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부 깊숙한 곳에서 비릿한 쇠 맛이 올라왔다. 한시우는 고개를 비틀어 바닥에 고인 잿빛 물 위로 검붉은 덩어리를 뱉어냈다. 무너진 성소의 잔해 사이로 스며든 늪물은 차가웠다. 손가락 끝을 까닥이자 진흙이 손톱 밑을 파고드는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졌다. 어깨 위로 쏟아지는 공기는 무겁고 습했다. 그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대리석 기둥들이 이빨 빠진 짐승의 주둥이처럼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머리 위로는 찢어진 구름 사이로 핏빛 노을이 스며들었다. 등 뒤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전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세계수 에르드의 거대한 뿌리가 보였다. 본래 찬란한 금색이어야 할 뿌리는 반쯤 검게 변해 있었다. 비틀린 나무껍질 사이로 보라색 연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공허에 잠식된 나무는 죽어가는 짐승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리는 비명인지 바람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하늘을 가로지르는 마력의 흐름이 불규칙하게 요동쳤다. 평의회가 관리하던 마력 공급망이 끊어진 탓이었다. 지평선 너머 엘리시온의 도심 쪽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폭동이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한시우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성소 조각 위에 누운 레나에게 다가갔다.
레나의 숨소리는 거칠었다. 하얗게 질린 이마 위로 식은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그녀의 목줄기를 따라 검은 혈관이 툭툭 불거져 있었다. 마력 결핍으로 말라가던 육체가 역류하는 에테르 파장을 견디지 못하고 있었다. 한시우가 그녀의 어깨를 살며시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바닥에서 검은 기운이 울컥 솟아났다. 레나의 몸이 활처럼 휘어지며 짧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검은 혈관이 더욱 짙어지며 그녀의 피부를 뚫고 나올 듯 요동쳤다. 한시우는 황급히 손을 뗐다. 손등을 타고 흐르는 공허의 마력이 레나의 남은 생명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심장 부근에서 느껴지는 공명 현상이 통증으로 변해 가슴을 찔렀다.
입술이 바짝 말라붙었다. 타인의 호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늘 시선을 피하던 그였다. 하지만 지금은 눈앞의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보는 것조차 버거웠다. 그는 검지 손톱으로 자신의 손등을 강하게 파고들었다. 살점이 짓눌리는 통증만이 요동치는 맥박을 겨우 진정시켰다.
"이봐, 거기서 그러고 있으면 죽은 사람만 늘어날 뿐이야."
탁한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무너진 석벽 너머에서 바르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옷은 흙먼지로 엉망이었고 한쪽 팔은 대충 천으로 감싸여 있었다. 바르가스는 낡은 마력 증폭기를 만지작거리며 늪지대를 가로질러 왔다. 그의 눈에는 이익을 따지는 냉정함보다 당혹감이 더 짙게 서려 있었다.
바르가스는 한시우와 거리를 둔 채 멈춰 섰다. 그는 늪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들을 무심하게 훑어보았다. 평의회의 의원들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늙어버린 채 진흙 속에 처박혀 있었다. 한때 대륙의 정점에서 군림하던 자들의 비참한 최후였다. 바르가스가 짐가방을 고쳐 메며 침을 뱉었다.
"세상이 뒤집혔어. 마력석 시세는 이미 천정부지로 솟았고, 광산 연합 놈들은 문을 걸어 잠갔지."
한시우는 대답 대신 레나의 곁을 지켰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감기기를 반복했다. 공허의 마력이 그녀의 체내에 잔류한 희박한 마나와 충돌하며 불꽃을 튀겼다. 구원이 곧 파괴라면, 나는 이 세계를 가장 아름답게 부수어주지. 그는 낮게 읊조리며 주먹을 쥐었다.
바르가스가 늪지대 깊숙한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허리를 숙여 뻘 속에 반쯤 잠긴 무언가를 집어 올렸다. 진흙을 털어내자 금속 특유의 둔탁한 광택이 드러났다. 그것은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 쓰고 있던 투구였다. 깃털 장식은 타버렸고 이마 부분에는 커다란 균열이 가 있었다.
바르가스는 투구를 한시우의 발치로 툭 던졌다. 쇳덩어리가 돌바닥에 부딪히며 신경질적인 소리를 냈다. 한시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투구를 내려다보았다. 투구의 안쪽 면에 붉은 액체로 적힌 글귀들이 보였다. 그것은 단순한 혈흔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배열된 숫자와 기호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다.
"그 고결하신 왕자님께서 마지막까지 쥐고 있던 거야. 제국의 비밀 좌표더군."
바르가스가 낡은 증폭기를 거칠게 두드렸다. 기계에서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한시우는 투구를 집어 들어 안쪽의 좌표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손가락 끝에 묻어났다. 투구 너머로 보이는 잿빛 늪지대 위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한시우는 좌표의 마지막 자리를 확인하고 투구를 고쳐 잡았다. 그의 등 뒤에서 세계수의 뿌리가 다시 한번 크게 꿈틀거렸다. 공허의 박동이 대지를 타고 발바닥까지 전해졌다. 그는 레나를 가볍게 안아 들고 바르가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길 안내는 네가 맡아."
