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실험실의 육중한 납문이 비명을 지르며 열렸다. 한시우가 차가운 바닥 위로 발을 내딛자 벽면에 매달린 마력 감지 센서들이 일제히 붉게 점멸한다. 천장에 거미처럼 매달린 마나 추출기들이 기괴한 기계음을 내며 돌아갔다. 공기 중에는 비릿한 철분 냄새와 타버린 마력석의 매캐한 연기가 뒤섞여 있었다. 시우는 왼쪽 가슴팍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심장 안쪽에서 공허의 핵이 미세하게 진동하며 경고를 보냈다. 시야가 핏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실험실 중앙에는 거대한 유리 수조들이 숲처럼 늘어서 있었다. 그 안에는 점성이 강한 녹색 배양액에 잠긴 사람들이 보였다. 아니, 그것들을 사람이라 부를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피부는 종잇장처럼 창백하게 질려 투명해졌고, 온몸에는 굵은 마력 전선들이 가시처럼 박혀 있었다. 그들은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영혼의 파장이 기계 장치를 타고 빨려 들어갈 때마다 수조 속의 신체는 감전된 듯 경련하며 떨렸다.
시우의 검지 손톱이 손등의 여린 살점을 깊게 파고들었다. 붉은 선을 타고 피가 흘렀지만 통증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아르카디아의 찬란한 마법 문명이 무엇을 먹고 자라는지, 그 추악한 민낯이 눈앞에 있었다. 수백 명의 이방인이 이곳에서 산 채로 마력 연료가 되어 소모되고 있었다. 지배층이 누리는 풍요는 이들의 영혼을 갈아 넣은 결과물이었다.
이게 다 뭐야.
뒤따라오던 레나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녀는 입을 틀어막은 채 비틀거렸다. 바닥에 고인 끈적한 폐액을 밟은 장화가 기분 나쁜 마찰음을 냈다. 레나의 눈동자가 갈 곳을 잃고 휘둘렸다. 그녀의 어깨가 눈에 띄게 수축하며 작아졌다.
멈춰라. 더 이상 다가가면 경보 체계가 완전히 작동한다.
바르가스가 시우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그의 손에는 낡은 마력 증폭기가 들려 있었다. 증폭기의 바늘이 위험 수치를 가리키며 격렬하게 요동쳤다. 바르가스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맺혀 턱끝으로 떨어졌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퇴로를 살폈다.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해. 카시안의 추적 부대가 이 파동을 놓칠 리 없어. 영혼의 나침반은 이미 우리 위치를 고정했을 거다.
시우는 바르가스의 손을 뿌리쳤다. 서늘한 공허의 기운이 손등을 타고 흘렀다. 수조 속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귓가를 날카롭게 때렸다. 그들은 자신과 같은 곳에서 온 이들이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친구였을 이들이 기계의 부품으로 전락해 있었다. 아르카디아의 법령은 이들을 인간이 아닌 원천으로 규정했다.
저들을 그냥 두고 가라고?
시우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감정을 억누르려 했지만 호흡이 거칠어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목 안쪽이 화상을 입은 듯 뜨겁게 달아올랐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효율을 생각해라. 네가 여기서 저 수조를 깬다고 저들이 살아날 것 같나? 이미 영혼의 절반 이상이 추출됐어. 장치를 건드리는 순간 저들은 폭사한다. 그게 이 시스템의 기본 설계다.
바르가스는 냉정했다. 그는 낡은 증폭기를 만지작거리며 시장의 시세를 계산하듯 상황을 훑었다. 장사꾼의 눈에는 이미 폐기 처분될 물건들로만 보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나는 달랐다. 그녀는 홀린 듯 어느 구석진 수조 앞으로 걸어갔다.
안 돼. 아니지? 루카?
레나의 작은 손이 차가운 유리 벽에 닿았다. 수조 안에는 열 살 남짓해 보이는 소년이 갇혀 있었다. 아이의 가슴에는 실험체 712호라는 낙인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아이의 얼굴을 확인한 레나의 등줄기가 거세게 떨렸다. 그녀는 유리벽에 머리를 기댄 채 흐느꼈다.
