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한다는 감각만이 비대하게 부풀었다. 귓가에는 정체 모를 이명이 기분 나쁘게 맴돌았다. 눈을 뜨자마자 마주한 것은 거꾸로 뒤집힌 세상이었다. 천장이라 믿었던 암벽이 발바닥을 거칠게 밀어냈다. 중력이 꺾인 탓에 위아래의 구분이 모호했다. 비릿한 흙내음과 타버린 마력의 잔향이 코끝을 찔렀다. 위장이 뒤틀리는 감각에 헛구역질이 터져 나왔다.
바닥을 짚은 손바닥으로 차가운 냉기가 전해졌다.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 그림자에 잠긴 형체가 보였다. 은색 갑옷은 이미 광택을 잃은 지 오래였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쥔 성검은 희미한 빛조차 내지 못했다. 등불이 꺼져가는 방 안의 촛불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한시우는 무릎을 굽히고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목이 늪에 빠진 듯 무거웠다. 이곳은 마력 밀도가 극도로 낮은 변칙 지형이었다. 고지대의 풍요로운 마나에 익숙한 기사에게는 독이나 다름없다. 카시안의 창백한 안색이 그의 상태를 대변했다. 입술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초점을 잃고 흔들렸다.
성검을 지팡이 삼아 버티는 그의 손등이 파르르 떨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의 거친 호흡 소리가 명확해졌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 긁히는 듯한 소리가 났다. 마력이 마른 육체는 그저 무거운 쇳덩이에 불과했다. 그 잘나고 고결하던 왕자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 한시우는 검지 손톱으로 자신의 손등을 길게 파고들었다.
카시안이 고개를 들어 한시우를 응시했다. 흐릿하던 그의 눈동자에 경계의 빛이 서서히 맺혔다. 그는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려 애썼다. 하지만 손가락 마디마디가 말을 듣지 않는 모양이었다. 금속 장갑이 암벽을 긁으며 불쾌한 소음을 냈다. 한시우는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정신이 드나."
건조한 목소리가 메마른 통로 안에서 공허하게 울렸다. 카시안은 대답 대신 신음 섞인 숨을 내뱉었다. 그의 시선은 한시우의 가슴팍에 새겨진 공허의 문양에 머물렀다. 증오와 의무감이 뒤섞인 복잡한 기운이 그의 얼굴을 스쳤다. 그는 부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여기선 네 잘난 신성도, 질서도 아무런 힘이 없지."
한시우는 그의 앞에 멈춰 서서 차갑게 내뱉었다. 카시안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결국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다시 벽으로 미끄러졌다. 갑옷이 부딪히는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이곳의 중력은 불규칙하게 요동치며 감각을 유린했다. 가끔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들 때마다 구역질이 밀려왔다.
카시안은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방인... 너를 여기서 끝내야 한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꺾이지 않는 투지가 담겨 있었다. 참으로 지독한 신념이었다. 소수를 희생시켜 다수를 구한다는 그 오만한 정의감. 그 명분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제물로 사라졌던가. 한시우는 맥박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통증이 느껴지자 비로소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허리춤에 매달린 단검을 천천히 뽑아 들었다. 마력이 억제된 공간에서는 투박한 날붙이가 가장 확실한 수단이다. 금속의 서늘한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카시안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는지 성검을 수평으로 눕혔다. 빛을 잃은 검신은 그저 무거운 철판처럼 보였다.
"시스템이 지켜주지 않는 넌 그냥 고깃덩어리일 뿐이야."
한시우는 몸을 낮추며 그의 빈틈을 노렸다. 전생에서 배운 처절한 생존 본능이 머릿속에서 꿈틀거렸다. 화려한 검술이나 마법 공식 따위는 필요 없었다.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경로만을 계산했다. 카시안의 어깨가 왼쪽으로 미세하게 기울어 있었다. 왼쪽 다리의 부상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바닥을 박차고 나갔다. 평소보다 몸이 배는 무거웠지만 목표는 명확했다. 카시안은 성검을 휘둘러 방어막을 형성하려 했다. 하지만 마나가 실리지 않은 검격은 느리고 둔했다. 한시우는 가볍게 상체를 숙여 그의 검을 흘려보냈다. 금속 날이 머리 위를 스치며 허공을 갈랐다.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단검을 찔러 넣었다. 카시안은 비틀거리면서도 왼팔을 들어 손목을 낚아챘다. 기사로서 다져진 육체 능력은 마력이 없어도 무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그의 손아귀 힘에 뼈가 으스러질 듯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서로의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뒤엉켰다.
그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불굴의 의지를 보았다. 그것은 광기에 가까운 신념이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보다 아르카디아의 질서가 무너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있었다. 한시우는 이가 갈리는 소리를 내며 그를 밀어붙였다. 중력이 다시 한번 뒤틀리며 두 사람을 벽면으로 몰아넣었다.
