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는 서가의 맨 끝 칸에서 손을 멈췄다.
책 사이에 끼워진 것은 편지가 아니었다. 얇은 유리병이었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그것 안에는 희끄무레한 빛이 가만히 잠들어 있었다. 병 목을 감싼 인장은 델마르크 가문의 문양이 아니었다. 황실 직인이었다.
세라는 병을 꺼내지 않았다. 손끝이 유리 표면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차가웠다. 얼음보다 더, 금속보다도 더.
복도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책을 한 권 뽑아 들고 서가에서 물러섰다. 자연스럽게. 너무 자연스러워서 스스로도 섬뜩할 만큼.
킬리안이 서재 문 안으로 들어선 것은 그로부터 열두 걸음 뒤였다. 그는 세라를 보았다. 세라는 책을 펼쳐 들고 있었다. 거꾸로.
"이 시각에 서재를."
"잠이 오지 않아서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이 세라의 손으로, 그다음 그녀 뒤편의 서가로 이동했다. 무언가를 확인하는 눈이었다. 계산하는 눈이었다.
세라는 책을 바로 돌렸다. 페이지를 한 장 넘겼다. 손이 흔들리지 않았다.
"공작님도 잠이 안 오십니까."
킬리안의 입술이 미세하게 움직였다가 닫혔다. 그것이 부정인지 긍정인지 세라는 읽어내지 못했다. 그가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서랍을 열었다. 서랍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지 않고 닫았다. 세라는 그 동작을 눈꼬리로 쫓았다.
"거기 책은 철학 서적입니다."
"알고 있어요."
"거꾸로 들고 있었는데."
세라는 책을 덮었다. 변명하지 않았다. 핑계를 찾지도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이 남자를 당황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 십 년치의 경험으로.
킬리안이 창가로 이동했다. 창 너머로는 노스페라 고원의 밤이 펼쳐져 있었다. 만년설 위로 아우로라처럼 흔들리는 빛. 결계의 가장자리가 밤마다 저런 색으로 물든다는 것을 세라는 처음 알았다. 꿈속에서는 낮만 있었으니까.
"잠이 오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세라는 잠시 망설였다. 망설임이 표정에 나타나지 않도록 유리창 쪽을 바라보았다.
"꿈을 꾸지 않아서요."
킬리안의 어깨가 아주 조금 굳었다. 세라는 그 변화를 보지 않은 척했다.
"꿈이 없으면 잠이 옅어집니다. 공작령 북단은 결계의 영향으로 몽환 마력이 차단되어 있어서." 그녀는 계속 말했다. 담담하게. "원래 꿈을 자주 꾸는 편이라 적응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며칠이면 익숙해집니다."
"그러겠지요."
대화가 끊어졌다. 킬리안은 창을 향해 서 있었고 세라는 서가 앞에 서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다섯 걸음이었다. 넓지도 좁지도 않은,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 간격.
세라는 그 간격을 꿈속에서 본 적이 없었다. 꿈속의 킬리안은 언제나 손이 닿을 거리에 있었다. 그것이 그가 허용한 것인지 세라가 만들어낸 것인지는 이제 구분할 수 없었다.
품 안의 작은 무게가 느껴졌다. 세라는 손을 드레스 주머니 쪽으로 가져갔다. 안에는 작은 양피지 조각이 접혀 있었다. 꿈속에서 그와 나눈 약속들을 스스로 기록해둔 것이었다. 글씨는 희미했다. 꿈에서 깨자마자 적었기 때문에 손이 떨려 있었을 테니까. 그녀는 그 종이를 펼치지 않았다. 그냥 그 무게만 확인했다.
"공작님."
"."
"결계가 흔들린 적이 있습니까. 최근에."
킬리안이 돌아봤다. 이번에는 눈이 달랐다. 창을 볼 때와 달리 세라를 볼 때의 눈은 무언가를 측정하는 것 같았다. 온도를 재는 것처럼.
"왜 그것을."
"결속 계약의 당사자입니다. 결계의 상태는 제 마력과도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세라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밤 서가에서 황실 직인이 찍힌 병을 발견했습니다."
정적이 내려앉았다.
킬리안이 세라 쪽으로 걸어왔다. 한 걸음. 두 걸음. 다섯 걸음이 세 걸음으로 줄었다. 세라는 움직이지 않았다.
"건드렸습니까."
"아니요. 손끝이 닿았다가 뗐습니다. 유리가 너무 차가워서."
그의 눈 속에서 무언가가 지나갔다. 안도인지 의심인지 세라는 가려내지 못했다. 다만 그가 멈췄다. 두 걸음 거리에서.
"그것은 몽정석 추출 샘플입니다. 황실에서 정기적으로 검수하는 것이고."
"황실 직인이 찍힌 샘플을 서가 책 사이에 보관하는 공작가가 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세라의 입안이 건조해졌다. 목을 넘기고 싶었지만 참았다. 이 남자 앞에서 긴장을 드러내는 것은 카드를 먼저 내보이는 것과 같았다. 꿈속에서도 그랬다. 그는 상대가 먼저 흔들리기를 기다렸다.
"공작님이 결계를 유지하는 대신 황실이 뭔가를 주고 있는 것이겠지요." 세라는 천천히 말했다. "아니면 가져가거나."
"아이젠 가의 여식이 생각보다 입이 가볍군요."
"생각보다 귀도 밝으시네요.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킬리안의 눈이 좁아졌다. 세라는 그 표정을 알았다. 꿈속에서 수십 번 본 얼굴이었다. 계산이 예상보다 복잡해졌을 때 나오는 얼굴. 이 남자는 자신이 모르는 변수를 싫어했다. 그리고 지금 세라는 그의 서가에서 가장 큰 변수였다.
창밖의 결계 빛이 출렁였다.
두 사람이 동시에 창 쪽을 보았다. 빛이 다시 출렁였다. 이번에는 더 크게. 파동처럼. 아우로라 형태의 빛이 한쪽으로 밀렸다가 되돌아오는 것이 마치 무언가가 결계 외벽을 두드리는 것 같았다.
킬리안이 먼저 움직였다. 창가로 걸어가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손목 안쪽에 새겨진 결속 문양이 희미하게 빛을 냈다. 세라의 손목에서도 같은 문양이 반응했다. 열이 났다. 바늘로 찌르는 것처럼 얕고 날카로운 열이.
"나가 있으십시오."
"결속 계약의 당사자가 나가 있으면 공작님 혼자 결계 파동을 버틸 수 있습니까."
"나가 있으라고."
"아닙니다."
킬리안이 돌아봤다. 세라가 거기 서 있었다. 움직이지 않고.
"이 서재에서 저를 내보낼 권한이 공작님께 있습니까. 결속 계약서를 다시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그의 입술이 일직선이 되었다. 세라는 그것이 분노인지 아닌지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결계의 빛이 다시 한번 크게 흔들렸다. 이번에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유리창이 미세하게 진동하는 소리였다. 서재 안의 램프가 흔들렸다가 안정됐다.
킬리안은 창에 손을 얹었다. 그의 마력이 창 너머로 뻗어나가는 것이 세라의 문양에도 전해졌다. 연결된 것처럼. 같은 흐름 속에 있는 것처럼.
세라의 손목이 다시 뜨거워졌다. 그리고 동시에, 서가 안쪽 깊은 곳에서 희끄무레한 빛이 새어 나왔다.
황실 직인이 찍힌 유리병이었다.
킬리안이 그것을 보았다.
"그 병이 반응하면 안 됩니다."
그의 목소리에서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차가움이 아니었다. 확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