루카, 누나 왔어. 정신 좀 차려봐. 응?
레나가 주먹으로 유리 벽을 두드렸다.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실험실에 울려 퍼졌다. 수조 속의 소년은 반응이 없었다. 다만 기계 장치가 돌아가며 소년의 가슴에 박힌 전선으로 푸른 불꽃이 튈 뿐이었다. 소년의 입술은 보라색으로 변해 있었다.
제발, 저 아이를 그냥 두지 마세요. 제 동생이란 말이에요. 시우 오빠, 제발요.
레나가 시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뺨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 턱밑으로 고였다. 애원하는 눈빛이 시우의 심장을 날카로운 송곳처럼 찔렀다. 바르가스가 급히 달려와 레나의 팔을 잡아끌었다.
미쳤어? 소리 낮춰! 추적자들이 문앞까지 왔다니까!
놔요! 내 동생이야! 저기 우리 루카가 저러고 있는데 어떻게 가!
레나는 바르가스의 손을 뿌리치려 몸부림쳤다. 하지만 마력 결핍으로 쇠약해진 그녀의 힘으로는 건장한 남성을 이길 수 없었다. 바르가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레나를 강제로 뒤로 밀어냈다. 레나가 바닥에 주저앉으며 거친 숨을 내뱉었다.
시우는 그 광경을 가만히 응시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하는 법을 잊었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마음을 죽였다고 믿었다. 그러나 가슴 속 공허의 핵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그것은 명백한 분노였다. 제물을 바쳐야만 유지되는 이 가짜 평화를 향한 증오가 전신을 훑었다.
바르가스, 비켜.
시우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발바닥 아래서부터 검은 그림자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진 듯 차가워졌다. 마력 감지 센서들이 비명을 지르듯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하나둘 터져 나갔다. 불꽃이 공중에 흩날렸다.
야! 너 진짜 미쳤어? 카시안이 오고 있다고! 제국의 왕자가 직접 움직였단 말이다!
바르가스의 외침은 시우의 귀에 닿지 않았다. 시우는 허공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공기 중의 분자들이 비틀리며 검은 칼날의 형상을 만들었다. 공허의 마력이 실체화되자 실험실 내부의 조명들이 점멸하며 유리 파편을 쏟아냈다.
시우는 수조를 향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이 더러운 시스템의 부속품들을 전부 부숴버릴 생각이었다. 설령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더라도, 이 끔찍한 학살 현장을 유지하게 둘 수는 없었다. 칼날 끝에서 검은 번개가 튀었다.
그때였다.
치직, 하는 잡음과 함께 실험실 정면에 있는 대형 스크린에 불이 들어왔다.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우아하게 찻잔을 들고 있는 손가락, 정갈하게 빗어 넘긴 금발이 화면 가득 비쳤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었다.
그는 마치 눈앞에서 시우를 보고 있는 것처럼 느긋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눈은 서늘한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예상보다 빠르군, 402호. 아니, 한시우라고 불러줘야 하나?
카시안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실험실 전체에 깔렸다. 그는 찻잔을 천천히 내려놓고 화면 너머의 시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옆에는 시우의 영혼 파장을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있는 복잡한 데이터 차트가 떠 있었다. 파형의 굴곡 하나하나가 시우의 현재 상태를 완벽하게 해부하고 있었다.
네가 그 공허의 칼날을 내리치는 순간, 이 구역 전체에 설정된 자폭 마법이 발동할 거다. 네 소중한 동생과 함께 먼지가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나는 말리지 않겠다.
카시안이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것은 자애로운 왕자의 가면 뒤에 숨겨진, 포식자의 잔혹한 웃음이었다. 그는 다시 찻잔을 들어 향을 음미한 뒤 나직하게 덧붙였다.
기다리고 있겠다. 네 발로 직접 성소까지 걸어오게 될 테니까. 네가 사랑하는 그 소녀의 목숨을 담보로 말이야.
스크린 속 카시안의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났다. 시우는 치켜든 검을 쥔 채 멈춰 섰다. 복도 너머에서 수십 명의 무거운 갑주 소리가 질서 정연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철제 구두가 바닥을 울리는 소리가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었다.
