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아버지의 차
둘째의 비밀은 둘째의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그렇게 정했다. 서고의 야간 방문자. 추적할 수 있다. 기감이 더 강해지면 정체를 알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추적하지 않는다. 전생이라면 즉시 캤을 것이다. 정몽주의 밀회 장소를 파악하고, 이방석의 연통을 가로채고, 방간의 무장 동향을 감시했다. 모든 정보를 쥐고, 모든 비밀을 알고, 그것으로 판을 짰다. 완벽했다. 그리고 그 완벽함의 끝에는 항상 죽음이 있었다.
이번에는 기다린다. 필요할 때 꺼내면 된다.
달리기를 마치고 정좌호흡을 했다. 기감이 잡히는 데 열네 호흡. 매일 조금씩 빨라지고 있다.
달리기 후 연무장에서 큰형의 수련을 관람했다. 오늘은 검이 아니라 권(拳)이었다. 큰형의 주먹이 허수아비를 때릴 때마다 흙먼지가 일었다.
셋째가 옆에 와서 앉았다.
"구경이냐?"
"예, 형."
"큰형의 권은 검만큼 곧지는 않다. 하지만 무겁지."
"형의 검은 어떻습니까?"
"빠르지. 곧지는 않아도 빠르다."
"빠른 것과 곧은 것, 어느 쪽이 강합니까?"
셋째가 잠시 큰형을 보았다.
"모르겠다. 아직 이겨본 적이 없으니까."
'아직'이라는 말에 힘이 들어 있었다. 포기가 아니었다. 14화에서 담을 치던 주먹과는 다른 힘이었다.
"형은 이길 수 있을 겁니다."
셋째가 나를 봤다. 눈이 가늘어졌다가, 풀렸다.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이상하다."
"왜요?"
"진심으로 들리니까."
셋째가 일어나 연무장으로 갔다. 큰형 옆에 서서 권을 따라 휘둘렀다. 큰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잡아주었다. 형제가 나란히 주먹을 뻗는 모습이 아침 햇살 아래서 선명했다.
달리기 후 서고에 올랐다. 둘째가 기초편 다섯 번째 장을 펴두고 있었다.
"오늘은 오감(五感)과 기감의 차이에 대해 읽는다."
"기감은 오감이 아닙니까?"
"아니다. 기감은 여섯 번째 감각이다. 눈으로 못 보고, 귀로 못 듣고, 코로 못 맡는 것을 기감은 느낀다."
"그러면 기감이 더 정확합니까?"
"아니. 더 예민하지만 더 흔들린다. 오감은 물리적이니까 거짓이 어렵지만, 기감은 마음에 연결되어 있으니까 마음이 흔들리면 기감도 왜곡된다."
"마음이 보고 싶은 것을 기감이 보여준다는 뜻입니까?"
둘째가 나를 봤다.
"정확하다. 그래서 기감 수련은 심마 수련과 같이 가는 거다."
그 말이 11화에서 담장 너머의 바람을 느꼈을 때의 의문을 풀어주었다. 바람의 결이 틀어진 것이 기감인지, 공포가 만든 환상인지. 마음이 흔들리면 기감도 흔들린다.
오후. 운이 찾아왔다.
"가주님께서 서재로 오시라 하셨습니다."
긴장했다. 서재 호출은 보통 무언가를 확인하겠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질문은 항상 질문의 탈을 쓴 시험이었다.
서재의 문을 열었다.
차 냄새가 났다.
탁자 위에 다기(茶器)가 놓여 있었다.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버지가 탁자 앞에 앉아 차를 우리고 있었다. 검을 차고 있지 않았다. 가주의 상투도 아닌, 평상시의 머리를 풀어 내린 모습.
심문도, 훈시도, 회의도 아니다.
차다. 그냥 차.
"앉아라."
앉았다. 탁자가 낮아서 아버지와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마셔라."
마셨다. 따뜻했다. 쓰지 않았다. 어딘가의 산자락에서 바람과 함께 자란 잎의 맛이었다.
"어떠냐."
"……좋습니다."
"어디가 좋으냐."
"따뜻한 게 좋습니다."
아버지가 잠시 나를 보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가 잔에 차를 따랐다. 작은 잔이었다. 아이의 손에 맞는 크기. 차의 온도가 뜨겁지 않았다. 입에 대자마자 마실 수 있는 온도. 식혀두었다. 아이가 마시기 좋게.
