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축한 이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검은 진흙이 장화를 무겁게 붙들었다. 침식의 늪은 모든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구멍 같았다. 안개 너머에서 들려오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공기를 잘게 흔들었다. 한시우는 무릎을 굽히고 앉아 레나의 손등을 내려다보았다. 가뭄 든 논바닥처럼 갈라진 피부 사이로 핏기 없는 속살이 보였다. 마력 결핍은 아이의 영혼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한시우는 자신의 왼손을 그 위에 겹쳐 잡았다. 심장 깊은 곳에서 차가운 박동이 시작되었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에너지는 온기가 없었다. 오히려 주변의 열기를 모두 잡아먹는 진공에 가까웠다. 손바닥이 맞닿은 지점부터 검은 줄기가 뻗어 나갔다. 잉크가 물에 번지듯 레나의 하얀 팔 위로 기괴한 혈관이 돋아났다. 아이의 어깨가 짧게 떨렸다. 차가운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감각에 레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공허의 기운이 아이의 빈 마나 회로를 강제로 메웠다. 거칠던 호흡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갈라졌던 피부의 틈새가 검은 막으로 덮이며 아물기 시작했다. 한시우는 검지 손톱으로 자신의 손등을 가늘게 긁었다. 타인의 생명에 개입한다는 감각은 언제나 뒷맛이 썼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자 레나가 힘겹게 눈을 떴다. 아이의 눈동자 주변에 검은 잔흔이 남았으나 생기는 돌아와 있었다.
"저, 저기… 고맙습니다."
레나가 떨리는 목소리로 작게 속삭였다. 한시우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춤에 묻은 진흙을 털어내는 손길이 무심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생존자가 꺼져가는 것을 방치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는 주머니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 레나에게 던졌다. 상처를 가리라는 무언의 지시였다. 레나는 주춤거리며 천을 받아 손등을 정성스럽게 감쌌다.
"이런 곳에 쥐새끼들이 숨어 있었군."
걸걸한 목소리가 안개를 뚫고 날아왔다. 한시우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의 단검 손잡이에 손을 올렸다. 맥박은 여전히 고요했다. 안개 속에서 비대한 실루엣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가죽 코트를 걸친 사내가 씹던 껌을 바닥에 뱉었다. 그의 가슴팍에는 상인 연맹 도시 루카의 문장이 새겨진 배지가 달려 있었다. 사내의 시선은 한시우의 목덜미 부근에 머물렀다. 옷깃 사이로 살짝 드러난 이방인의 낙인이 그의 눈을 번뜩이게 했다.
사내의 이름은 바르가스였다. 그는 암시장에서 잔뼈가 굵은 밀매업자였다. 바르가스의 오른팔에는 투박한 금속 장치가 장착되어 있었다. 구리색 전선이 복잡하게 얽힌 그것은 마력 증폭기였다. 일반적인 규격보다 훨씬 크고 표면에는 해독할 수 없는 고대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증폭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비릿한 금속음이 정적을 깨뜨렸다. 바르가스는 입술을 핥으며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방인 말살령. 모르는 건 아니겠지?"
바르가스의 목소리에 탐욕이 섞여 있었다. 그는 한 발짝 다가오며 증폭기의 다이얼을 돌렸다. 위잉 하는 기계음이 고막을 긁었다. 레나는 겁에 질려 한시우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아이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시우는 레나를 자신의 등 뒤로 완벽하게 가렸다. 그의 눈동자는 메마른 우물처럼 아무런 감정도 비추지 않았다. 건조한 표정은 상대의 기세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었다.
"빙의자 놈의 목값은 마력석 천 개짜리지. 얌전히 굴라고."
바르가스가 단검 끝으로 한시우를 가리켰다. 그의 머릿속은 이미 마력석을 어떻게 처분할지에 대한 계산으로 가득했다. 루카의 암시장에서 천 개면 작은 상단 하나를 차릴 수도 있는 거금이었다. 그는 증폭기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단검에 주입했다. 날붙이 주변으로 푸르스름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레나가 주머니에서 작은 마력석 조각을 꺼내 바르가스 쪽으로 던지려 했다.
"그거… 이거 드릴 테니까 그냥 가세요!"
레나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바르가스는 코웃음을 치며 발로 마력석 조각을 짓밟았다. 값싼 하급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태도였다. 한시우는 아이의 어깨를 살짝 눌러 제자리에 앉혔다. 그는 바르가스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기를 뽑지도, 자세를 낮추지도 않았다. 그저 산책하듯 평온한 움직임이었다. 바르가스의 미간에 얕은 주름이 잡혔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불쾌감이 치밀어 오른 모양이었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마력 회로가 뒤틀리는 고통을 보여주마."
바르가스가 팔을 휘둘렀다. 증폭기에서 방출된 마력이 채찍처럼 허공을 갈랐다. 한시우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공격을 흘려보냈다. 등 뒤의 고목이 맥없이 꺾이며 진흙탕 속으로 처박혔다. 공격은 매서웠으나 한시우의 시선은 줄곧 사내의 오른팔에 고정되어 있었다. 고대 유물의 기운이 느껴지는 그 장치는 불안정한 진동을 내뿜고 있었다. 마력의 흐름이 불규칙하게 소용돌이치는 지점이 보였다.
한시우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바르가스가 경악하며 단검을 내질렀으나 허공만 갈랐다. 한시우의 움직임은 물리적인 속도를 넘어선 것처럼 기묘했다. 그는 바르가스의 오른팔, 즉 마력 증폭기의 핵심부로 손을 뻗었다. 바르가스는 코웃음을 쳤다. 마력 증폭기를 맨손으로 만지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강력한 마력 반동이 상대의 손을 찢어놓을 것이라 확신했다.