시우의 시선이 바닥에 주저앉은 레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소년의 수조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바르가스는 이미 입구 쪽으로 몸을 숨긴 채 시우에게 눈짓을 보냈다. 퇴로는 이미 차단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성소로 오라는 건가.
시우가 검을 내리며 중얼거렸다. 검은 칼날이 안개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대신 그의 손등 위로 검은 혈관이 툭 불거져 나왔다. 공허의 힘이 육신을 갉아먹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시우는 레나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일으켜 세웠다.
레나, 나를 봐.
시우의 목소리에 레나가 초점 없는 눈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절망과 희망이 뒤섞인 기괴한 빛이 일렁였다. 시우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지 않았다. 그럴 여유조차 없었다.
루카를 구할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시우의 말에 레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 듯 입만 벙긋거렸다. 시우는 그녀를 자신의 등 뒤로 보냈다. 바르가스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시우의 옆에 섰다.
어쩔 셈이야? 여기서 성소까지는 제국군이 쫙 깔렸어. 정면 돌파는 자살행위다.
바르가스의 목소리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는 연신 자신의 마력 증폭기를 확인했다. 증폭기는 이미 한계치를 넘어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시우는 대답 대신 실험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자폭 장치가 설정되어 있다고 했지.
시우의 눈에 기괴한 확신이 서렸다. 그는 다시 손을 뻗어 공기를 거머쥐었다. 아까보다 훨씬 거대하고 짙은 공허의 기운이 그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칼날의 형태가 아니었다. 거대한 구체의 형상이었다.
이봐, 너 설마!
바르가스가 경악하며 뒤로 물러났다. 시우는 공허의 구체를 발밑으로 내던졌다. 검은 구체가 바닥에 닿는 순간, 소리 없는 폭발이 일어났다. 바닥이 액체처럼 출렁이며 아래로 꺼져 내려갔다.
실험실 밑바닥은 거대한 배수로와 연결되어 있었다. 저지대의 늪으로 이어지는 오물 처리장이었다. 시우는 레나의 허리를 낚아채며 구멍 속으로 몸을 던졌다. 바르가스는 비명을 지르며 그 뒤를 따랐다.
추락하는 감각 속에서도 시우는 스크린 속 카시안의 눈을 잊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실험체로 보았다. 하지만 한시우는 더 이상 제물로 바쳐지던 그때의 무력한 대학생이 아니었다.
늪의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차가운 물속으로 처박히며 시우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수면 위로 올라오자 사방은 짙은 안개에 쌈여 있었다. 침식의 늪이었다. 마력 결핍으로 피부가 갈라진 거주민들이 그림자처럼 안개 속을 배회하고 있었다.
레나, 괜찮아?
시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레나는 대답 대신 시우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녀의 손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바르가스는 구토를 하며 늪가로 기어 올라갔다.
이 미친놈아. 죽을 뻔했잖아!
바르가스가 흙탕물을 뱉어내며 소리쳤다. 하지만 시우는 그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안개 너머에서 수십 개의 푸른 안광이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추적자 부대의 영혼 나침반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혼의 파동이 느껴진다. 한시우, 네 놈의 파동은 너무나 선명해서 숨을 곳이 없어.
안개 속에서 철갑을 두른 기사가 나타났다. 카시안의 최측근이자 추적자 부대의 대장, 엘릭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거대한 도끼가 마력을 머금고 푸르게 빛났다.
시우는 레나를 자신의 뒤로 밀어냈다. 그리고 발등까지 차오른 늪물을 걷어차며 앞으로 나섰다. 공허의 힘이 다시금 그의 팔을 타고 흘러들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감각이었다.
엘릭은 도끼를 고쳐 쥐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방인의 비참한 최후를 지켜봐 주마. 네 영혼은 세계수의 훌륭한 양분이 될 거다.
