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파 꽈리마다 서늘한 비린내가 내려앉았다. 차원을 찢고 나온 대가는 가혹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온 선혈이 바스라진 낙엽 위를 적셨다. 루카 외곽 숲의 공기는 눅눅하고 무거웠다. 등 뒤로 열려 있던 그림자 통로가 비명 같은 소음을 내며 무너져 내렸다. 공간의 파편들이 허공에서 산산조각 나며 차가운 불꽃을 튀겼다.
한시우는 젖은 흙바닥을 손가락으로 긁으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감각이 마비된 왼쪽 다리는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시야가 흐릿하게 번졌다. 나무 그림자가 기괴하게 일렁이며 그를 덮쳐오는 착각이 들었다. 그때 거친 발소리가 고요한 숲의 정적을 깨뜨렸다.
"이 미친 인간아, 살아서 나오긴 했군."
익숙한 담배 찌든 내와 낡은 금속의 마찰음이 다가왔다. 바르가스였다. 그는 헐떡이는 한시우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 돌렸다. 바르가스의 손에 들린 구식 마력 증폭기가 윙윙거리며 기분 나쁜 진동을 내뿜었다. 그는 품 안에서 붉게 달구어진 인장을 꺼내 한시우의 옆구리에 가차 없이 들이밀었다.
치익, 살점이 타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단백질 탄내가 코끝을 찔렀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한시우는 턱 근육을 딱딱하게 굳힌 채 고통을 삼켰다. 목구멍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갔다. 바르가스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상처를 지지며 투덜거렸다.
"카시안 그 괴물 자식은 성소로 복귀했다. 온몸이 걸레짝이 되어서도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더군."
한시우의 검지 손톱이 손등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 그놈의 심장을 공허의 칼날로 꿰뚫었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놈은 살아남았다. 시스템의 수호자라는 자들은 이토록 끈질긴 것인가. 가슴 안쪽에서 서늘한 냉기가 소용돌이쳤다. 자신의 약함이, 그 어설픈 일격이 뼈저린 감각으로 되살아났다.
"아직 숨이 붙어 있다는 건가."
한시우의 목소리는 쇳소리가 섞여 갈라져 있었다. 바르가스는 대답 대신 혀를 찼다. 그는 증폭기를 만지작거리며 숲 입구 쪽을 살폈다. 그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살아 있는 게 문제가 아니야. 평의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7인 평의회 전원이 서명했어. 이방인 말살령이다."
바르가스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말살령. 그것은 아르카디아에 발을 들인 빙의자들을 마력의 원천으로 환원하겠다는 선전포고였다. 이제껏 숨죽여 지내던 추적자 부대가 나침반을 들고 대륙 전역을 훑을 것이다. 빙의자의 영혼 파장을 감지하는 그 기분 나쁜 장치들이 한시우의 목을 조여올 터였다.
"이제 장난은 끝났어. 평의회가 직접 움직이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라고. 루카를 떠나야 한다. 남부 데스벨리라면 그나마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바르가스는 한시우의 멱살을 잡듯 끌어당겼다. 하지만 한시우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의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분노가 혈관을 따라 흐르며 심장 박동을 불규칙하게 뒤흔들었다. 카시안을 죽이지 못했다는 사실이, 그 오만한 왕자가 다시 성소의 높은 의자에 앉아 참회의 기도를 올릴 것이라는 상상이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그늘진 나무 뒤에서 작은 그림자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레나였다. 그녀의 어깨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레나는 한시우의 옆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품 안에서 꼬질꼬질한 천 조각을 꺼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한시우의 피 묻은 손등을 닦아내기 시작했다.
레나의 눈동자에서 투명한 방울이 툭 떨어져 한시우의 손등 위로 번졌다. 뜨거웠다. 차가운 공허의 마력에 익숙해진 그에게, 아이의 눈물은 살을 데이는 불꽃 같았다. 레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상처 입은 짐승을 돌보듯 정성스럽게 손길을 움직일 뿐이었다.
한시우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다. 타인의 호의는 늘 소화되지 않는 돌덩이처럼 속을 더부룩하게 만들었다. 그는 레나가 건네는 작은 마력석 조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층민들이 생명을 담보로 얻어내는 조잡한 결정체였다.
"오빠, 아프지 마요…."
겨우 들릴 듯한 작은 목소리가 숲의 공기를 갈랐다. 한시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자신의 검지 손가락 끝을 만지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맥박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다. 감정은 생존을 방해하는 사치일 뿐이다. 동료가 죽어도 흔적을 지우는 것이 이곳의 규칙이었다. 지금 레나의 눈물을 닦아주는 행위 따위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숲 너머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엘리시온 왕국의 수도에서 들려오는 구원 축제의 시작 알림이었다. 제물을 기리는 성스러운 소리라지만, 한시우에게는 도살장의 칼날을 가는 소름 끼치는 금속음으로 들렸다. 저 소리가 멈추기 전에 누군가는 차가운 제단 위에서 마력을 빨릴 것이다.
바르가스가 초조한 듯 낡은 마력 증폭기를 주먹으로 내리쳤다.
"들리나? 저건 이제 축제가 아니라 사냥의 신호야. 평의회의 추적자들이 이곳까지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라고. 내 말 들어, 시우. 지금 당장 여길 떠나야 해."
바르가스의 경고는 합리적이었다. 암시장의 거상답게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계산이 빨랐다. 이곳에 머무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추적자들의 영혼 나침반이 이 숲을 가리키는 순간, 그들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한시우는 바르가스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그의 가슴 정중앙, 공허의 마력이 깃든 문양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음 송곳으로 심장을 찌르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과 공명하며 느껴지는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한시우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옆구리의 화상 자국이 당겨졌지만 무시했다. 그는 자신의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옷감 너머로 기괴한 문양이 맥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검은 실 같은 마력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와 허공으로 뻗어 나갔다.
