔다. 재하가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뉴스 채널. 그림자 이사회 관련 후속 보도가 흘러나왔다. 재하는 화면을 보다가 하은이 돌아온 것을 알아채고 고개를 돌렸다.
"나 여기 나와요?"
"아니. 피해자 신원은 비공개야."
"다행이다."
또 다행이라고 했다. 하은은 소파 반대편에 앉았다. 쿠션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예전이라면 그 쿠션 자리에 재하의 팔이 있었을 것이다.
토요일 오후.
성수동 카페거리를 걸었다. 재하의 재활 겸 산책이었다. 봄볕이 보도블록 위에 내려앉았고, 벚꽃이 바람에 흩날렸다. 재하가 꽃잎 하나를 손등 위에 올렸다. 들여다보다가 후 불어 날려버렸다.
평범한 오후였다.
하은은 커피를 한 손에 들고 재하보다 반 보 뒤에서 걸었다. 남자의 뒷모습을 보았다. 어깨 너비, 걸음 폭, 고개를 살짝 오른쪽으로 기울이는 습관. 전부 재하의 것.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건너왔다. 평범한 토요일 오후의 인파. 하은은 커피를 마시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한 남자가 인파 사이로 걸어왔다.
하은의 시선이 멈추었다.
강준혁의 얼굴이었다. 원래의 얼굴. 재하의 몸이 아닌, 강준혁 본인의 날카로운 턱선과 깊은 눈. 그 남자가 죽었다는 것은 서류상 확인된 사실이었다. 청와대 특수비서실이 위조한 사망 진단서. 해외 교통사고. 시신은 화장.
그 남자가 걸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