바르가스는 투덜거리며 앞장섰다. 늪의 안개가 더욱 짙어지며 성소의 잔해를 삼키기 시작했다. 한시우는 멀어져 가는 무너진 기둥들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진흙 바닥을 검게 물들였다.
늪지대의 끝자락에서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력의 균형이 무너진 세상은 이제껏 본 적 없는 기괴한 생태계로 변모하고 있었다. 한시우는 품 안의 레나가 내뱉는 밭은 숨소리에 집중하며 힘을 주어 걸었다.
바르가스가 멈춰 서서 품 안에서 낡은 지도를 꺼냈다. 그는 좌표와 지도를 번갈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제국의 비밀 구역은 일반적인 통로로는 닿을 수 없는 금지된 협곡 너머에 있었다. 그곳에는 평의회가 숨겨둔 마지막 생체 실험실이 존재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거기로 가면 진짜 괴물을 보게 될지도 몰라."
바르가스의 경고에도 한시우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는 투구 안쪽의 피 냄새를 맡으며 좌표가 가리키는 북쪽을 응시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심장까지 전달되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한 늪을 지나 숲으로 향했다. 나무들은 마력을 잃어 잎이 마르고 줄기가 뒤틀려 있었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른 나뭇가지가 비명을 지르듯 뚝 부러졌다. 한시우는 자신의 맥박이 세계수의 진동과 일치해가는 것을 느꼈다.
숲의 입구에서 바르가스가 손을 들어 신호를 보냈다. 저 멀리서 수십 명의 기사가 횃불을 들고 숲을 수색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갑옷에는 엘리시온 왕국의 문장이 아닌, 철혈 제국의 붉은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추적자들이 생각보다 빠르군."
한시우는 투구를 바닥에 내려놓고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눈동자에 깃든 보랏빛 광채가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레나를 안전한 바위 뒤에 눕힌 그는 천천히 숲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좌표는 이제 단순한 정보가 아니었다. 그것은 카시안이 남긴 마지막 저항이자, 이 세계의 추악한 진실로 향하는 유일한 열쇠였다. 한시우는 숨을 죽이고 다가오는 기사들의 발소리를 세었다.
첫 번째 기사가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순간, 한시우의 신형이 허공을 갈랐다. 공허의 마력이 칼날을 따라 길게 뻗어 나가며 기사의 목을 단숨에 벴다. 비명조차 터져 나오지 못한 채 갑옷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바르가스는 그 광경을 보며 몸을 떨었다. 한시우의 공격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그것은 오로지 효율만을 따지는 기계적인 움직임에 가까웠다. 남은 기사들이 당황하며 검을 뽑아 들었지만, 한시우는 이미 그들의 사각지대로 파고든 뒤였다.
전투는 순식간에 끝났다. 숲바닥은 제국 기사들의 피로 검게 젖어 들었다. 한시우는 피 묻은 검을 바닥에 내리치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의 가슴 위에 새겨진 공허의 문양이 붉게 달아오르며 주변의 마력을 빨아들였다.
바르가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시신들을 살폈다. 그는 기사들의 품속에서 작은 마력석 주머니들을 챙기며 혀를 찼다. 탐욕스러운 손길은 여전했지만, 그의 눈은 자꾸만 한시우의 등을 향했다.
"이 좌표, 제국의 실험실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곳이야."
바르가스가 손가락으로 지도의 한 점을 강하게 눌렀다. 그곳은 아르카디아의 역사에서 삭제된, 빙의자들이 처음으로 소환되었던 제단이 있는 장소였다. 한시우는 투구를 다시 집어 들고 바르가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평의회의 의장이 있나?"
바르가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제국의 황제와 평의회 의장이 결탁해 만든 그곳은, 이 세계를 유지하기 위한 거대한 제물 저장소였다. 한시우는 투구를 가방에 넣고 레나를 다시 업었다.
밤공기는 더욱 차가워졌고 숲 저편에서 또 다른 횃불 무리가 나타났다. 한시우는 좌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뗐다. 이제 돌아갈 길은 없었다. 오로지 파괴를 통해서만 증명할 수 있는 구원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바르가스는 투덜대면서도 그의 뒤를 바짝 쫓았다. 숲을 벗어나자 거대한 협곡의 실루엣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그곳은 금지된 협곡, 차원의 균열이 상시 발생하는 재앙의 땅이었다. 한시우는 협곡 입구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협곡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푸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수 에르드의 마력이 아닌, 이질적이고 불길한 차원의 힘이었다. 한시우는 가슴의 통증을 억누르며 협곡 아래로 이어지는 좁은 길을 찾아냈다.
그때, 협곡 너머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르카디아의 멸망을 알리는 것인지, 새로운 제물의 강림을 축하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기괴한 소리였다. 한시우는 걸음을 멈추고 종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노려보았다.
바르가스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는 피 묻은 손으로 협곡 아래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거대한 철문이 암벽 속에 박혀 있었다. 문 표면에는 한시우를 포함한 수많은 이방인의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한시우는 자신의 이름 위로 손을 올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소름 끼치도록 선명했다. 그는 주먹을 쥐어 철문을 강하게 두드렸다.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