"시우?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바르가스가 뒷걸음질 치며 외쳤다. 레나 역시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시우를 바라보았다. 한시우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가시고, 그 자리를 짙은 어둠이 채웠다. 입술 끝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실들이 공중에서 엉키며 복잡한 기하학적 형상을 그렸다. 그것은 아르카디아 대륙의 지형도였다. 고지대의 엘리시온 왕국부터 저지대의 침식의 늪까지, 마력의 흐름이 실핏줄처럼 선명하게 드러났다. 공허의 마력은 시스템의 맹점을 추적하는 나침반이 되어 세계의 지도를 재구성하고 있었다.
지도의 중심부, 가장 밝게 빛나는 지점이 있었다. 세계수 에르드의 뿌리가 닿아 있고, 수많은 제물의 피가 스며든 곳. 7인 평의회가 군림하며 인간을 연료로 소모하는 심장부였다.
한시우의 손가락이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검은 실들이 그곳을 중심으로 소용돌이치며 타올랐다.
"심판의 성소."
낮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바르가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한시우는 자리에서 일어나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그는 자신을 붙잡으려는 바르가스의 손을 가볍게 쳐냈다. 가슴의 문양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그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한시우는 레나가 건넄던 마력석 조각을 움켜쥐었다. 바스라진 돌가루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의 더 깊은 어둠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허공에 떠 있던 검은 지도가 일제히 성소를 가리키며 길을 열었다.
한시우는 자신의 손목을 타고 흐르는 검은 기운을 응시했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이 아니었다. 수천 년간 제단에 바쳐진 자들의 원념이 섞인 공허의 파동이었다. 가슴뼈 안쪽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세계수 에르드가 내뿜는 신성한 향기가 역겹게 느껴졌다.
"시우, 거긴 죽으러 가는 길이야."
바르가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러 세웠다. 한시우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높였다. 나무 사이를 스치는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뺨등을 긁고 지나갔다.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가 차가운 공기에 닿아 금세 식었다.
루카의 암시장은 이미 소란에 휩싸여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성벽 위로 횃불들이 어지럽게 움직였다. 추적자 부대가 가동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들은 영혼의 나침반을 들고 사냥개를 풀듯 빙의자들의 흔적을 쫓을 것이다. 하지만 한시우는 오히려 그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그림자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레나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아이의 시선이 한시우의 등 뒤에 박혔다. 한시우는 그 시선이 무거워 어깨를 한번 움츠렸다. 누군가를 지키겠다는 약속 따위는 한 적 없었다. 그저 자신을 버린 세상을 부수기 위한 발걸음일 뿐이었다.
숲의 끝자락에서 거대한 절벽이 나타났다. 아래로는 끝을 알 수 없는 침식의 늪이 펼쳐져 있었다. 보랏빛 안개가 독기처럼 피어오르며 생명체의 접근을 거부했다. 마력 결핍으로 피부가 갈라진 자들이 짐승처럼 울부짖는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올라왔다.
한시우는 절벽 끝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슴속 공허의 박동이 더욱 거세졌다. 세계수 에르드의 뿌리가 이 늪의 밑바닥까지 뻗어 있다는 사실을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시스템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까지, 한꺼번에 뒤엎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바르가스, 레나를 데리고 루카의 지하 수로로 숨어."
한시우가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명령했다. 바르가스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를 바라보았다. 한시우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안개가 주변의 나무들을 시커멓게 말려 죽이고 있었다. 그것은 아르카디아의 어떤 마법 체계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질적인 힘이었다.
"너는, 너는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거냐?"
"가장 높은 곳을 끌어내리러."
한시우의 짧은 대답과 함께 공허의 마력이 폭발했다. 그의 몸이 중력을 거스르듯 절벽 아래로 서서히 기울어졌다. 안개 너머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하는 느낌이 들었으나 상관없었다. 그는 이미 인간으로서의 생존보다 파괴자로서의 사명을 선택했다.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는 찰나, 한시우의 귓가에 차가운 금속음이 들렸다. 영혼의 나침반이 근처까지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추적자들의 횃불이 절벽 위를 비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본 것은 안개 속으로 사라지는 검은 그림자뿐이었다.
한시우는 추락하며 눈을 감았다. 공허의 박동이 온몸의 감각을 지배했다. 늪의 바닥에 닿는 순간, 그는 아르카디아의 거짓 평화를 지탱하는 거대한 뿌리를 단숨에 낚아챌 준비를 마쳤다. 어둠이 그의 시야를 완전히 덮어버렸다.
"찾았다."
낮게 깔린 한시우의 목소리가 늪의 정적을 찢었다. 그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자, 거대한 공허의 칼날이 실체를 드러내며 바닥을 내리찍었다. 늪 전체가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요동치기 시작했다. 지상 위 엘리시온 왕국의 성소에서도 똑같은 진동이 감지되고 있었다.
한시우는 피 냄새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의 예언대로, 공허의 박동이 세계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절벽 위에서 바르가스는 자신의 마력 증폭기가 과부하로 터져나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레나는 한시우가 사라진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곳에는 차가운 재만 날리고 있었다.
성소의 거대한 문이 거칠게 열렸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 피 묻은 검을 쥔 채 제단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닌, 검은 심연에 잠식된 상태였다. 카시안은 지면에서 느껴지는 불길한 진동을 느끼며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드디어 왔군, 이방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