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의 천장이 비명을 지르며 내려앉았다. 굉음과 함께 쏟아진 돌무더기 사이로 서늘한 은빛 광채가 들이쳤다. 먼지 구름을 가르고 나타난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 성검을 바닥에 박아 넣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온 백색의 신성 마력이 파동이 되어 사방으로 퍼졌다. 시우의 발치에서 일렁이던 검은 공허의 기운이 그 빛에 닿자마자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증발했다.
카시안은 무너진 잔해 위에 선 채 시우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일말의 동정심도 서려 있지 않았다. 오직 확고한 살의와 질서를 향한 광신만이 서슬 퍼렇게 빛날 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성검을 들어 올려 시우의 목을 겨누었다.
"이곳까지 기어 들어올 줄은 몰랐군, 이방인."
카시안의 목소리가 울릴 때마다 성검의 빛이 더욱 강해졌다. 시우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슴에 새겨진 실험체 0호라는 낙인이 불에 달궈진 인장처럼 뜨겁게 타올랐다. 레나에게 힘을 빼앗긴 뒤로 심장 근처의 마나 회로는 이미 엉망으로 뒤엉켜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비린 피 냄새가 올라왔다.
시우는 검지 손톱으로 자신의 손등을 깊게 파고들었다. 통증을 매개로 흩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았다. 그는 대답 대신 바닥에 고인 자신의 피를 응시했다. 검게 물든 핏방울이 공허의 잔재를 머금고 파들거리고 있었다.
카시안이 바닥을 박차고 도약했다. 은빛 갑옷이 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파찰음을 냈다. 성검이 수직으로 낙하하며 시우의 머리 위를 짓눌렀다. 시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비틀어 공격을 피했다. 콰앙, 하는 소리와 함께 방금까지 그가 서 있던 지면이 분쇄되어 튀어 올랐다.
"너의 존재 자체가 이 세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독이다."
카시안이 검을 가로로 휘두르며 덧붙였다. 시우는 남은 공허의 마력을 쥐어짜 내어 손바닥 앞에 방어막을 형성했다. 하지만 카시안의 마력 증폭기는 시우의 상상을 초월하는 출력을 쏟아내고 있었다. 성검의 궤적을 따라 방출되는 에테르 파장이 공허의 장벽을 종잇장처럼 찢어발겼다.
시우의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벽에 처박혔다. 척추를 타고 전해지는 충격에 시야가 순간적으로 점멸했다. 그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바닥에 뱉어냈다. 카시안은 멈추지 않고 다가와 시우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금속 장갑의 감촉이 목을 조여 왔다.
"구원의 의식은 멈추지 않는다. 네가 흘릴 피가 아르카디아의 내일을 지탱할 양분이 될 테니까."
카시안의 미소는 자애로웠으나, 그 눈 밑으로는 검은 그림자가 벌레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시우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기이한 이질감을 읽어냈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라기보다, 무언가 거대한 시스템에 예속된 기계의 반응에 가까웠다. 시우는 떨리는 손을 뻗어 카시안의 손목을 잡았다.
"양분이라니. 너희는 그저 살인자일 뿐이야."
시우의 목소리가 긁힌 듯 갈라져 나왔다. 그는 심장 속 깊은 곳, 레나가 미처 다 가져가지 못한 공허의 핵을 건드렸다. 심장이 터질 듯한 통증과 함께 검은 불꽃이 시우의 전신에서 치솟았다. 예상치 못한 반격에 카시안의 눈썹이 꿈틀했다.
카시안은 성검을 다시 고쳐 쥐며 마력을 극대화했다. 증폭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백색 광휘가 실험실 전체를 삼킬 듯 팽창했다. 시우가 펼치는 공허의 기운은 그 거대한 빛의 파도 앞에서 위태롭게 명멸했다. 마력의 밀도 차이가 절망적인 수준이었다. 고지대 귀족의 혈통과 성물의 힘을 등에 업은 카시안을 상대로, 빈사 상태인 시우가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때, 어둠 속에서 낡은 마력 증폭기를 만지작거리던 바르가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잔해 뒤에 숨어 상황을 지켜보다가 품 안에서 붉게 점멸하는 돌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마력석과는 결이 다른, 기분 나쁜 진동을 내뿜는 고대 유물이었다.
"어이, 왕자님! 너무 혼자만 즐기지 말라고!"