도끼가 허공을 갈랐다. 파괴적인 마력의 파동이 안개를 찢으며 시우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시우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왼손을 들어 도끼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텅, 하는 소리와 함께 금속음이 늪지에 울려 퍼졌다. 엘릭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도끼날은 시우의 손바닥 위에서 멈춰 있었다. 검은 기류가 도끼에 깃든 마력을 순식간에 빨아들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시우는 대답 대신 엘릭의 가슴팍에 오른손을 꽂아 넣었다. 공허의 마력이 갑옷을 뚫고 그의 심장을 직접 타격했다. 엘릭의 입에서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뒤로 날아가 늪물에 처박혔다.
시우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감각이 없었다. 손이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힘은 넘쳐났다. 타인의 마력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이 금지된 힘이 그를 잠식해가고 있었다.
뒤를 돌아본 시우는 레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서려 있었다. 자신이 알던 시우가 아닌, 무언가 이질적인 존재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시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손을 내밀었다.
가야 해. 멈추면 죽는다.
레나는 주춤거리며 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떨림이 시우의 가슴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바르가스는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의 마력 증폭기를 품 안으로 깊숙이 집어넣었다.
성소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할 것이다. 하지만 시우의 눈에는 이미 결말이 정해져 있었다. 그는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늪지 너머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구원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였다. 그것은 누군가에게는 평화의 소리였고,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선고였다.
시우의 발밑에서 검은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늪을 잠식해 나갔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늪의 생명체들이 마력을 잃고 시들어갔다. 그는 더 이상 이 세계의 이방인이 아니었다. 이 세계를 무너뜨릴 유일한 균열이었다.
안개 너머에서 수백 명의 군대가 그들을 포위하며 좁혀왔다. 기사들의 창끝이 시우의 심장을 겨눴다. 시우는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며 검은 칼날을 다시 불러냈다.
카시안, 네가 만든 이 지옥을 직접 보여주지.
시우의 목소리가 안개를 뚫고 고지대를 향해 뻗어 나갔다. 그의 뒤로 레나의 흐느낌과 바르가스의 거친 숨소리가 섞여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시우의 심장에서 느껴지던 공허의 박동이 멈췄다.
아니, 그것은 멈춘 것이 아니었다. 세계수 에르드의 거대한 파장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시우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검게 물들었다.
모두 엎드려.
시우의 명령과 함께 그의 몸에서 거대한 공허의 폭풍이 터져 나왔다. 포위망을 좁혀오던 기사들이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먼지처럼 흩어졌다. 늪지 전체가 진동하며 뒤집혔다.
폭풍의 중심에서 시우는 단 하나의 소리만을 듣고 있었다. 그것은 세계수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누군가의 간절한 부름이었다.
도와줘.
그것은 레나의 목소리도, 루카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아르카디아 그 자체가 내뱉는 단말마였다. 시우는 그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안개를 헤치고 걸어오는 금발의 남자가 서 있었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 스크린 밖으로 나와 직접 시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의 손에는 성스러운 빛을 내뿜는 성검이 들려 있었다.
하지만 시우의 눈에 비친 카시안의 그림자는 기괴하게 뒤틀려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네 놈의 정체는 뭐지?
시우의 물음에 카시안이 성검을 들어 올렸다. 성검의 칼날 위로 시우의 검은 눈동자가 비쳤다. 카시안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이 세계의 의지다. 그리고 너는, 내가 버린 찌꺼기일 뿐이지.
카시안의 성검이 시우의 어깨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검은 공허의 기운과 섞여 바닥으로 튀었다. 시우는 고통을 느끼는 대신 카시안의 목을 움켜쥐었다.
찌꺼기가 세계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똑똑히 봐라.
시우의 손끝에서 시작된 공허의 불꽃이 카시안의 몸을 태우기 시작했다. 카시안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그는 성검을 뽑아내려 했으나 시우의 손아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때, 시우의 귓가에 낯익은 기계음이 들려왔다. 실험실에서 들었던 마나 추출기의 소음이었다. 카시안의 가슴팍에서 푸른 마력 전선들이 튀어나와 시우의 팔을 감쌌다.
카시안은 이미 사람이 아니었다. 그 또한 세계수 에르드에 연결된 거대한 부품에 불과했다.
우리 모두는 제물이다, 한시우.