등이 딱딱한 암벽에 부딪히며 충격이 전해졌다. 카시안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시우의 목을 압박해왔다. 숨구멍이 막히자 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한시우는 손에 쥔 단검을 그의 옆구리 틈새로 밀어 넣으려 애썼다. 갑옷의 이음새를 찾는 감각이 예민해졌다.
"너희가 말하는 평화가 어떤 피 위에 세워졌는지 잊었나?"
목이 눌린 채 쥐어짜듯 물었다. 카시안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그의 손에 들어간 힘이 아주 잠깐 느슨해졌다.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의 복부를 발로 걷어찼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그가 뒤로 밀려났다. 한시우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목을 움켜쥐었다.
통로 내부의 공기는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답답했다. 벽면에 새겨진 기괴한 무늬들이 조금씩 빛을 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이끼인 줄 알았으나 그것은 고대 문자들이었다. 문자들이 맥박처럼 일정한 간격으로 깜빡거렸다. 그 빛은 불길한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카시안도 그 변화를 눈치챘는지 주위를 살폈다. 그의 표정이 더욱 어둡게 가라앉았다. 이곳은 단순히 마력을 제한하는 공간이 아니었다. 무언가를 가두고 소모시키기 위해 설계된 거대한 함정이었다. 벽면의 문자들이 공명하며 기분 나쁜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갑자기 발밑의 지면이 진동했다. 거대한 짐승이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 듯한 떨림이었다. 벽면에서 뻗어 나온 그림자들이 촉수처럼 흐느적거렸다. 공기 중의 수분이 급격히 메마르며 피부가 따끔거렸다. 고대 금술의 기운이 통로 전체를 감싸 안았다.
한시우의 손등 상처에서 흘러나온 핏방울이 허공에 떴다. 그것은 중력을 무시하고 벽면의 문자들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피가 문자에 닿는 순간, 붉은 빛이 폭발적으로 강해졌다. 통로 전체가 거대한 생명체의 식도처럼 꿈틀거렸다. 이방인의 피가 고대 함정을 활성화하는 열쇠가 된 셈이다.
카시안이 성검을 고쳐 쥐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의 외침은 벽면의 진동 소리에 묻혀 희미하게 들렸다. 통로의 양끝이 서서히 좁혀지기 시작했다. 바위들이 부딪히며 내는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위아래의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고 공간 자체가 비틀렸다. 두 사람은 벽면에 몸을 밀착시킨 채 서로를 응시했다.
그림자 촉수들이 한시우의 발목을 휘감아 왔다. 그것들은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생명력을 갈구했다. 카시안에게도 예외는 없었다. 그의 은빛 갑옷 위로 검은 그림자들이 뱀처럼 기어올랐다. 그는 검을 휘둘러 그림자를 쳐내려 했지만 날카로운 칼날은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바닥이 아래로 푹 꺼지며 두 사람을 천천히 집어삼켰다. 아니, 그것은 바닥이 아니라 거대한 존재의 입이었다. 어둠 속에서 수천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두 사람을 향해 눈을 떴다. 말초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섰지만 한시우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여기서 무너지면 복수는커녕 한 줌의 마력석으로 사라질 뿐이다.
카시안이 한시우 쪽으로 손을 뻗었다. 구원하려는 손길이 아니었다. 시스템의 위협이 되는 존재를 끝까지 붙잡아 함께 파멸하려는 의지였다. 그의 눈동자에는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이질적인 모습에 뒷덜미의 솜털이 곤두섰다.
"함께 심판받자, 이방인."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때리는 순간, 통로 전체가 격하게 뒤틀리며 두 사람을 어둠 속으로 끌어당겼다. 벽면의 문자들은 이제 피처럼 붉은 액체를 뚝뚝 흘리고 있었다. 공간이 압착되며 뼈가 비명을 질렀다. 한시우는 카시안의 팔을 붙잡고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어둠이 시야를 완전히 가리기 직전, 벽 너머에서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레나의 목소리였다. 한시우의 가슴 속에서 공허의 박동이 세계수의 파장과 맞물려 요동쳤다. 폐를 짓누르는 압박감이 한계를 넘어섰다. 카시안의 손가락이 한시우의 목을 파고들었다.
검은 안개가 시야를 덮치기 직전, 한시우는 주머니 속의 낡은 마력석 조각을 꺼냈다. 레나가 건네주었던, 부서지고 빛바랜 작은 조각이었다. 그것은 고지대의 순수한 마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저지대의 비참함과 갈망이 응축된 결정체에 가까웠다. 한시우는 그 조각을 카시안의 갑옷 틈새로 밀어 넣었다.
카시안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성스러운 마력으로 가득했던 그의 회로에 저급한 마력이 침투했다. 고귀한 혈통의 자부심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내뱉으며 손아귀의 힘을 풀었다. 한시우는 그 틈을 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다.
