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페우스 벙커는 지하 2층 끝에 박혀 있었다.
방음재가 벽면 전체를 감싸고 있어서인지, 이곳의 정적은 다른 층의 그것과 결이 달랐다. 강이준은 그 차이를 귀로 먼저 알아챘다. 에어컨 바람 소리조차 흡음재에 먹혀 낮고 균일하게 깔렸고, 멀리서 엘리베이터가 움직이는 진동음도, 복도 끝 어딘가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도 여기까지는 닿지 않았다. 인공 조명은 취침 모드로 설정되어 벽을 따라 은은한 주황빛을 흘렸고, 수면 캡슐들은 닫힌 채로 늘어서 있었다. 이 밀폐된 공기 안에서 강이준의 신경은 오히려 더 날카롭게 곤두섰다. 들려야 할 것이 들리지 않을 때, 몸은 더 예민해지는 법이었다.
강이준은 캡슐 구역 앞 긴 소파에 앉아 있었다. 노트북 화면이 얼굴을 하얗게 씻어냈다. 목을 왼쪽으로 한 번 꺾었다가, 오른쪽으로. 관절이 낮게 울었다.
세 시간 전 복도에서 서도윤의 멱살을 쥐었던 손이 아직 뻐근했다.
그는 그 사실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커서를 드래그해서 카피 문장을 지웠다. 다시 썼다. 또 지웠다. 소비자 로그 창을 네 개 열어 놓고 숫자를 들여다보았지만 눈이 미끄러졌다. 에어컨 바람이 일정하게 흘렀다. 서늘하고 단조로운 소음이 방 안을 채웠다.
벙커 입구 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서도윤이었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들어왔다. 노트북을 들고 있었고, 머리는 아까보다 조금 헝클어져 있었다. 강이준은 화면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서도윤도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잠시 서 있더니, 소파 반대쪽 끝에 앉았다.
두 사람 사이에 소파 두 자 반쯤 되는 간격이 생겼다.
에어컨 소리.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 그 외에는 없었다.
강이준은 손등 위의 흉터를 무릎에 대고 눌렀다. 습관처럼. 압통이 손목 안쪽까지 번졌다가 가라앉았다. 그는 다시 커서를 움직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서도윤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커피 있어요."
강이준이 고개를 들었다. 서도윤은 소파 팔걸이 너머로 종이컵 하나를 내밀고 있었다. 벙커 입구 옆 자판기에서 뽑아 온 것이었다. 김이 조금 올랐다.
"언제."
"들어오면서요."
강이준은 한 박자 늦게 컵을 받았다. 손가락 끝에 따뜻한 종이컵의 온도가 전해졌다. 한 모금 마셨다. 쓰고 묽었다. 자판기 커피 특유의 인스턴트 향이 밀폐된 공기 안에서 퍼졌다.
"고마워요."
그 말이 나왔을 때 강이준 자신이 조금 놀랐다.
서도윤은 이미 자기 화면으로 눈을 돌린 뒤였다. 반응이 없었다. 그냥 받아들인 것인지, 못 들은 것인지. 키보드 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강이준은 컵을 소파 옆에 놓고 화면을 다시 보았다.
새벽 두 시가 넘어 있었다.
노바 일렉트로닉스 신제품의 데이터 로그를 다섯 번째 열람하고 있을 때, 서도윤이 다시 움직였다. 자판기 쪽으로 가는 게 아니었다. 소파 위에서 자세를 바꾸더니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강이준이 느낀 것은 무게였다.
아주 작은, 그러나 분명한 무게. 서도윤의 머리가 강이준의 어깨를 지나 목덜미 쪽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머리칼이 강이준의 목을 스쳤다. 가는 머리카락 끝이 피부를 간질이는 감각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에서 왔고, 그 간지러움은 척추를 따라 천천히 내려갔다. 등 근육이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가, 한 박자 늦게 이완되었다. 강이준은 그 감각이 사라지기 전에 숨을 참았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챘다.
밀어내지 않았다.
손이 움직이려다 멈췄다. 무릎 위에 올려둔 노트북 화면이 흐릿해졌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서도윤의 머리칼은 생각보다 부드러웠다. 로션인지 샴푸인지 모를 희미한 향이 낮게 섞여 있었다. 목덜미의 서늘한 피부 위로 그 무게가 번졌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받아들였다.
