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이 새벽 공기에 녹았다.
테헤란로의 가로등이 하나둘 꺼지고, 아르케 타워의 유리 외벽에 연한 보랏빛이 번지기 시작하는 시각. 강이준은 타워 맞은편 골목 안쪽, 간판도 제대로 달지 않은 작은 카페의 테라스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서도윤이 종이컵을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블랙 잭 커피 특유의 탄 듯한 향이 바람을 따라 흘렀다. 두 사람 사이에는 팔꿈치 하나 정도의 간격만 남아 있었고, 그 좁은 거리가 어색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낯설었다.
"쓰다."
서도윤이 한 모금 머금고 미간을 구겼다. 강이준은 대답 대신 자기 컵을 들어 입술에 댔다. 쓴맛이 혀끝을 지나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탄 듯한 뒷맛이 식도를 훑으며, 오래전 회의실 유리가 깨지던 날의 비릿한 냄새를 어딘가에서 끌어올렸다가 천천히 씻어 내렸다. 예전에는 이 맛으로 감각을 깎아 세웠는데. 지금은 그냥, 커피였다.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손등의 흉터 위로 새벽바람이 스쳤다. 예전 같으면 엄지로 눌러 감각을 지웠을 그 자리를, 강이준은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피의 월요일이 남긴 자국. 아버지의 결정이 새긴 흔적. 서도윤의 아버지를 해고하던 그날, 회의실 유리가 깨지며 손등을 할퀴고 지나간 파편의 기억.
지금 그 흉터는 그저 오래된 상처였다. 더 이상 숨기고 싶지 않았다.
"이준 씨."
서도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새벽 공기를 머금어 평소보다 조금 더 거친 질감이 섞여 있었다.
"권 회장이 제안한 거, 진짜로 거절한 거야?"
강이준이 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종이컵 바닥이 철제 탁자에 닿으며 작은 소리를 냈다.
"로열 보드 복귀 조건. 이사회 조사 무마 대신 내 라인을 전부 넘기라는 거였어."
"알아. 내가 묻는 건 그게 아니야."
서도윤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강이준의 옆얼굴에 닿았다. 왼쪽 귀 아래로 내려오는 가느다란 흉터 선까지, 서도윤의 눈동자가 천천히 따라갔다.
"왜 거절했냐고."
강이준은 정면을 바라본 채 입을 열지 않았다. 테헤란로 너머로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고 있었다. 아르케 타워의 15층부터 20층까지, 오르트 광고 기획이 차지하고 있던 층들의 창문에 여명이 반사되어 금빛으로 번졌다.
프라임 존의 전면 통유리. 서브 존의 북향 채광. 가변형 벽체가 실적에 따라 밀고 당기던 그 공간들.
전부 지나간 것이었다.
"있잖아."
강이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커피잔을 감싸고 있던 손가락이 천천히 풀어졌다.
"3화 때, 로열 보드가 우리 기획안이 상충한다며 전면 수정을 지시했을 때. 나는 그날 밤 혼자 사무실에 남아서 네 기획안을 전부 다시 읽었어."
서도윤의 손가락이 종이컵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서브 존 서버에 접속해서. 네가 몰래 남겨둔 피드백까지 전부."
서도윤이 시선을 내렸다. 종이컵 안의 검은 액체가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이 매번 기획안 수정본에 슬쩍 끼워 넣던 포스트잇 형식의 디지털 메모들. 강이준이 그걸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그때 알았어. 네 인사이트 리딩이 양날의 검이라는 것도. 상대를 꿰뚫는 능력이 결국 너 자신을 가장 많이 베고 있다는 것도."
강이준이 고개를 돌려 서도윤을 바라봤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랐다. 적정 거리를 자로 잰 듯 유지하던 그 시선이, 지금은 서도윤의 눈동자 안에 고요히 머물고 있었다.
서도윤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커피잔을 내려놓고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주먹을 쥐지는 않았다.
새벽의 테라스 위로 참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난간에 앉았다. 깃털을 부풀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가볍게 긁었다.
강이준이 손등을 펼쳐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흉터가 드러났다. 새벽빛 아래서 그 자국은 희미한 은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예전처럼 숨기려 소매를 끌어내리지 않았다.
"이제 내 손등에 밴드는 필요 없어."
서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네가 옆에 있으니까."
바람이 멈췄다. 참새가 날개를 접고 난간 위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테헤란로의 신호등이 초록에서 빨강으로 바뀌었고, 멀리서 첫 버스의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울려왔다.
서도윤의 입술이 움직이려다 닫혔다. 다시 열렸다. 비꼬는 말투를 준비하는 듯한 혀끝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끝내 나온 것은 전혀 다른 소리였다.
"…멍청하게."
그 두 글자가 떨리고 있었다. 서도윤이 고개를 숙이며 자기 무릎을 응시했다. 손톱이 바지 원단을 긁는 소리가 났다. 결벽증에 가까울 만큼 정돈된 그의 손가락이 아무렇게나 직물 위를 긁고 있었다.
강이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손등을 테이블 위에 올려둔 채 기다렸다.
테헤란로에 아침이 왔다.
카페 주인이 안쪽에서 블라인드를 올리는 소리가 들렸고, 도로 위로 출근길 택시들이 하나둘 지나기 시작했다. 아르케 타워의 로비에 불이 켜졌다. 경비원이 유리문을 열고 바닥을 닦기 시작하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다.