바르가스가 소리치며 마력석을 두 사람 사이의 바닥으로 던졌다. 붉은 돌이 지면에 닿는 순간, 공기가 비틀리며 기괴한 소음을 내뱉었다. 지질학적 변이로 인해 특정 시간에만 열린다는 그림자 통로의 입구가 그곳에 있었다. 마력석의 파장이 지면 아래 잠들어 있던 공간의 균열을 강제로 자극한 것이다.
바닥이 소리 없이 갈라지며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이 입을 벌렸다. 카시안의 성검이 시우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이었다. 검 끝이 시우의 옷깃을 스치며 차가운 감촉을 남겼을 때, 중력이 사라졌다.
"이게 무슨...!"
카시안의 당황한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빛을 발하던 성검의 위력이 순식간에 급감하기 시작했다. 그림자 통로 내부의 변칙적인 마력 밀도가 상급 마법사의 회로를 역으로 짓누르고 있었다. 시우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카시안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 완벽했던 그의 은빛 갑옷 위로 검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혹은 서로를 죽이기 위해 끝까지 붙잡으려는 듯 뒤엉킨 채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발밑에서 올라오는 서늘한 공기가 피부를 찢는 칼날처럼 느껴졌다. 시우는 멀어지는 실험실의 천장을 보며 손가락 끝을 말아 쥐었다.
심연의 바닥에서 정체 모를 노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방랑자 부족이 부른다는, 원혼을 위로하는 침묵의 노래였다. 카시안이 비명을 지르며 시우의 멱살을 놓쳤다. 그의 은빛 마력이 그림자 통로의 어둠에 먹혀 완전히 꺼져버렸다.
시우는 어둠 속에서 자신의 가슴을 더듬었다. 사라진 줄 알았던 공허의 박동이, 이 깊은 구렁텅이 속에서 다시금 힘차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추락의 공포 속에서도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바닥에 닿기 직전, 카시안이 다시 성검을 휘둘러 시우의 가슴을 향해 투척했다.
칼날이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고막을 찔렀다. 시우는 억지로 팔을 뻗어 성검의 자루를 밀쳐냈다. 손바닥이 베여 나가는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뜨거운 액체가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카시안의 눈동자가 암흑 속에서 번뜩였다.
"놓치지 않는다. 너는 여기서 끝이다."
카시안의 외침이 공동 내부에 메아리쳤다. 그는 추락하는 와중에도 허리춤에서 보조 단검을 뽑아 들었다. 시우의 발치 아래로 거대한 늪의 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축축하고 비릿한 이끼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저지대의 상징인 침식의 늪이 바로 아래였다.
시우는 공허의 기운을 다리에 집중했다. 착지의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마력을 역방향으로 방출했다. 콰득, 소리와 함께 발목이 뒤틀리는 통증이 전해졌다. 진흙이 사방으로 튀며 시우의 온몸을 뒤덮었다. 시우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카시안 역시 멀지 않은 곳에 착지해 있었다. 그의 은빛 갑옷은 이미 진흙투성이가 되어 광채를 잃었다. 성검은 조금 떨어진 늪 바닥에 박혀 희미하게 명멸하고 있었다. 카시안은 비틀거리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이곳이... 천한 것들이 사는 구덩이인가."
카시안의 목소리에 혐오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장갑을 벗어 던지며 오염된 손을 털어냈다. 시우는 침을 뱉어내며 카시안의 뒤편을 가리켰다. 안개 너머에서 수십 개의 눈동자가 소리 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마력 결핍으로 피부가 갈라진 거주민들이었다.
그들 사이에서 작은 체구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레나였다. 그녀의 손에는 시우에게서 빼앗은 공허의 결정체가 쥐어져 있었다. 레나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녀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카시안의 바로 앞이었다.
"레나, 비켜."
시우가 쉰 목소리로 경고했다. 하지만 레나는 듣지 못한 듯 카시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카시안은 귀찮다는 듯 단검을 고쳐 쥐었다. 그에게 저지대의 주민은 인간이 아닌, 그저 제거해야 할 오염물질에 불과했다.
"방해하지 마라, 늪의 쥐새끼."
카시안의 단검이 레나의 목을 향해 사선으로 그어졌다. 시우는 이를 악물며 바닥을 박차고 나갔다. 뒤틀린 발목이 비명을 질렀지만 무시했다. 그는 레나의 어깨를 낚아채 뒤로 밀어냈다. 날카로운 금속이 시우의 가슴팍을 얕게 훑고 지나갔다.
