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기가 섞인 바람이 불었다. 찢어진 옷깃 사이로 한기가 스몄다. 에덴 평원의 풀숲이 일렁였다. 파도가 치듯 기괴한 소리가 들렸다. 멀리 세계수 에르드가 보였다. 하늘을 찌를 듯한 거대한 그림자였다. 한시우는 걸음을 멈췄다.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맥박을 일정하게 유지하려 애썼다.
침식의 늪에서 빠져나온 일행은 처참했다. 레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녀가 한시우의 소매를 붙잡았다. 창백한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달빛을 받은 땀방울이 번들거렸다. 바르가스는 뒤를 돌아보았다. 연신 낡은 마력 증폭기를 만지작거렸다. 기계음이 고요한 평원의 정적을 긁어댔다.
지평선 끝에서 작은 불빛이 보였다. 방랑자 부족의 캠프였다. 그들은 아르카디아의 질서에서 벗어난 자들이었다. 제국과 왕국의 눈을 피해 떠도는 그림자였다. 한시우는 검지 손톱으로 손등을 파고들었다. 낯선 이들에 대한 경계심이 전신을 조였다. 목 안쪽이 바짝 말라붙었다.
캠프 입구에 들어서자 매매한 연기 냄새가 났다. 부족원들은 말없이 일행을 맞이했다. 그들의 눈에는 연민도 적대감도 없었다. 깊은 심연을 닮은 고요함만이 고였다. 중앙의 모닥불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불꽃이 타닥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늙은 부족장이 지팡이를 짚으며 섰다. 가죽처럼 질긴 얼굴에 주름이 깊었다. 노인은 아무런 질문도 던지지 않았다. 대신 마른 잎사귀 위로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한시우는 거리를 유지한 채 앉았다.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했다.
부족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공기의 진동만이 고막을 울렸다. 방랑자들의 비기라 불리는 침묵의 노래였다. 소리 없는 선율이 캠프를 무겁게 채웠다. 한시우는 가슴 안쪽의 진동에 미간을 찌푸렸다.
공허의 마력이 노래의 박자에 맞춰 들끓었다. 차갑게 식어 있던 혈관에 열기가 돌았다. 누군가 영혼의 균열을 어루만지는 기분이었다. 한시우는 눈을 감았다. 내면을 응시하자 기억들이 조각나 떠올랐다. 깨진 거울처럼 흩어져 있던 잔상이 하나로 모였다.
바르가스가 혀를 차며 일어났다. 그는 캠프 주변을 서성였다. 마력석 거래처를 찾으려는 모양이었다. 낡은 증폭기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파르르 떨렸다. 무가치한 의식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다는 몸짓이었다. 하지만 방랑자들은 그를 무시했다. 노래는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노래의 파동이 강해질수록 시야가 흐릿했다. 눈앞에 낯선 풍경들이 환영처럼 스쳐 갔다. 거대한 수조 속에 갇힌 빙의자들이 보였다. 그들의 가슴에는 한시우와 같은 문양이 있었다. 평의회가 감추려 했던 진실의 파편이었다. 차가운 금속관들이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다.
부족장이 한시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온기는 서늘했다. 노인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의미가 뇌리에 박혔다. 평의회는 너를 제물이라 부르지만 우리는 다르다는 뜻이었다. 한시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옷감 너머로 공허의 문양이 맥동했다. 이곳으로 불려 온 이유가 단순히 소모품은 아니었다. 노래는 파괴의 힘을 다스리는 법을 일깨웠다. 거칠게 날뛰던 마력이 혈관을 따라 질서를 찾았다.
"그대는 재앙이 아니라, 썩은 뿌리를 잘라내기 위해 온 칼날이구려."
부족장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한시우는 고개를 들어 노인을 보았다. 무미건조했던 눈동자에 생소한 빛이 서렸다. 보답할 길 없는 호의가 느껴졌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감사를 표하는 대신 차갑게 입을 열었다.
"나는 그저 살아남으려는 것뿐입니다."
노인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침묵의 노래는 서서히 잦아들었다. 평원의 소음이 다시 귓가를 채웠다. 풀벌레 소리와 바람 소리가 섞여 들었다. 한시우는 몸 안의 마력이 정교해졌음을 느꼈다. 폭주하던 공허의 힘이 고요한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레나는 어느새 부족원들 곁에서 잠들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던 한시우의 표정이 굳었다. 타인과 엮이는 것은 생존에 방해가 될 뿐이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어두운 지평선을 응시했다.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바르가스가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바닥에 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쓸데없는 짓으로 시간을 보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자신의 증폭기가 고장 난 것에 화가 났다. 기계를 흔드는 손길이 거칠었다. 한시우는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원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대지의 진동이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단순한 바람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수천 마리의 말발굽이 땅을 울리는 소리였다. 한시우는 반사적으로 허리의 단검을 움켜쥐었다.
