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라라가 던진 계약서가 엔진의 불꽃 속에서 재가 되어 흩어졌다. 세라의 심장 부근에 새겨진 붉은 낙인이 검게 타올랐다. 그녀의 숨소리가 거칠게 꺾이며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손가락 끝에서 시작된 나무껍질 같은 균열이 팔꿈치까지 타고 올라왔다. 살점이 갈라지는 소리가 건조한 목재 뒤틀리는 소음과 섞였다. 카이는 떨리는 손으로 세라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의 체온은 이미 생명체의 그것이 아니었다. 차가운 금속과 딱딱한 고목의 감촉만이 손바닥을 찔렀다.
엘라라는 그 광경을 보며 소리 없이 입매를 비틀었다. 그녀의 구두 굽이 강철 바닥을 울리며 멀어져 갔다. 카이는 세라를 고쳐 업고 무너져 내리는 엔진실을 달렸다. 등 뒤에서 폭발하는 공명 에너지가 고막을 찢을 듯 울부짖었다. 그는 안개의 절벽 깊숙한 곳에 숨겨진 무언의 수도원을 향했다. 그곳에는 도시의 탄생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정화의 힘이 있었다. 세라의 목덜미를 타고 번진 검은 얼룩이 이제 턱 끝까지 차올랐다. 불협화음의 독기가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다.
안개는 눅눅한 이끼 냄새와 녹슨 철의 비린내를 머금고 있었다. 수도원의 육중한 돌문 앞에 도달했을 때 카이의 숨은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문을 지키던 수도사들이 소리 없이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들은 눈을 가린 채 오직 진동만으로 침입자의 무게를 가늠했다. 카이는 세라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가슴팍에서 들리는 메트로놈 소리가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태엽이 다 감긴 오르골처럼 불길한 정적이 다가오고 있었다.
수도사들의 수장이 지팡이로 바닥을 세 번 내리쳤다. 그 진동이 카이의 발바닥을 타고 뇌수까지 전해졌다. 그들은 카이에게 거대한 홀의 벽면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메트로놈 시티의 진실이 거대한 벽화로 기록되어 있었다. 도시는 거대한 악기가 아니라 에너지를 정제하는 공장이었다. 시민들의 슬픔과 고통을 음계로 치환해 뽑아내는 거대한 압착기였다. 세라가 겪어온 모든 지옥은 도시를 돌리기 위한 연료에 불과했다.
카이는 벽화를 응시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고 어금니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 수도사들은 세라를 구하기 위해 순수의 음계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인 목소리를 제물로 삼아야만 발현되는 힘이었다. 수도사 중 한 명이 은색 침이 가득 박힌 성배를 내밀었다. 그것을 마시는 순간 카이는 다시는 소리를 낼 수 없게 될 것이었다. 평생을 농담과 콧노래로 버텨온 그에게 그것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세라가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몸을 뒤틀었다. 그녀의 피부 아래에서 가느다란 현들이 살을 뚫고 솟아났다. 악기화 현상이 중추 신경계까지 침범하기 시작한 증거였다. 카이는 그녀의 굳어버린 손을 제 뺨에 가져다 댔다. 거친 나무 질감이 피부를 긁었지만 그는 피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부유하고 있었다. 그 맑았던 눈동자마저 금속성 회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카이는 주저 없이 성배를 들어 올렸다. 은색 침들이 그의 입술과 혀를 사정없이 찔러왔다. 비릿한 혈향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 가슴을 태웠다. 내 목소리 따위 그녀가 다시 노래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가져가. 그는 속으로 외치며 차가운 액체를 단숨에 들이켰다. 성대가 타들어 가는 고통에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으나 소리가 되지 못했다. 입을 벌려도 오직 마른 바람 소리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사라진 자리에 순백의 공명파가 소용돌이쳤다. 수도원의 천장에서 황금빛 줄기들이 쏟아져 내려 세라를 감쌌다. 그녀의 피부를 뒤덮었던 검은 얼룩들이 비명을 지르며 증발했다. 타들어 가던 불협화음의 상처 위로 매끄러운 광택이 흐르기 시작했다. 카이는 목을 움켜쥐고 바닥을 굴렀다. 성대가 물리적으로 소멸하는 감각은 영혼을 도려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는 시선을 세라에게서 떼지 않았다.
세라의 몸이 공중에 떠오르며 기괴한 변주를 시작했다. 그녀의 등 근육이 뒤틀리며 뼈 마디가 밖으로 돌출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기형이 아니라 정교하게 설계된 구조물의 형태였다. 척추를 중심으로 좌우로 뻗어 나간 골격 위로 금속관들이 돋아났다. 수십 개의 파이프가 층을 이루며 거대한 날개의 형상을 갖추어 갔다. 메트로놈 엔진 설계도 구석에 그려져 있던 정체불명의 완성형이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실내임에도 파이프 속으로 공기가 드나들었다. 장엄하면서도 서늘한 파이프 오르간의 저음이 사방을 진동시켰다. 세라의 감겨 있던 눈이 번쩍 뜨이며 황금빛 안광을 내뿜었다.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거대한 날개가 수도원의 벽을 부술 듯 확장되었다. 카이는 피 섞인 침을 삼키며 그 압도적인 광경을 올려다보았다. 세라는 이제 인간도 악기도 아닌 도시 그 자체가 되어 있었다.