공간의 뒤틀림은 더욱 심해졌다. 이제는 천장과 바닥의 구분조차 의미가 없었다. 두 사람은 거대한 소용돌이의 중심부로 빨려 들어갔다. 그곳에는 아르카디아의 역사에서 지워진 진실의 조각들이 유령처럼 떠다녔다. 제물로 바쳐진 빙의자들의 원혼이 차가운 냉기가 되어 피부를 훑었다.
한시우는 허공을 휘저으며 단검을 고쳐 쥐었다. 카시안의 그림자가 멀어지는 듯하더니 다시 거세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팔을 감싸는 그림자들을 억지로 뜯어냈다. 금속 장갑이 찢겨 나가며 붉은 피가 허공에 흩뿌려졌다. 그 피는 다시 벽면의 고대 문자를 자극했다.
"이곳이... 너희가 숨긴 성소의 실체인가."
한시우는 쥐어짜듯 소리쳤다. 카시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그는 자신의 성검을 거꾸로 잡아 자신의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시스템을 수호하기 위해 스스로를 제물로 바치려는 극단적인 선택이었다. 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성한 마력이 공허의 어둠과 충돌하며 폭발했다.
충격파가 한시우를 덮쳤다. 몸이 뒤로 날아가며 날카로운 암석 돌기에 부딪혔다. 옆구리에서 뜨거운 감각이 느껴졌고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레나의 비명 소리가 다시 한번 고막을 울렸기 때문이다. 그 작은 소녀가 겪고 있을 공포가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시우는 자신의 심장 부근에 손을 얹었다. 그곳에는 이 세계의 규칙을 파괴할 유일한 변수, 공허의 핵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핵이 맥동할 때마다 온몸의 혈관이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그는 그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핵의 힘을 끌어올렸다.
손바닥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것은 마력을 흡수하고 공간을 지우는 절대적인 무(無)의 힘이었다. 한시우는 그 불꽃을 카시안이 휘두르는 성검의 빛을 향해 내던졌다. 두 개의 상반된 힘이 맞붙으며 공간이 찢어지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빛과 어둠이 뒤섞인 폭풍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폭풍 속에서 카시안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처음으로 질서의 수호자가 아닌, 한 명의 나약한 인간으로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그의 완벽했던 신념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한시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에게 달려들어 가슴팍을 걷어찼다.
두 사람은 함께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추락했다. 떨어지는 와중에도 한시우는 카시안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시스템이 정해준 운명을 거부하고, 스스로 지옥을 선택한 자의 집념이었다. 카시안은 저항하려 했으나 공허의 힘에 속박된 그의 육체는 이미 의지를 잃었다.
추락의 끝에서 거대한 문이 나타났다. 그것은 세계수 에르드의 뿌리와 연결된, 이 세계의 가장 깊은 비밀이 숨겨진 금단의 영역이었다. 문 표면에는 수많은 빙의자의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한시우는 그 이름들 사이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문이 천천히 열리며 눈부신 백색 광창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구원이 아닌, 침입자를 배제하려는 시스템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한시우는 눈을 질끈 감으며 카시안을 문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자신 또한 그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어둠이 걷히고 차가운 물의 감각이 온몸을 감쌌다. 한시우는 본능적으로 숨을 참으며 수면 위로 올라가려 했다. 하지만 발목을 잡는 무거운 힘이 그를 아래로 끌어내렸다. 카시안이었다. 그는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한시우의 발목을 꽉 쥐고 있었다.
한시우는 단검을 휘둘러 카시안의 손목을 쳤다. 둔탁한 감각과 함께 발목이 자유로워졌다. 그는 필사적으로 수면을 향해 팔을 저었다. 마침내 수면 위로 머리를 내밀었을 때, 그는 자신이 거대한 지하 호수에 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수의 물은 은은한 푸른 빛을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호수 저편에서 누군가 비틀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낡은 누더기를 걸치고, 마력 결핍으로 피부가 갈라진 소녀였다. 레나였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생기를 잃은 채 기괴한 보랏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한시우를 향해 손을 뻗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찾았어, 오빠."
그 목소리는 레나의 것이었지만, 동시에 수천 명의 원혼이 겹쳐진 듯한 소름 끼치는 울림이었다. 한시우는 젖은 몸을 이끌고 호숫가로 기어 올라갔다. 레나는 그에게 다가와 차가운 손으로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한시우는 그녀의 손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힘에 몸을 떨었다.
레나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섰다. 그것은 지하 호수의 수면을 뚫고 솟아오른 고대의 존재였다. 수천 개의 눈동자가 일제히 한시우를 향해 눈을 떴다. 카시안은 호수 바닥으로 가라앉으며 마지막 숨을 내뱉었다. 시스템의 수호자가 사라진 자리에, 더 거대한 재앙이 강림하려 하고 있었다.
한시우는 떨리는 손으로 단검을 고쳐 쥐었다. 레나는 기괴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 지었다. 그녀의 손톱이 한시우의 목 너머를 예리하게 긁었다.
"이제 제물을 바칠 시간이야."
레나가 차가운 목소리로 내뱉으며 한시우의 심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