멀리 지평선 너머에서 붉은 점들이 나타났다. 점들은 삽시간에 선이 되어 평원을 가로질렀다. 수천 명의 기사단이 횃불을 들고 진격했다. 불빛은 은빛 풀숲을 핏빛으로 물들이며 다가왔다. 공기가 타오르는 냄새로 변했다.
부족원들이 술렁이며 무기를 들었다. 캠프의 고요함은 순식간에 비명으로 뒤덮였다. 한시우는 레나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바르가스는 겁에 질린 얼굴로 짐을 챙겼다. 그의 손이 덜덜 떨리며 마력석을 바닥에 흘렸다.
횃불의 행렬 선두에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은색 갑옷을 입은 사내가 백마를 타고 있었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었다. 그의 가슴에는 하얀 붕대가 감겨 있었다. 하지만 기세는 이전보다 더욱 흉폭했다. 말의 콧김이 하얗게 흩어졌다.
카시안의 눈동자는 달빛 아래에서 검게 타올랐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가 아니었다. 무언가에 예속된 기계적인 안광이었다. 그는 성소로 향하는 유일한 길목을 봉쇄했다. 기사단의 말발굽 소리가 천둥처럼 대지를 뒤흔들었다.
기사단은 캠프를 반원형으로 에워쌌다. 횃불의 열기가 피부에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카시안이 말을 멈추고 검을 뽑았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공허와 충돌했다. 지직거리는 불꽃이 허공에서 튀었다.
"이방인, 더 이상의 도주는 허용되지 않는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평원에 낮게 깔렸다. 그는 한시우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주변의 기사들이 일제히 창을 세웠다. 한시우의 손등에서 문양이 보랏빛으로 타올랐다. 차가운 살기가 목덜미를 스쳤다.
한시우는 레나를 자신의 등 뒤로 밀었다. 바르가스는 기세에 눌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부족원들은 방어 태세를 갖췄으나 수적 열세였다. 카시안은 망설임 없이 말의 옆구리를 찼다. 흙먼지가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거대한 백마가 한시우를 향해 돌진했다. 카시안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하얀 궤적을 그렸다. 한시우는 바닥을 박차며 공허의 칼날을 꺼냈다. 금속과 마력이 부딪치는 굉음이 새벽을 조각냈다. 고막이 찢어질 듯한 소음이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치는 순간 시선이 얽혔다. 카시안의 눈에는 정의도 고결함도 없었다. 오직 공허한 심연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는 피 묻은 입술을 뒤틀며 검을 밀어 넣었다. 강한 압력이 한시우의 손목을 짓눌렀다.
기사들이 횃불을 던지며 난입했다. 텐트에 불이 붙으며 화염이 치솟았다.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터졌다. 한시우는 카시안의 공격을 받아내며 뒤로 밀렸다. 발바닥이 지면을 긁으며 깊은 고랑을 만들었다.
카시안은 안간힘을 다해 검을 눌렀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그의 상처 입은 가슴에서 검은 연기가 샜다. 성소의 제단에서 보았던 불길한 파장이었다. 한시우는 손톱으로 자신의 손바닥을 더욱 깊게 찔렀다.
고통이 감각을 깨우며 공허의 농도를 높였다. 발밑에서 그림자가 괴물처럼 솟아올랐다. 검은 촉수가 카시안의 말다리를 휘감았다. 말이 비명을 지르며 앞발을 들었다. 카시안의 자세가 흐트러지는 찰나가 생겼다.
한시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가슴을 찼다. 육중한 갑옷 소리와 함께 카시안이 튕겨 나갔다. 지면에 떨어진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일어서는 그의 눈에 검은 안개가 짙어졌다. 기괴하게 꺾인 팔이 스스로 제자리를 찾았다.
기사단이 방랑자들을 무참히 베어 넘겼다. 평원의 은빛 풀들이 붉게 젖어들었다. 한시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포위망은 이미 겹겹이 쌓여 있었다. 달아날 구멍조차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형국이었다.
카시안이 다시 검을 고쳐 쥐고 걸어왔다. 그의 뒤로 수백 명의 궁수가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 소리가 고막을 압박했다. 한시우는 등 뒤에서 떨고 있는 레나의 손을 짧게 움켜쥐었다. 손바닥의 온기가 그녀에게 전달되길 바랐다.
카시안이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한시우를 덮쳤다. 검은 마력이 그의 전신을 감싸며 거대한 괴물의 형상을 만들었다. 공포에 질린 바르가스가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 쥐었다.
"전원, 사살하라."
카시안의 명령이 떨어졌다. 수천 개의 화살이 밤하늘을 가득 메우며 쏟아졌다. 한시우는 손등의 문양을 터뜨리며 앞으로 도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