에어컨 소리가 일정하게 흘렀다. 조명은 여전히 주황빛이었다. 서도윤의 호흡이 어깨 가까이에서 느껴졌다. 들이쉬고, 내쉬고. 피곤한 사람의 리듬이었다. 강이준은 그 리듬이 자기 것과 조금씩 맞춰지는 것을 느꼈다. 저항하지 않았다. 어깨에서 힘을 빼자, 서도윤의 머리 무게가 더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그 무게가 지난 다섯 시간 동안 혼자 버티던 어깨의 긴장을 조금 녹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 낮에 멱살을 잡았던 손이 아직 뻐근한데, 같은 사람의 무게가 이렇게 가볍게 느껴진다는 것이.
강이준은 눈을 감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 서도윤이 자고 있는 건지 그냥 기대어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확인하려고 고개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 순간이 어떤 이름을 가지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이름을 붙이면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 이름도 붙이지 않았다.
한참 후에 서도윤이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강이준은 눈을 떴다. 화면을 보는 척했다. 커서가 빈 줄 위에서 깜박이고 있었다.
서도윤은 노트북을 무릎 위에 다시 올렸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나서 그가 입을 열었다.
"제안 하나 해도 돼요?"
목소리가 낮았다. 졸렸던 것인지, 말을 고른 것인지.
"들어봐요."
강이준이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서도윤이 노트북을 들어 소파 사이 공간에 놓았다. 강이준의 것과 자신의 것을 나란히 세웠다. 두 화면이 나란히 빛났다. 강이준 쪽 화면에는 소비자 인사이트 분석 보고서가 열려 있었고, 서도윤 쪽 화면에는 크리에이티브 방향성 초안이 펼쳐져 있었다.
서도윤이 말했다.
"이거 보면요. 강 팀장 쪽은 데이터에서 시작하고 있고, 저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있어요. 그래서 계속 충돌한 거잖아요."
강이준이 처음으로 서도윤 쪽 화면을 제대로 보았다. 크리에이티브 방향성 초안에는 감각적인 키워드들이 방사형으로 퍼져 있었다. 그가 보지 못했던 각도였다.
"근데 사실 이게 싸울 이유가 없어요."
서도윤이 두 화면을 번갈아 가리켰다.
"데이터가 먼저 오고, 이미지가 뒤에 받으면 돼요. 아니면 이미지가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가 검증하면 되고. 어느 쪽이든 같이 두면 더 강해지는 구조예요."
강이준이 두 화면을 보았다. 서도윤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것이 오히려 목 안쪽을 조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섯 화에 걸쳐 싸워온 것들이 사실은 방향이 달랐던 것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이 되었다.
서도윤이 말했다.
"우리, 서로를 지우지 말고 그냥 같이 두면 안 될까요?"
강이준이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멈췄다.
서도윤의 목소리에는 싸울 때의 날이 없었다. 피칭 테이블에서 상대를 제압할 때의 그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피곤하고, 그래도 아직 뭔가를 시도하려는 사람의 소리였다. 강이준은 그 온도를 어딘가에서 알고 있었다. 자신이 새벽마다 혼자 화면 앞에서 내뱉던 것과 같은 종류의 소리였다.
강이준은 손등 위의 흉터를 한 번 눌렀다. 통증이 손가락 끝까지 번졌다가 사라졌다.
두 화면이 나란히 빛나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려 했다. 수락이라는 단어가 목 안에서 형태를 잡아가고 있었다.
진동이 왔다.
소파 쿠션 위에 놓아두었던 휴대폰이었다. 강이준은 반사적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언더그라운드 탭 채널에서 알림이 들어와 있었다. 야간에 이쪽으로 연락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는 화면을 눌렀다.
메시지는 짧았다.
첨부 파일이 하나 있었다. 사진이었다. 빌딩 복도 어딘가였다. 화각이 낮고 흐릿했지만 두 사람의 실루엣은 알아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이 상대에게 서류를 건네고 있었다. 촬영된 시간대는 사진 모서리에 찍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적힌 캡션.
'서도윤, 노바 내부 자료 외부 유출.'
강이준의 손가락이 화면 위에서 굳었다.
서도윤이 옆에서 물었다.
"강 팀장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