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수도 에테르노 지하에는 빛조차 침식당한 감옥이 있었다. 차가운 습기가 벽면을 타고 흘러내려 바닥에 고였다. 쇠사슬이 부딪히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정적을 깼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손바닥을 펼쳤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예속의 굴레는 벗어났으나 영혼은 이미 누더기가 된 상태였다. 손톱 밑에는 씻기지 않는 검은 흔적이 박혀 있었다. 그것은 한시우가 남긴 공허의 잔재였다.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살갗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카시안은 거칠어진 숨을 몰아쉬며 벽에 머리를 기대었다. 금속성의 차가움이 관자놀이를 자극했다. 그는 더 이상 정의를 읊조리던 왕자가 아니었다. 무너진 신념의 잔해 위에서 제국이 내뿜는 악취를 맡을 뿐이었다.
감옥 밖 복도에서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육중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하얀 예복을 입은 사내들이 횃불을 들고 나타났다. 제국 평의회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소집된 이단 심문관들이었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자비 대신 기계적인 냉혹함이 서려 있었다. 심문관 중 하나가 카시안의 턱밑을 거칠게 잡아 올렸다. 횃불의 일렁이는 불빛이 카시안의 초점 없는 눈에 반사되었다. 사내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가죽 장갑의 꺼칠한 감촉이 턱을 훑고 지나갔다. 카시안은 저항하지 않았다. 다만 목 안쪽에서 차오르는 비릿한 감각을 억누르며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성소의 파괴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를 지탱하던 거대한 거짓말의 붕괴였다. 제국은 진실을 덮기 위해 더 큰 공포를 선택했다. 이단 심문관들은 도시 곳곳을 뒤지며 이방인의 흔적을 지웠다. 빙의자들의 마력을 추출하던 실험실은 이제 폐기 처분될 운명이었다. 카시안은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혔다. 비릿한 혈향이 감각을 깨웠으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영혼의 조각들이 서로 어긋나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뼛속까지 스며든 한기가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같은 시각 금지된 협곡의 초입은 안개로 가득했다. 한시우는 바위산의 틈새를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등 뒤에서는 레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그녀의 이마에는 여전히 검은 혈관이 돋아 있었다. 공허의 마력이 그녀의 생명력을 갉아먹는 중이었다. 바르가스는 한 걸음 뒤처진 채 낡은 가방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줄곧 한시우의 뒷모습과 자신의 품속을 오갔다. 가방 안에는 고대 마력 증폭기가 묵직한 무게감을 뽐냈다. 그것은 평범한 도구가 아니었다. 수많은 영혼의 비명이 응축된 금단의 열쇠였다.
바르가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증폭기의 표면을 문질렀다. 거친 문양이 손가락 끝에 걸려 불쾌한 감각을 전했다. 이 증폭기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었다. 이건 먹어치운 영혼들의 비명통이었다. 그는 이 물건이 가진 진짜 용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공허의 문을 여는 열쇠인 동시에 제국에 바칠 최고의 제물이었다. 한시우의 목숨과 이 증폭기를 바꾼다면 대가는 충분했다. 전 대륙의 마력석 유통권이 그의 손에 들어올지도 몰랐다. 탐욕이 공포를 서서히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는 입가에 고인 침을 닦아내며 발소리를 죽였다.
한시우가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차가운 눈빛이 바르가스의 안면을 훑고 지나갔다. 바르가스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가방을 뒤로 숨겼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려 셔츠를 적셨다. 한시우의 시선은 바르가스의 손을 거쳐 가방으로 향했다. 공허의 마력이 미세하게 반응하며 대기를 진동시켰다. 한시우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옷을 뚫고 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증폭기에 새겨진 문양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두 힘이 공명할 때마다 주변의 공간이 일그러졌다. 공기는 끈적하게 달라붙으며 숨통을 조여왔다.