그 사소한 배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전생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는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들과 함께 차를 마신 적은 없다. 조정에서 신하들과 마시고, 사냥 후 장수들과 마시고, 함흥에서 혼자 마셨다. 아들에게 건넨 것은 차가 아니라 화살이었다. 함흥차사들의 목에 꽂힌 화살.
이 한 잔이, 저 화살보다 더 깊이 박힌다.
아버지가 말했다.
"천룡세가를 세운 것은 네 고조할아버지다."
옛이야기를 꺼내는 것인가. 긴장을 풀고 들었다.
"무림에서 발 하나 디딜 곳 없이 쫓기던 사람이었다. 사파에게도 정파에게도 쓸모없다고 버림받은 사람. 혼자서 산속에 들어가 삼년을 수련했다. 천룡결은 그때 완성됐다."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이어갔다.
"삼년 뒤 산에서 내려와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처음에는 초가 한 채였다. 거기서 제자 셋을 받았고, 셋이 열이 되고, 열이 백이 됐다."
잔을 내려놓았다.
"아버지. 뿌리 안에 벌레가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아버지의 손이 잔 위에서 멈추었다. 1초. 그리고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벌레를 잡으면 뿌리에 상처가 나고, 놔두면 뿌리가 썩지."
"그러면요."
"상처가 나더라도 잡아야지. 썩은 뿌리는 다시 살릴 수 없지만, 상처 난 뿌리는 아문다."
"아버지는 상처를 감수하실 수 있습니까?"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다. 해야 한다."
"혼자 하실 겁니까?"
"가주의 일이니까."
"아들들은요? 도울 수 없습니까?"
아버지가 나를 오래 봤다.
"……할 수 있겠느냐."
"배우고 있습니다."
"뿌리가 깊으면 바람에 안 쓰러진다. 하지만 뿌리가 깊을수록, 뽑힐 때 땅도 같이 뒤집힌다."
가주의 고민이었다. 세가를 지키는 것과 세가를 바꾸는 것 사이의 긴장. 곽현의 배신은 뿌리 안의 벌레였다. 벌레를 잡으려면 뿌리를 파야 하고, 뿌리를 파면 나무가 흔들린다.
전생에서 이 문제를 풀었던 방식이 떠올랐다. 사병혁파. 6조 직계제. 공신 숙청. 뿌리 안의 벌레를 잡기 위해 뿌리 자체를 뒤집었다. 효과적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형제가 죽고, 처남이 죽고, 아버지와 원수가 되었다.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걸, 56년의 끝에서야 알았다.
입을 열지 않았다. 왕으로서 할 말은 백 가지가 넘지만, 아들로서 할 말은 하나뿐이었다.
"……예, 아버지."
아버지가 잔을 내려놓고 내 머리를 쓸어주었다. 넓은 손바닥이 정수리에서 뒤통수까지 천천히 내려갔다. 1화에서 이마를 짚었을 때와 같은 손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움찔하지 않았다.
따뜻했다.
서재에서 나왔다. 문 앞에서 한 번 뒤를 돌아봤다.
아버지가 식은 차를 들어 마시고 있었다. 잔을 내려놓을 때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가주의 피로. 세가를 짊어진 무게가 저 떨림에 있었다. 10년이 아니라 대대로 내려온 무게.
내가 이 뿌리의 벌레를 잡는다.
아버지 손을 더는 떨게 하지 않는다.
서재에서 나왔다. 복도에 운이 서 있었다.
"사공자. 안색이 밝으십니다."
"차가 좋았습니다."
운이 미소를 지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작았지만 진짜였다.
"가주님도 좋아하셨을 겁니다."
운이 먼저 걸어갔다. 나는 그 뒤를 따라가면서 생각했다.
이 사람들을 지킨다. 이번에는.
밤. 정좌호흡을 했다. 열세 호흡에서 기감이 잡혔다. 어제보다 한 호흡 빨랐다. 아버지의 차 한 잔이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 것인가. 기감은 마음에 연결되어 있다고 둘째가 말했다. 고요한 마음이 맑은 기감을 만든다. 오늘의 한 호흡은 차 한 잔의 무게다. 하지만 그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