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온 라운지의 공기는 커피 한 잔의 온기 같은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테헤란로의 오후가 납빛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공조 시스템은 어김없이 기획 1팀의 선호 온도에 맞춰진 채 돌아갔다. 18도. 서도윤의 손끝이 태블릿 모서리에서 서늘하게 식어갔다.
사일런트 브레인스토밍 시작 알림이 떨어진 지 삼 분이 지났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규칙이 그랬다. 말은 금지다. 오직 포스트잇과 태블릿만이 허용된 무기였다. 두 팀의 멤버들이 기다란 회의 테이블 양편에 갈라져 앉아 각자의 화면을 들여다보는 동안, 라운지는 손가락이 화면을 스치는 소리와 포스트잇이 유리 패널에 붙는 낮은 마찰음으로만 채워졌다.
강이준은 자신의 구역, 테이블 오른쪽 끝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천천히 써 내려갔다.
소비자 접점. 감성 트리거. 구매 전 심리 공백.
세 장을 나란히 유리 패널에 붙였다. 그가 자리를 잡는 방식은 언제나 그랬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부터. 포스트잇의 배열 자체가 논리의 뼈대였다.
서도윤은 테이블 반대편에서 그 모습을 눈 끝으로 포착했다.
태블릿 카메라 앱을 열었다. 정지 촬영이었다. 강이준의 시선이 자신의 구역을 벗어나지 않는 찰나를 골라, 서도윤은 손목을 자연스럽게 비틀었다. 각도를 잡는 동작은 느리고 조심스러웠다. 팔꿈치를 테이블 모서리에 고정한 채 렌즈가 강이준의 유리 패널 쪽을 향하도록 밀리미터 단위로 조정했다. 어깨 근육이 미세하게 당겼다. 너무 빠르게 움직이면 시야에 걸린다. 셔터음은 진동 모드로 꺼진 상태였다. 세 장의 포스트잇이 화면 안으로 들어왔다.
손가락이 화면을 확대했다.
글씨가 선명하게 잡혔다.
서도윤의 시선이 그 위에서 이 초, 삼 초 머물렀다. 인사이트 리딩이 작동하는 순간은 항상 이랬다. 타인의 논리 구조를 보는 것만으로 그 뒤에 오는 문장이 보였다. 강이준이 감성 트리거 다음에 무엇을 쓸지, 소비자 접점이 어떤 카피로 수렴될지, 그 경로가 마치 자기 것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이것은 능력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손쉽게 무기로 전환되었다.
사일런트 브레인스토밍이 종료 알림과 함께 끝났다. 삼십 분이 지나 있었다.
서도윤이 먼저 발표 패널 앞에 섰다.
"노바 일렉트로닉스의 이번 캠페인 핵심은 구매 전 심리 공백을 건드리는 겁니다."
강이준의 눈이 발표 패널로 향했다.
"소비자가 제품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구매 버튼을 누르기까지, 그 사이에 반드시 감성 트리거가 필요합니다. 데이터가 아니라 감각으로 먼저 쥐어야 한다는 거죠."
서도윤의 목소리는 낮고 고른 속도를 유지했다. 청중을 재우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확히 반박의 여지를 좁혀가는 리듬이었다.
강이준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던 자신의 포스트잇 뭉치를 천천히 바라봤다.
소비자 접점. 감성 트리거. 구매 전 심리 공백.
세 단어가 서도윤의 입에서 순서대로 흘러나왔다.
위장은 정교했다. 문장을 그대로 옮기지 않았다. 논리의 뼈대를 가져가 살을 다르게 발랐다. 서도윤의 언어로 재포장된 채 완전히 다른 기획처럼 들렸다. 누군가 나란히 비교하지 않는 한, 그것이 강이준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는 불가능했다.
손가락이 포스트잇 끝을 짚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끝 아래서 작게 접혔다.
강이준은 그대로 있었다. 표정도, 자세도. 시선만이 서도윤의 발표 패널 위에서 한 점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 눈동자 안쪽 어딘가가 아주 천천히, 조용하게 흔들렸다.
서도윤이 발표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올 때 강이준과 시선이 스쳤다.
0.5초도 되지 않았다.
강이준이 먼저 눈을 돌렸다.
그가 발표 패널 앞에 선 것은 서도윤이 자리에 앉고 정확히 이 초 후였다.
"한 가지 정정하겠습니다."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이 낮았다. 라운지의 온도가 반 도쯤 더 내려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강이준이 자신의 포스트잇 세 장을 발표 패널에 나란히 붙였다.
"서 팀장님이 발표하신 프레임의 출처가 여기 있습니다. 사일런트 브레인스토밍 종료 직전, 제 구역의 유리 패널에 부착된 내용입니다."
라운지가 완전히 굳었다.
서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 표정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른손만이 태블릿 위에서 한 번 멈췄다가 다시 내려놓아졌다.
"서 팀장님."
강이준이 돌아봤다. 발표 패널을 등진 채 서도윤을 정면으로 향했다.