협곡의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로워 살을 에는 듯했다. 바르가스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며 주머니에서 작은 신호탄을 꺼냈다. 제국 전령에게 보내는 은밀한 신호였다. 이것만 터뜨리면 이단 심문관들이 이곳을 덮칠 것이다. 그러면 레나도 치료받고 자신도 부를 거머쥘 수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신호탄의 심지를 잡았다. 배신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으나 금세 금빛 마력석의 환영에 지워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 심지를 잡아당기려 했다.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가는 순간 대기가 얼어붙었다.
그 순간 바닥의 그림자가 생물처럼 꿈틀거리며 솟아올랐다. 검은 촉수들이 바르가스의 팔목을 순식간에 휘감았다. 뜨거운 열기 대신 소름 끼치는 냉기가 피부를 타고 번졌다.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목구멍이 꽉 막힌 듯 숨이 가빠졌다. 그림자는 바르가스의 몸을 천천히 집어삼키며 위로 올라왔다. 한시우는 어느새 그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무표정한 안면 너머로 안광이 번뜩였다. 눈동자 속에는 감정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시우의 손등에는 검은 문양이 고동치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과 일치하는 박동이었다. 바르가스는 손에 쥔 신호탄을 떨어뜨렸다. 금속 원통이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한시우는 바르가스의 멱살을 잡아 벽으로 밀어붙였다. 돌벽의 거친 파편이 바르가스의 등을 긁어 통증을 유발했다. 그는 숨을 들이키려 애쓰며 한시우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인간의 감정 대신 거대한 공허만이 소용돌이쳤다. 폐부 깊숙이 박히는 시선에 사지가 굳었다.
증폭기에서 새어 나온 빛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기계 장치에 새겨진 문양과 한시우의 흉터가 하나로 합쳐졌다. 완벽한 원형의 문양이 완성되자 협곡 전체가 진동했다. 차원의 균열이 벌어지며 보랏빛 번개가 대지를 갈랐다. 바르가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자신이 가진 열쇠가 한시우라는 존재 자체와 결속되어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배신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운명의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발밑의 지면이 파도처럼 출렁이며 균형을 앗아갔다.
제국의 이단 심문관들이 협곡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영혼의 나침반이 들려 있었다. 나침반의 바늘은 미친 듯이 회전하며 한시우가 있는 곳을 가리켰다. 심문관들의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바르가스는 공포에 질려 입술을 떨며 한시우를 응시했다. 한시우는 그를 놓아주는 대신 더욱 강하게 압박했다. 그림자가 바르가스의 발목을 완전히 덮어버렸다. 어둠은 장화 위를 타고 올라와 무릎까지 침식해 들어갔다.
심문관들이 뽑아 든 검에서 신성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공허의 마력과 정반대되는 역겨운 기운이었다. 한시우는 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무리들을 노려보았다. 그의 발치에서 시작된 검은 안개가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바르가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었다. 자신의 선택이 불러온 결과가 눈앞에서 펼쳐지려 하고 있었다. 한시우의 손끝에서 시작된 어둠이 바르가스의 그림자를 완전히 집어삼켰다. 바르가스의 동공이 수축하며 빛을 잃어갔다.
"죽고 싶다면 계속해 봐."
한시우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바르가스는 신호탄을 향해 뻗으려던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의 그림자는 이미 한시우의 권능 아래 복종하고 있었다. 협곡 너머에서 심문관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철갑이 부딪히는 소리가 사방에서 울려 퍼지며 포위망을 좁혔다. 한시우는 바닥에 떨어진 증폭기를 발로 짓눌렀다. 고대 유물이 비명을 지르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장치 속에서 추출된 영혼의 조각들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파편들이 살갗을 스치며 미세한 상처를 남겼다.
바르가스는 부서지는 유물을 보며 넋을 잃었다. 그것은 자신의 전 재산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한시우에게 그것은 그저 부수어야 할 껍데기에 불과했다. 한시우의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박동이 세계를 뒤흔들었다. 심문관들의 걸음이 멈추었고 말들은 앞발을 들며 괴로워했다. 대기가 뒤틀리며 모든 소리가 사라진 침묵의 공간이 형성되었다. 고막을 찌르는 정적이 협곡을 가득 메웠다.
