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가 날카롭게 찢어졌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진 한시우의 시야에 수천 개의 횃불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추락하는 감각은 오히려 차분했다. 등 뒤에서 들려오던 바람 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굉음으로 변했다. 손등의 문양이 맥동하며 검은 연기를 토해냈다. 단검 끝에 응집된 공허가 허공에 궤적을 그렸다. 한시우는 검지 손톱으로 손등을 파고들었다. 아릿한 통증이 번지며 흐릿하던 의식을 붙잡았다.
지면이 코앞까지 닥쳐왔다. 한시우는 허공을 걷어차듯 몸을 틀었다. 발바닥이 땅에 닿기 직전 공허의 파동이 완충 작용을 했다. 파열음과 함께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었다. 성소 입구를 지키던 기사들이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먼지 구름 속에서 한시우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타인의 호의를 받으면 시선을 피하던 버릇이 이곳에서도 불쑥 튀어나왔다.
"이방인이 나타났다."
누군가의 외침이 들렸다.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었다. 한시우는 대답 대신 단검을 휘둘렀다. 날붙이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검은 잔상이 적들의 목덜미를 훑었다. 비명조차 터져 나오지 못하는 정적이 전장을 잠식했다.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으나 한시우의 눈은 오직 정면만을 향했다. 폐부 깊숙이 스미는 공기는 비릿하고 차가웠다. 고지대의 마력 밀도가 피부를 찌릿하게 압박했다.
평의회 의장이 레나의 목에 칼날을 바짝 붙였다. 늙은 남자의 얼굴에 옅은 경련이 일었다. 그의 뒤로 거대한 성소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성소 내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의 압력이 대기를 짓눌렀다. 고지대의 풍요로운 마력이 저지대의 습한 공기와 부딪히며 스파크를 일으켰다. 레나는 겁에 질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그녀의 주머니에서 작은 마력석 조각이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기다리고 있었다, 제물아."
의장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는 레나를 거칠게 밀치며 성소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쓰러진 레나의 팔에 새겨진 검은 혈관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눈동자는 이미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한시우는 이를 악물며 그녀에게 다가가려 했다. 발바닥에 닿는 대리석의 감촉이 소름 끼치도록 매끄러웠다. 이곳은 수많은 이방인의 피로 닦인 제단이었다.
성소 천장이 거대한 비명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육중한 석재들이 바닥을 강타하며 먼지를 일으켰다. 무너진 틈 사이로 세계수 에르드의 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황금빛으로 빛나야 할 뿌리는 검붉은 핏줄처럼 번들거렸다. 뿌리들은 뱀처럼 살아서 성소 전체를 휘감기 시작했다. 공허의 박동이 세계수의 파장과 공명하며 한시우의 심장을 쥐어짜듯 압박했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며 비릿한 액체가 넘어왔다.
"나와라, 수호자여."
의장의 주문과 함께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카시안이었다. 그의 눈동자는 심연보다 깊은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예속의 굴레가 그의 목덜미를 시커멓게 뒤덮고 있었다. 카시안은 기계적인 동작으로 검을 뽑아 한시우를 겨눴다. 그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바닥이 얼어붙었다. 7인 평의회가 자랑하던 찬란한 기사의 자부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직 시스템을 수호하려는 살의만이 그의 검 끝에 머물렀다.
한시우는 맥박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으나 시선은 고정했다. 카시안의 검이 허공을 갈랐다. 날카로운 마찰음이 성소 내부에 울려 퍼졌다. 한시우는 공허의 손으로 카시안의 검날을 직접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 치직거리는 연기가 피어올랐으나 놓지 않았다. 검은 연기가 카시안의 갑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카시안, 정신 차려."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은 서늘한 검기였다. 카시안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예속된 의지와 본래의 영혼이 충돌하는 흔적이었다. 그의 입술이 달싹였으나 들리는 것은 기괴한 마찰음뿐이었다. 한시우는 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불규칙한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때렸다. 죽음보다 깊은 절망이 그 손길을 타고 전해졌다. 카시안의 눈에서 검은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평의회 의원들이 성소 중앙의 제단 주위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일제히 지팡이를 치켜들며 고대 금술을 읊조렸다. 성소 바닥에 새겨진 마법진이 붉게 달아올랐다. 한시우의 몸 안에서 마나 회로가 타 들어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의원들은 그의 공허 마력을 세계수의 자양분으로 삼으려 했다.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에는 탐욕이 가득했다. 마력석의 가치가 수직 상승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왔다.
"이방인의 영혼을 바쳐라. 아르카디아의 영광을 위해."
의장의 외침에 세계수의 뿌리가 한시우의 사지를 옥죄었다.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가시들이 마력을 빨아들였다. 한시우는 비명을 삼키며 눈을 부릅떴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는 저항하는 대신 자신의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공허의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신체가 바스라지는 감각 속에서 이질적인 힘이 솟구쳤다. 아르카디아가 거부해온 부정한 힘이 성소의 기초를 잠식했다.
검은 폭풍이 성소 내부를 휩쓸었다. 세계수의 뿌리를 타고 한시우의 공허 마력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정화되지 않은 순수한 파괴의 힘이 에르드의 심장으로 흘러 들어갔다. 황금빛 마나로 가득 차 있던 성소의 공기가 순식간에 탁하게 오염되었다. 의원들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들이 믿어 의심치 않던 신성한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대기는 썩은 유황 냄새로 가득 찼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중단해라."