"멍청한 놈, 그게 어떤 물건인 줄 알고!"
바르가스의 외침이 늪지대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한시우의 손바닥이 금속 표면에 닿는 순간, 공기가 얼어붙었다. 한시우의 눈동자가 깊은 심연처럼 검게 물들었다. 그의 손끝에서 시작된 공허의 파동이 증폭기의 내부로 침투했다. 그것은 마력을 흡수하는 것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를 지워버리는 소멸의 기운이었다. 증폭기 표면의 고대 문자들이 붉게 달아오르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기계 장치 내부에서 톱니바퀴가 어긋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바르가스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자신의 생명줄과도 같은 증폭기가 통제를 벗어나고 있었다. 내부의 마력이 역류하며 바르가스의 혈관을 타격했다. 그는 팔을 떼어내려 했으나, 한시우의 손은 자석처럼 증폭기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한시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번졌다.
"이게 네가 믿는 힘인가?"
한시우의 나지막한 물음과 함께 증폭기에서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고대 유물은 이질적인 에너지의 유입을 견디지 못하고 과부하 상태에 빠졌다. 장치 틈새로 불꽃이 튀며 바르가스의 코트를 태웠다. 사내의 눈동자가 극심한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팔에서 느껴지는 기괴한 진동과 열기에 비명을 지르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한시우가 손에 힘을 주자 증폭기의 외피가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바르가스는 바닥에 주저앉아 자신의 팔을 붙잡고 몸부림쳤다. 증폭기는 이제 흉측한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한시우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구겨진 금속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 조각에는 고대 제국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레나에게 다가갔다. 레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자. 아직 볼일이 남았어."
한시우는 레나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진흙탕에 처박힌 바르가스는 흐릿해지는 시야 속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 사내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가슴팍의 무전기를 더듬었다. 하지만 무전기 역시 공허의 기운에 노출되어 검게 타버린 뒤였다. 한시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안개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의 가슴속에서 세계수 에르드의 파장과 공명하는 기묘한 진동이 다시금 느껴졌다.
늪을 빠져나온 그들 앞에 거대한 협곡의 입구가 나타났다. 금지된 협곡이라 불리는 그곳에서는 차원의 균열이 수시로 발생했다. 한시우는 협곡 너머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마력의 농도를 감지했다. 그것은 자신을 이곳으로 던져 넣었던 평의회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 끝을 만지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복수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고, 사냥감들은 여전히 고지대의 낙원에서 안온함을 누리고 있었다.
"저기, 한시우 님… 팔이 이상해요."
레나가 자신의 팔목을 가리키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이의 팔에 새겨진 검은 혈관들이 기괴한 박동을 내며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마력 주입의 결과가 아니었다. 공허의 기운이 아이의 생명력과 결합하여 새로운 형태의 마나 회로를 구축하고 있었다. 한시우는 멈춰 서서 레나의 팔을 유심히 살폈다.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이전에 없던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순간, 협곡 상공에서 거대한 비행선 한 척이 구름을 가르며 나타났다. 엘리시온 왕국의 문장이 선명하게 박힌 함선이었다. 함선 하부의 포문이 열리며 지상을 향해 탐조등을 비추기 시작했다. 한시우는 레나를 뒤로 밀치며 단검을 거꾸로 쥐었다. 빛의 기둥이 그들의 발치를 훑고 지나갔다. 함선에서 웅장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고, 수십 명의 기사들이 로프를 타고 하강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의 선두에는 은색 갑옷을 입은 남자가 서 있었다. 카시안 폰 엘리시온이었다. 그는 우아한 동작으로 지면에 착지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카시안의 시선이 한시우의 눈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처럼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카시안은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으나, 그의 검 끝은 한시우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결국 살아남았구나, 가여운 제물이여."
카시안의 목소리가 협곡에 부드럽게 울려 퍼졌다. 한시우는 대답 대신 자신의 가슴을 손으로 짚었다. 심장 내부의 공허가 카시안의 마력에 반응하며 사납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레나의 손을 더 세게 쥐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고, 눈앞의 적은 아르카디아에서 가장 강력한 기사 중 한 명이었다. 한시우는 발끝에 힘을 주며 땅을 박차고 나갈 준비를 마쳤다.
"네가 죽어야 이 세계가 유지된다. 그것이 신의 뜻이지."
카시안의 검에서 눈부신 백색 오러가 뿜어져 나왔다. 한시우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공허 마력을 폭발시켰다. 검은 장막이 그의 주변을 감싸며 백색의 빛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 두 힘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공간이 뒤틀리며 굉음이 발생했다. 한시우는 카시안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기묘한 검은 그림자를 발견했다. 그것은 정의로운 왕자의 눈에 깃들 수 없는 불길한 징조였다.
한시우는 카시안의 검격을 향해 맨몸으로 돌진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무모함이 아니었다. 상대를 확실히 죽일 수 있다는 냉혹한 확신에서 비롯된 움직임이었다. 카시안의 검이 한시우의 어깨를 스치며 피를 뿌렸다. 하지만 한시우의 손은 이미 카시안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공허의 기운이 기사의 은색 갑옷을 부식시키며 파고들었다.
카시안의 미소가 일순간 무너졌다. 그는 자신의 갑옷을 뚫고 들어오는 차가운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한시우는 그의 귓가에 대고 낮게 읊조렸다.
"신은 이미 죽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