"남의 것을 훔치는 게 서 팀장님이 말하던 효율입니까?"
그 문장은 질문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라운지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을 알았다. 서도윤의 팀원들도, 강이준의 팀원들도, 벽 쪽에 세워진 모니터의 빈 화면도.
서도윤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출처를 주장하시려면 타임스탬프가 있어야 합니다." 목소리에 물결 하나 없었다. "포스트잇에는 작성 시각이 없죠."
"태블릿 촬영 로그에는 있습니다."
서도윤의 턱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그 로그가 저를 가리킨다는 근거가 있습니까?"
강이준은 대답 대신 시선을 테이블 끝으로 옮겼다. 서도윤의 태블릿이 화면을 위로 한 채 놓여 있었다. 카메라 앱의 마지막 실행 흔적이 상태바 한쪽 구석에 작은 아이콘으로 남아 있었다.
서도윤의 시선이 그것을 따라갔다.
이 초.
아이콘을 지우기에는 늦었다.
로열 보드 대표인 권 부사장이 유니온 라운지로 들어온 것은 그 침묵이 아직 식기 전이었다.
수행 비서 한 명이 문 옆에 섰다. 권 부사장은 자리에 앉지 않았다. 라운지 전체를 한 번 훑어본 뒤 테이블 위의 포스트잇 세 장과 서도윤의 태블릿을 차례로 내려다봤다.
"두 분 기획안 검토했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감정이 없는 게 아니라 감정을 이미 처리하고 남은 문장처럼 들렸다.
"상충합니다."
강이준이 눈을 들었다.
"감성 트리거 방향이 두 개입니다. 하나의 캠페인에 두 개의 방향이 공존할 수는 없어요."
서도윤이 말을 열려다 닫았다.
"전면 수정 들어가십시오. 일주일."
권 부사장이 수행 비서 쪽으로 몸을 돌렸다. 회의 종료의 신호였다.
"출처 분쟁은 이 자리에서 없었던 걸로 합니다. 결과물로 증명하세요. 두 분 다."
문이 닫혔다.
라운지에 두 팀의 침묵이 남았다.
서도윤의 팀원 한 명이 태블릿을 집어 들어 자료를 저장하기 시작했다. 강이준 팀의 막내가 포스트잇을 조심스럽게 수거했다. 의자 끄는 소리가 네다섯 개 겹쳐 났다.
사람들이 빠져나갔다.
서도윤은 마지막으로 자리를 떴다. 복도로 나왔을 때 강이준의 뒷모습이 저 끝에 있었다. 엘리베이터 방향이 아니었다. 비상계단 쪽이었다.
발걸음이 느렸다. 강이준의 걸음이 그랬다. 복도 조명 아래서 어깨선이 수평을 유지한 채 멀어졌다. 허리가 곧았다. 흔들림이 없었다.
서도윤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이겼다, 고 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권 부사장이 출처 분쟁을 묻어버렸으니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것뿐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서도윤에게 아무런 무게를 얹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복도 끝에서 비상계단 문이 열렸다가 닫혔다.
강이준이 사라졌다.
서도윤은 그 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도 몇 초간 그 자리를 봤다. 입술 안쪽을 어금니로 천천히 눌렀다. 얇은 살이 씹혔다. 통증은 없었다. 대신 어금니가 닿는 감각이 또렷했다.
인사이트 리딩은 타인의 감정을 데이터로 처리하는 능력이었다. 서도윤은 그것을 늘 그렇게 사용해왔다. 강이준의 논리를 읽는 것도, 그의 기획의 다음 수순을 예측하는 것도 그 능력의 범주 안에 있었다.
조금 전, 강이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봤을 때.
그것을 전략적 데이터로 처리하는 데 평소보다 시간이 더 걸렸다.
복도의 형광등이 미세하게 깜빡였다. 공조 소리가 낮게 깔렸다. 서도윤은 결국 시선을 거뒀다. 비상계단 문 쪽이 아니라 자기 발끝 쪽으로.
입술 안쪽의 감각이 서서히 사라졌다.
비상계단은 어두웠다.
유리창 없는 콘크리트 벽이 소리를 가뒀다. 강이준이 계단 난간을 등지고 벽 쪽으로 기댔다. 발소리가 뒤따라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다음 오른손을 들었다.
손등 위, 엄지 아래 관절 사이로 오래된 흉터가 희미하게 도드라졌다.
왼손 엄지로 그 위를 눌렀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더.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흉터 주변 피부가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발표 패널에 붙어 있던 포스트잇 세 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소비자 접점. 감성 트리거. 구매 전 심리 공백.
서도윤의 입에서 흘러나온 자신의 언어들.
강이준은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계단 냄새가 났다. 콘크리트와 먼지와, 오래된 페인트. 창문 없는 공간 특유의 정체된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다.
엄지에 힘이 더 들어갔다.
흉터 위 피부가 완전히 하얘졌다.
그때 계단 아래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 사람.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