의장이 소리쳤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한시우는 평의회 의원들의 마나 회로를 역으로 흡수했다. 그들이 평생을 걸쳐 갈취해온 마력이 공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성소 내부의 마력 밀도가 급격히 떨어졌다. 고지대의 권위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귀족들의 생명을 연장하던 마력 증폭기들이 차례로 과부하를 일으키며 폭발했다.
카시안이 무릎을 꿇었다. 예속의 문양이 흐릿해지며 그의 눈에 잠시 생기가 돌았다. 그는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한시우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손이 떨리며 한시우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차가운 금속 갑옷 사이로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가리켰다. 예속의 핵이 박혀 있는 자리였다. 그곳을 파괴하지 않으면 영원히 인형으로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시우야, 제발."
카시안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한시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카시안의 가슴에 공허의 칼날을 밀어 넣었다. 살점이 찢기는 감각이 손목을 타고 전달되었다. 카시안의 상체가 뒤로 젖혀지며 짧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얼굴에서 고통이 사라지고 묘한 평온함이 찾아왔다. 검은 예속의 문양이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는 더 이상 시스템의 노예가 아니었다.
"이게 너희가 원하던 구원이다. 모두 함께 밑바닥으로 떨어져라."
한시우의 일갈이 무너지는 성소에 울려 퍼졌다. 제단 위에 서 있던 의원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의 팽팽했던 피부가 순식간에 쪼글쪼글하게 변했다. 마력을 잃은 육체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했다. 수백 년을 강제로 이어온 생명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잔혹했다. 그들은 자신의 앙상한 손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울부짖었다.
의장은 자신의 손을 보며 경악했다. 검버섯이 피어오르고 손가락이 앙상하게 말라붙었다. 그는 세계수의 뿌리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지만, 이미 검게 변해버린 뿌리는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성소의 중심축이 무너지며 거대한 진동이 일어났다. 지리적 불공정함을 유지하던 고지대의 마력 평형이 완전히 깨졌다. 바닥이 기울며 호화로운 장식물들이 미끄러져 내렸다.
천장이 완전히 붕괴하며 하늘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 하늘은 더 이상 푸르지 않았다. 세계수의 오염으로 인해 보랏빛 번개가 대지를 내리치고 있었다. 성소의 기초가 되는 고지대의 암반이 갈라졌다. 거대한 건축물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침식의 늪이 있는 저지대를 향한 추락이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거대한 붕괴였다.
한시우는 쓰러져 있는 레나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호흡은 미약했지만 끊어지지는 않았다. 카시안은 폐허 속에서 마지막 힘을 다해 한시우의 앞길을 막아선 잔해들을 치워냈다. 그는 피를 토하면서도 한시우가 나갈 길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의 등 뒤로 무너지는 잔해들이 쌓였다. 카시안은 한시우를 향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가라, 이방인."
카시안의 배웅을 뒤로한 채 한시우는 성소를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는 육중한 건물이 진흙 속으로 처박히는 굉음이 들려왔다. 찬란했던 엘리시온의 영광이 늪의 어둠 속으로 잠겼다. 사방은 온통 무너진 돌무더기와 타버린 뿌리들뿐이었다. 한시우는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 깊은 곳이 아릿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시우는 폐허의 끝자락에서 걸음을 멈췄다. 레나의 차가운 손을 꼭 쥐었다. 안개 너머로 수많은 그림자가 보였다. 마력 결핍으로 고통받던 저지대의 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무너진 성소를 보며 소리 없이 오열하거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갈라진 피부 위로 검은 재가 눈처럼 내리고 있었다. 아르카디아를 지탱하던 위선적인 질서는 파괴되었다.
한시우는 자신의 손바닥에 남은 흉터를 내려다보았다. 복수는 끝났으나 주변에 남은 것은 황량한 풍경뿐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지평선 너머에서 다가오는 거대한 폭풍을 응시했다. 보랏빛 번개가 대륙을 가로지르며 대지를 뒤흔들었다. 레나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며 한시우를 바라보았다.
"이제 끝났어."
한시우가 낮게 속삭였다. 레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낡은 마력석 조각이 바닥에서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이전의 황금빛이 아닌, 한시우의 공허와 닮은 서늘한 보랏빛이었다. 한시우는 고개를 돌려 성소가 가라앉은 자리를 보았다. 그곳에서 죽은 줄 알았던 의장의 노구와 카시안의 검이 뒤섞여 늪 위로 떠올랐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익숙한 목소리가 한시우의 귓가를 스쳤다. 카시안의 목소리도, 의장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그것은 성소 지하 깊은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아르카디아의 거대한 신음이었다. 한시우는 본능적으로 단검을 고쳐 쥐었다. 늪의 진흙이 꿈틀거리며 거대한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한시우는 레나를 등 뒤로 숨기며 검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늪에서 솟아오른 것은 수천 개의 영혼이 뒤엉킨 거대한 구체였다. 그것이 한시우를 향해 느리게 다가왔다.
"네가 연 것은 구원이 아니라, 우리가 잠재웠던 재앙이다."
구체 속에서 수많은 얼굴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한시우는 대답 대신 단검을 수평으로 긋고는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