한시우는 등 뒤에 누운 레나를 한 번 쳐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어둠이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돌려 바르가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배신의 대가는 단순한 죽음이 아님을 경고하는 몸짓이었다. 바르가스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목을 만졌다. 그림자의 감촉이 여전히 살갗에 남아 있었다. 목줄이 채워진 짐승처럼 그는 거친 숨을 내뱉었다.
제국 전령의 신호탄이 허공으로 솟구치려던 찰나였다. 한시우의 손에서 뻗어 나간 검은 줄기가 신호탄을 낚아채어 으깨버렸다. 화약 가루가 바닥으로 맥없이 쏟아졌다. 바르가스는 자신의 계획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직감했다. 그는 바닥에 엎드려 숨을 헐떡이며 한시우의 발등을 내려다보았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지며 바닥의 흙더미가 눈 안으로 들어왔다.
협곡의 안개가 걷히며 수백 명의 심문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중심에는 거대한 마력 증폭기를 장착한 지휘관이 서 있었다. 지휘관은 검을 들어 한시우를 가리켰다. 하지만 한시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공허의 칼날을 뽑아 들었다. 지면이 갈라지며 심연의 구멍이 생겨났다. 칼날이 공기를 가를 때마다 기괴한 울음소리가 협곡에 메아리쳤다.
바르가스는 자신의 가방을 품에 안고 뒷걸음질 쳤다. 그는 한시우의 그림자가 자신의 발등을 타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경고가 아니었다. 이미 자신의 영혼 절반이 저 남자에게 예속되었다는 선언이었다. 한시우는 바르가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심문관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서 검은 실체들이 실타래처럼 풀려나갔다.
"전부 삼켜라."
한시우의 명령과 함께 그림자가 파도처럼 밀려 나갔다. 심문관들의 신성 마력이 공허의 파도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바르가스는 그 광경을 보며 자신의 심장을 움켜쥐었다. 한시우의 박동에 맞춰 자신의 심장도 기괴하게 뛰고 있었다. 가슴뼈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전신을 지배했다.
한시우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전장을 응시했다. 그의 시선 끝에는 제국의 수도 에테르노가 있었다. 이제 복수의 방향은 명확해졌다. 그는 바닥에 주저앉은 바르가스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켰다. 바르가스의 눈동자에 서린 공포를 확인한 한시우가 낮게 읊조렸다.
"길 안내는 네가 해라."
바르가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시선이 협곡 입구 너머, 이제는 시신조차 남지 않은 공터에 머물렀다. 한시우는 레나를 다시 등에 업고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바르가스는 비틀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그 뒤를 따랐다. 그림자가 그의 발목을 낚아채듯 끌어당겼다. 한시우가 멈춰 서서 품 안에서 낡은 금속 배지를 꺼냈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의 문장이 새겨진 제국의 상징이었다. 그는 배지를 바닥에 던진 뒤 발로 짓밟아 흙속에 파묻었다.
"이제 시작이지."
한시우의 말에 바르가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협곡 너머에서 제국의 추격군이 내뿜는 나팔 소리가 들려왔다. 한시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숲의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레나의 체온이 점점 식어갔다. 그는 자신의 공허 마력을 억제하며 그녀의 심장 부근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통해 느껴지는 미약한 진동이 그의 유일한 이정표였다. 바르가스는 가방을 고쳐 매며 앞서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그의 눈에는 여전히 탐욕과 공포가 뒤섞인 채 일렁이고 있었다.
숲의 나무들이 비명을 지르며 길을 비켰다. 한시우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풀들이 검게 타죽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걸었다. 바르가스는 주머니 속에서 부서진 마력석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것은 그가 마지막으로 숨겨둔 비상금이었다. 한시우가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한시우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딴생각하지 마."
한시우의 차가운 목소리에 바르가스는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숲을 빠져나오자 멀리 에테르노의 높은 성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성벽 위에는 수천 개의 마력 등불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것은 평화의 상징인 동시에 제물을 바쳐 유지되는 착취의 빛이었다. 한시우는 성벽을 향해 손을 뻗어 허공을 움켜쥐었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검은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흩어졌다. 이제 도망칠 곳은 없었다.
"저 성문을 열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