카시안이 피를 토하며 웃었다.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지며 시우를 끌어안았다. 자폭 마법의 문양이 시우의 발밑에서 완성되고 있었다.
시우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레나를 보았다. 그녀는 두 손을 모은 채 시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더 이상 공포가 없었다. 대신 알 수 없는 확신만이 가득했다.
레나는 주머니에서 낡은 마력석 조각을 꺼내 시우에게 던졌다.
그걸 써요!
시우가 마력석을 낚아채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늪지를 집어삼켰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소용돌이 속에서 시우는 정신을 잃어갔다.
눈을 떴을 때, 시우의 앞에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은 늪지도, 성소도 아니었다. 1,000년 전 멸망했다는 마도 왕국 제니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광장 한복판에, 어린 시절의 카시안과 시우가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어린 카시안이 손을 내밀며 물었다. 시우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공허의 낙인 대신 평범한 대학생의 흉터만이 남아 있었다.
시우는 내밀어진 손을 잡으려다 멈췄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시선 때문이었다. 고개를 돌리자, 성인이 된 카시안이 무표정한 얼굴로 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루카의 머리장식이 들려 있었다.
이게 네가 선택한 결과다.
카시안의 목소리와 함께 환상이 깨져나갔다. 시우는 다시 차가운 늪바닥에 처박혔다. 주변에는 타버린 시체들만이 즐비했다. 레나와 바르가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손등의 공허의 낙인이 이전보다 훨씬 거대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수천 명의 제국군을 향해 검을 들었다.
전부 죽여주마.
시우가 첫 발을 내디뎠다. 그의 발바닥이 닿은 늪지가 검게 타들어 가며 굳어버렸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공간 자체가 찢어지며 검은 폭풍이 군대를 덮쳤다.
절규와 비명이 늪지를 가득 채웠다. 시우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피의 길을 만들며 성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레나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 세계를 부숴야 한다.
성소의 거대한 문 앞에 도달했을 때, 시우는 멈춰 섰다. 문 위에는 레나의 옷자락이 피에 젖은 채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바르가스의 마력 증폭기가 산산조각 난 채 굴러다니고 있었다.
시우는 성소의 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곳에는 7인 평의회 의원들이 거대한 세계수 뿌리에 매달린 채 시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서 오너라, 마지막 제물이여.
의장석에 앉은 노인이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카시안과 똑같이 닮아 있었다. 시우는 검을 고쳐 쥐며 평의회를 향해 도약했다.
공허의 칼날이 세계수의 뿌리를 베어 넘겼다. 성소 전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시우는 무너지는 천장을 바라보며 레나의 이름을 크게 외쳤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기괴한 웃음소리뿐이었다.
성소 지하에서 거대한 수조가 솟아올랐다. 그 안에는 레나가 갇혀 있었다. 그녀의 온몸에는 루카와 똑같은 마력 전선들이 박혀 있었다.
시우는 수조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이 유리에 닿기 직전, 레나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녀의 눈동자는 더 이상 갈색이 아니었다. 카시안과 똑같은, 서늘한 푸른색이었다.
오빠, 늦었어.
레나의 목소리가 시우의 심장을 얼려버렸다. 그녀가 손을 뻗자 시우의 공허 마력이 역류하며 그의 신체를 파괴하기 시작했다.
레나는 이미 평의회의 새로운 의장으로 선택된 상태였다. 그녀는 수조를 깨고 나오며 시우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네 공허는 이제 내 거야.
시우의 시야가 암전되었다. 그는 자신의 힘이 레나에게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바닥으로 쓰러졌다. 레나는 쓰러진 시우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이제 시작이야, 시우 오빠. 우리의 아르카디아를 만들어보자.
레나의 발치에서 검은 꽃들이 피어났다. 성소 밖으로 나가는 그녀의 뒤로, 수만 명의 제국군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시우는 폐허 속에 홀로 남겨진 채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의 손등에 있던 공허의 낙인이 완전히 사라졌다. 대신 그의 가슴 위로 '실험체 0호'라는 붉은 낙인이 새겨졌다.
레나가 성소의 문을 닫으며 마지막으로 시우를 돌아보았다.
기다릴게, 나의 제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