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온 라운지의 공기는 언제나 묘하게 차가웠다.
공조 시스템이 1팀 선호 온도로 고정되어 있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서도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블랙 잭 커피 컵을 한 손으로 무심하게 들었다. 컵의 온기가 손바닥에 번지는 걸 느끼면서도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컵을 쥔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테헤란로의 아침은 벌써 빽빽했고, 빌딩 유리에 반사된 햇살이 각도를 바꾸며 라운지 바닥을 비스듬히 가로질렀다.
손가락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불규칙한 박자였다.
강이준은 그 소리를 들었다.
발표 자료를 넘기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움직였다. 태블릿 화면엔 어젯밤 두 팀이 합쳐 완성한 슬라이드가 펼쳐져 있었다. 슬라이드 서른두 장, 프로젝트 제니스의 1차 중간 보고분. 그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훑고 다시 첫 페이지로 돌아왔다. 두 번째 검토였다. 아니, 세 번째인지도 몰랐다.
서도윤의 손가락은 멈추지 않았다.
강이준은 눈을 들지 않았다.
어젯밤 열한 시, 언더그라운드 탭에서 날아온 메시지는 세 줄이었다. 화면을 스크롤하지 않아도 전부 읽히는 짧은 문장들. 그 세 줄이 지금도 망막 어딘가에 새겨진 것처럼 자꾸 겹쳐 보였다.
'서도윤은 처음부터 이 프로젝트를 망치려 했다.'
'그의 아버지가 겪은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증거는 파일 안에 있다.'
첨부된 이미지는 문서 사진이었다. 해상도가 낮았다. 하지만 레터헤드의 문양은 선명했다. 오르트 광고 기획의 도장. 날짜는 십사 년 전.
강이준은 태블릿을 덮었다.
"오늘 발표 순서."
서도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였다. 목소리에서 간밤의 흔적이라곤 없었다.
"내가 시장 분석 파트, 당신이 크리에이티브 방향성 파트. 어제 합의한 대로."
"알고 있습니다."
강이준의 대답은 짧았다. 평소보다 한 박자 늦었다.
서도윤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는 커피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소리가 없었다. 그 조심스러움이 오히려 더 또렷하게 들렸다.
"어젯밤에 연락 왔어요?"
강이준이 그제야 눈을 들었다. 서도윤은 자료를 보고 있었다. 시선이 화면에 고정된 채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 혹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는 얼굴. 강이준은 그 차이를 지금 판단할 수 없었다.
"아무것도요."
거짓말이 혀끝에서 매끄럽게 굴러나왔다. 강이준은 그 매끄러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발표 시각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강이준은 다시 태블릿을 열었다. 슬라이드가 아니라 이메일 함이었다. 어젯밤 첨부 파일을 다시 불러왔다. 저화질 이미지. 문서 오른쪽 하단의 서명란. 이름은 뭉개져 있었다. 그러나 직인 옆에 찍힌 작은 숫자—사내 직원 번호—는 읽혔다.
그 번호를 기억했다.
확인은 아직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17층에서 15층으로 내려가는 데 사십 초가 걸렸다.
강이준은 그 사십 초를 알고 있었다. 발표장인 15층 컨퍼런스 홀로 이동할 때마다 이 엘리베이터를 탔다. 항상 혼자였거나, 팀원들과 함께였거나. 오늘은 서도윤과 단둘이었다.
문이 닫혔다.
금속 벽면에 두 사람의 상이 흐릿하게 비쳤다. 강이준은 자신의 반사상이 서도윤의 반사상과 나란히 놓인 걸 보았다. 둘 다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구도가 이상하게 불편했다.
발표 자료 파일이 담긴 태블릿이 왼손에 들려 있었다. 강이준은 엄지손가락으로 태블릿 모서리를 무심코 문질렀다. 슬리브 안쪽으로 당겨지는 손등의 흉터가 피부에 닿았다. 의식한 건 아니었다.
서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강이준은 그것을 느꼈다. 시선은 감각이 있다. 특히 이 남자의 시선은 무게가 달랐다. 강이준은 엘리베이터 숫자 패널을 보았다. 16. 숫자가 바뀌지 않았다. 층간에서 잠깐 멈추는 특유의 진동이 발바닥으로 전해졌다.