"각자의 길을 갈 수도 있어."
강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컵 안의 커피는 이미 식어 있었다.
"나는 PT 서열제에서 밀려났고, 너도 프리 패스 조건을 잃었어. 레거시 베네핏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시작하려면—"
"혼자가 더 효율적이라는 말?"
서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눈가에 남아 있던 열기가 식어 있었고, 대신 익숙한 계산적 냉정함이 돌아와 있었다.
"데이터로 따지면 그래. 둘이 묶여 있으면 리스크가 분산되는 게 아니라 증폭돼. 공동 책임 연대제가 그걸 증명했잖아."
강이준의 엄지가 무의식적으로 손등을 향했다. 흉터를 누르려는 습관. 손가락은 흉터 바로 옆에서 멈췄고, 그대로 주먹을 풀어 손바닥을 위로 뒤집었다.
"효율이 아니라 물어보는 거야."
"뭘."
"같이 하고 싶은지."
서도윤의 손가락이 종이컵을 집어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컵이 테이블 위에서 미끄러져 강이준의 컵에 부딪혔다. 종이끼리 닿는 둔탁한 소리.
"노바 일렉트로닉스와 로열 보드 사이의 밀약 건, 아직 정리 안 됐어."
서도윤이 화제를 돌렸다. 목소리가 단단해졌다.
"차성민 이사가 골든 티켓 경위 조사를 빌미로 너를 물고 늘어질 거야. 이사회에서 완전히 손을 떼지 않는 이상, 우리 둘 다 블랙리스트에 올라갈 수 있어."
강이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10년간 간직했던 골든 티켓을 사용한 대가. 전설적인 권한이었지만, 그 전설에는 언제나 대가가 따랐다.
"그래서 혼자 가겠다는 거야?"
"아니."
서도윤이 의자에서 등을 떼고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강이준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흉터가 새벽빛에 드러나 있었다.
서도윤의 손이 움직였다.
흉터가 있는 쪽이 아니었다. 오른손. 깨끗한 쪽. 서도윤의 손가락이 강이준의 손등 위에 내려앉았다. 차가웠다. 새벽 공기를 오래 머금은 손끝의 온도가 강이준의 피부 위에 또렷하게 찍혔다. 지문이 맞닿는 부분에서 열기가 천천히 번졌다. 서도윤의 맥박이 손가락 끝을 통해 강이준의 손등으로 전이되었다. 규칙적이고 낮은 박동. 강이준은 손을 빼지 않았다.
"같이 하자는 거야."
서도윤의 목소리에 비꼼이 없었다. 계산도 없었다. 낮고 건조한, 사실을 진술하는 어조.
"대신 조건이 있어."
"말해."
"다음에 네가 내 기획안을 바닥에 밀쳐버리면, 나도 똑같이 해줄 거야."
강이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웃음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았지만, 서도윤은 그 떨림을 놓치지 않았다.
두 사람이 의자에서 일어선 건 하늘이 완전히 밝아진 뒤였다.
테라스 난간에 나란히 서자 테헤란로의 전경이 펼쳐졌다. 아르케 타워가 아침 해를 받아 금빛으로 물들고 있었다. 15층 프라임 존의 통유리에 햇살이 부딪혀 눈이 부셨다. 그 빛이 두 사람의 얼굴 위로 쏟아졌다.
서도윤이 주머니에서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사업자 등록을 위한 양식이었다. 법인명 란은 비어 있었고, 대표자 란에는 두 줄이 그어져 있었다. 공동 대표.
"언제 준비한 거야."
"어젯밤. 이사회장에서 나온 직후."
서도윤이 종이를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으려다 멈췄다. 대신 강이준의 손에 쥐여주었다. 종이의 모서리가 강이준의 손바닥을 가볍게 긁었다.
강이준은 그 종이를 펼쳐 보았다. 양식 아래쪽, 서도윤의 필체로 작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애드 크레딧 따위 없는 회사를 만들자.'
거칠고, 얇고, 그래서 쉽게 찢어질 수도 있는 한 장. 손가락 끝에 종이의 질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강이준이 종이를 접어 가슴 안주머니에 넣었다.
태양이 완전히 떠올랐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테라스 바닥 위로 길게 늘어졌다. 나란히 선 그림자의 끝이 겹쳐지는 지점에서 참새가 날아올랐다.
서도윤이 강이준의 오른손을 잡았다. 흉터가 없는 쪽. 손가락이 맞물렸다. 이번에는 차갑지 않았다. 커피의 온기가 아직 손바닥에 남아 있었고, 지문이 포개지는 자리에서 두 사람의 체온이 경계 없이 섞였다.
두 사람이 테헤란로를 바라보고 있을 때, 강이준의 주머니에서 휴대전화가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자 이름.
최영석.
강이준이 전화를 받자, 최영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평소와 달리 안경을 닦으며 시간을 벌 여유가 없다는 듯 빠르고 건조했다.
"둘 다 듣고 있나. 차성민이 오늘 아침 로열 보드 긴급 소집을 걸었어. 안건이 골든 티켓이 아니야."
강이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서도윤의 손가락이 그 압력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피의 월요일 재조사 건이야. 서도윤 부친의 해고 경위에 대해 새로운 증거가 제출됐다고 해. 제출자 이름이—"
최영석의 숨이 한 번 끊겼다.
"강민혁. 이준 씨, 당신 아버지야."
서도윤의 손이 강이준의 손 안에서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