레나는 바닥에 주저앉으며 손에 든 결정을 떨어뜨렸다. 검은 보석이 진흙 위를 굴러 카시안의 발치에 멈췄다. 카시안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결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공허의 파장이 그의 마력 회로와 공명하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카시안의 얼굴이 일순간 경직되었다. 그의 목 주변으로 검은 혈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영혼 예속의 징후였다. 시스템의 수호자가 시스템을 파괴하는 공허의 힘에 잠식당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이냐...!"
카시안이 자신의 목을 부여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동자에서 성스러운 백색광이 사라지고 탁한 어둠이 차올랐다. 시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레나의 손을 잡았다. 레나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녀의 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안개 속에서 방랑자들의 노래 소리가 더욱 커졌다. 소리가 들려오는 쪽에서 바르가스가 낄낄거리며 나타났다. 그는 낡은 마력 증폭기를 공중에 흔들며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뒤에는 무장한 용병들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계획대로군. 왕자님께서 몸소 공허의 그릇이 되어주시다니."
바르가스의 눈에 탐욕이 서렸다. 그는 시우를 향해 턱짓을 했다. 용병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 왔다. 시우는 레나를 자신의 뒤로 숨기며 주변을 살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앞에는 괴물로 변해가는 카시안이, 뒤에는 배신자 바르가스가 있었다.
카시안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의 입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소름 끼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검은 파동이 그의 몸을 중심으로 폭발하며 주변의 안개를 걷어냈다. 늪의 물이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솟구쳤다.
시우는 레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세를 낮췄다. 카시안의 등 뒤로 검은 날개 같은 환영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평의회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재앙의 형상이었다. 카시안의 손이 성검의 자루를 다시 쥐었다.
백색이었던 성검의 칼날이 순식간에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카시안은 초점 없는 눈으로 시우를 응시했다. 아니, 그것은 시우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의 무언가를 갈구하는 듯했다. 그는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전부... 태워버려야 해."
카시안의 목소리가 수십 겹으로 겹쳐 들렸다. 그가 검을 내리치는 순간, 늪 전체가 진동하며 거대한 균열이 발생했다. 바르가스와 용병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시우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지금의 카시안은 이전보다 수십 배는 더 위험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그때 레나가 시우의 옷자락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녀의 눈에 생기가 조금씩 돌아오고 있었다. 레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카시안의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붉게 빛나는 마력 증폭기가 카시안의 살 속에 파묻혀 있었다.
"저걸... 부숴야 해요..."
레나의 목소리가 귓가에 작게 울렸다. 시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바닥에 떨어진 단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공허의 박동이 심장을 때리며 전신에 마력을 공급했다. 아픔은 이미 무뎌진 지 오래였다. 오직 눈앞의 적을 파괴해야 한다는 서늘한 확신만이 뇌리를 지배했다.
카시안이 허공을 가르며 돌진해 왔다. 검은 검기가 늪의 지면을 종잇장처럼 찢으며 다가왔다. 시우는 몸을 낮춰 그 궤적 아래로 파고들었다. 차가운 진흙이 얼굴에 튀었지만 눈을 감지 않았다. 목표는 단 하나였다.
검은 칼날이 시우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공기의 마찰열에 두피가 타들어 가는 느낌이 났다. 시우는 카시안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단검을 거꾸로 쥐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그의 가슴에 박힌 증폭기를 내리찍었다.
챙그랑, 하는 날카로운 파열음이 침묵을 깼다. 증폭기의 수정이 조각나며 그 안에 갇혀 있던 막대한 마력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카시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검은 기운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거대한 빛의 기둥이 늪 한복판에서 솟구쳐 올랐다.
시우는 폭발의 충격에 뒤로 날아갔다. 시야가 하얗게 멀어지며 감각이 마비되었다. 멀리서 레나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시우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때, 늪은 기괴한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안개는 완전히 사라졌고, 카시안은 멀리 떨어진 곳에 대자로 뻗어 있었다. 그의 은빛 갑옷은 산산조각이 났으며, 몸에서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바르가스와 그의 용병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시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시우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레나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카시안이 놓쳤던 검은 성검이 쥐어져 있었다. 레나의 눈동자가 다시금 검게 물들어 있었다.
"시우 오빠, 이제 끝낼 시간이에요."
레나가 검 끝을 시우의 심장에 겨누며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방금 전 카시안이 지었던 자애로운 표정과 소름 끼치도록 닮아 있었다. 시우는 자신의 손등을 파고들던 손톱을 멈추고 그녀를 응시했다.
레나가 검을 치켜들었다. 칼날에 맺힌 검은 마력이 밤하늘의 별빛을 집어삼켰다.
"이게 아르카디아가 원하던 진짜 구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