강이준은 눈을 돌렸다.
서도윤과 눈이 마주쳤다.
1초. 서도윤의 눈은 읽히지 않았다. 강이준은 그 눈에서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어젯밤 메시지가 사실인지, 조작된 것인지, 이 남자가 처음부터 계획을 갖고 있었는지. 그 눈이 말해줄 것 같았다.
말해주지 않았다.
강이준은 고개를 돌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15층이었다. 컨퍼런스 홀 복도의 차가운 형광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발표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서도윤의 시장 분석 파트는 빈틈이 없었다. 숫자들이 정확히 맞물렸고, 그래프의 방향이 보드 멤버들의 표정을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강이준은 자신의 파트를 이어받아 크리에이티브 방향성을 설명했다.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슬라이드를 넘기는 손도 흔들리지 않았다.
로열 보드의 이사 셋은 자료를 들여다보며 간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좋았다.
그 좋음이 이상하게 속을 긁었다.
발표가 끝나고 보드 멤버들이 잠깐 의견을 나누는 동안, 강이준은 물 한 잔을 들고 창가로 이동했다. 유리창 너머로 도심이 내려다보였다. 지상 15층에서 보이는 테헤란로는 미니어처처럼 작았다. 사람들이 점처럼 움직였다. 저 아래에서는 이 회의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었다.
뒤에서 태블릿이 테이블 위를 미끄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도윤이 자료를 정리하는 소리였다.
강이준은 몸을 돌렸다. 보드 멤버들은 아직 대화 중이었다. 서도윤은 자신의 태블릿을 케이스에 넣으려다 잠깐 멈췄다. 이메일이 들어온 모양이었다. 화면을 한 번 보고, 빠르게 잠금 버튼을 눌렀다.
강이준의 시선이 그 화면에 닿았던 건 0.3초였다.
충분했다.
레터헤드. 오르트의 도장. 그리고 왼쪽 상단에 찍힌, 어젯밤 저화질 사진 속에서 읽었던 것과 동일한 숫자.
사내 직원 번호.
강이준의 손에서 물컵이 기울었다. 손목에 힘이 들어갔다. 물은 쏟아지지 않았다.
보드 멤버 중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습니다. 다음 주에 최종 보고 일정 잡겠습니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강이준은 움직이지 않았다.
서도윤이 태블릿 케이스를 들고 일어섰다. 강이준 쪽으로 지나쳐 가려던 발이 멈췄다.
"왜요."
물음표가 아니었다. 평서문처럼 끝났다. 서도윤은 강이준의 얼굴을 보았다. 강이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서 팀장, 당신 아버지가 오르트를 떠난 날을 기억합니까?"
서도윤의 눈이 좁아졌다.
아주 미세하게. 다른 사람이었다면 놓쳤을 변화였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어젯밤에 받은 게 없다고 했죠. 나도 없다고 했고."
강이준은 한 발 다가섰다. 서도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한 뼘도 되지 않았다. 회의실 형광등이 유난히 밝게 내리쬐었고, 공조 시스템이 돌아가는 낮은 소음이 그 침묵 사이로 스며들었다. 강이준의 손이 서도윤의 태블릿 케이스 위에 얹혔다.
"보여줘요."
"이준 씨."
"서 팀장."
서도윤의 손이 케이스를 더 쥐었다. 강이준은 케이스를 당겼다. 서도윤이 놓지 않았다. 잠깐의 힘겨루기 끝에 케이스가 강이준의 손으로 넘어왔다.
케이스를 열었다. 태블릿 화면을 켰다.
이메일 목록이 펼쳐졌다. 가장 위에 방금 열었던 메일. 강이준은 그것을 눌렀다. 첨부 파일을 열었다.
문서였다. 레터헤드. 직인. 날짜는 십사 년 전. 서명란의 이름은 뭉개져 있었지만, 어젯밤 파일에서는 읽히지 않았던 것이 이 파일에서는 달랐다.
해상도가 높았다.
서명란 아래에 또렷하게 찍힌 이름. 강이준의 손에서 태블릿이 멈췄다. 손바닥으로 차가운 유리 화면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 이름 석 자를 눈으로 두 번 훑었다. 세 번째에도 같은 글자였다.
서도윤이 손을 내밀었다.
강이준은 그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