세라가 천천히 바닥으로 내려와 카이의 앞에 섰다. 그녀의 등 뒤에서 돋아난 파이프들이 미세하게 떨리며 조율음을 냈다. 카이는 말 대신 손을 뻗어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힘이 빠진 손가락은 허공을 가르며 바닥을 긁었다. 세라의 시선이 카이의 피투성이가 된 입술에 머물렀다. 그녀는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가늘게 떨며 손을 뻗었다. 차가운 금속 날개가 카이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수도원의 공명 장치들이 세라의 존재에 반응해 일제히 맥동했다. 도시 전체를 지탱하는 메트로놈의 주기가 그녀의 심박수와 일치했다. 이제 그녀의 숨결 한 번에 도시의 동력이 꺼지고 켜질 판이었다. 카이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의 품에서 의식을 잃어갔다. 세라는 날개를 더욱 넓게 펼쳐 수도원의 천장을 완전히 걷어냈다. 쏟아지는 달빛 아래서 그녀의 황금빛 날개가 기괴한 선율을 연주했다.
멀리 메트로놈 시티의 중앙 타워가 그녀의 부름에 응답하듯 빛났다. 빅토르 의원의 집무실 창문이 강력한 진동에 산산조각이 났다. 엘라라가 머물던 대기실의 거울들도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파편이 되었다. 세라는 카이를 품에 안은 채 공중으로 천천히 솟구쳤다. 그녀의 등 뒤에 달린 거대한 파이프들이 도시 전체를 향해 포신처럼 겨누어졌다. 복수의 서곡이 무음의 공간을 찢고 장엄하게 울려 퍼졌다.
세라의 손가락 끝이 허공을 튕기자 보이지 않는 건반이 눌렸다. 도시의 하층부를 받치던 거대 기어들이 역회전을 시작했다. 건물의 외벽들이 악보가 넘어가듯 기괴하게 뒤틀리며 재조립되었다. 카이의 희생으로 얻은 순수의 음계는 파괴의 선율로 변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조율사가 아니었다. 무너진 세상을 다시 연주할 단 하나의 지휘자였다. 세라는 입술을 달싹여 소리 없는 맹세를 카이의 귓가에 새겼다.
그녀의 등 뒤에서 뻗어 나온 가장 긴 파이프가 붉게 달아올랐다. 응축된 공명 에너지가 도시의 밤하늘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유리 성당의 첨탑이 그 일격에 힘없이 꺾여 나갔다. 비명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 속에서 파멸의 연주가 이어졌다. 세라는 자신의 심장 박동을 메트로놈 엔진의 과부하 주기에 맞췄다. 도시의 심장부가 그녀의 의지에 따라 불규칙한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카이의 감겨진 눈꺼풀 위로 세라의 눈물이 한 방울 떨어졌다. 차가운 결정체가 된 눈물은 그의 뺨에서 보석처럼 굳어졌다. 세라는 그를 안전한 석상 뒤에 뉘어두고 홀로 하늘 높이 올랐다. 그녀의 날개가 한 번 크게 휘둘러질 때마다 도시의 구역 하나가 정전으로 암흑에 잠겼다. 빛을 잃은 메트로놈 시티는 거대한 무덤처럼 보였다. 세라는 마지막 남은 에너지의 정점을 향해 날개의 출력을 높였다.
유리 성당의 잔해 위로 엘라라의 일그러진 얼굴이 비쳤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세라가 내뿜는 거대한 오르간 소리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완벽을 추구하던 연주자의 손가락은 이제 썩은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떨렸다. 세라는 공중에서 그녀를 내려다보며 날개의 파이프를 일제히 개방했다.
도시 전체의 공명 결정들이 세라의 날개 끝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빛의 구체가 그녀의 등 뒤에서 태양처럼 타올랐다. 그것은 구원이자 심판이었으며 가장 잔혹한 예술의 완성이었다. 카이가 남긴 마지막 숨결이 세라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요동쳤다. 그녀는 자신의 영혼을 건반 삼아 마지막 화음을 내리눌렀다. 온 세상을 하얗게 지워버릴 압도적인 진동이 도시의 모든 신경망을 타고 흘러들었다.
세라의 날개에서 뿜어져 나온 황금빛 파동이 지면을 휩쓸었다. 모든 기계 장치가 멈추고 인간들의 심장 박동만이 유일한 소음으로 남았다. 빛의 폭풍 속에서 세라의 형체는 점점 더 거대하고 비현실적으로 변해갔다. 그녀의 피부는 이제 완전한 금속의 광택을 띠며 인간의 흔적을 지웠다. 오직 슬픔을 가득 머금은 황금빛 눈동자만이 카이가 있던 자리를 향했다.
빛이 잦아든 자리에는 정적만이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세라의 등 뒤에 돋아났던 날개는 이제 도시를 지탱하는 거대한 기둥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의 신체 일부가 메트로놈 엔진의 핵심 부품들과 융합되어 거대한 탑을 이루었다. 카이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손을 뻗었지만 만져지는 것은 차가운 금속 벽뿐이었다. 그는 목을 쥐어짜며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마른 기침만이 튀어나왔다.
벽면 너머에서 미세한 진동이 카이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그것은 세라가 보내는 마지막 조율의 신호였다. 도시의 모든 조명이 일제히 푸른빛으로 점멸하며 새로운 체계의 시작을 알렸다. 카이는 그 벽에 이마를 맞대고 세라의 박동을 느꼈다. 그녀는 죽지 않았다. 메트로놈 시티 그 자체가 되어 영원히 이 땅을 조율하고 있었다. 카이는 품 안에서 세라가 남긴 낡은 튜닝 포크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소리 없는 눈물을 닦아내고 튜닝 포크를 바닥에 가볍게 튕겼다. 그가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가 정적을 뚫고 맑게 울려 퍼졌다. 세라의 탑이 그 진동에 반응해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두 사람만의 비밀스러운 합주가 폐허가 된 도시 위로 흐르고 있었다. 카이는 다시는 말할 수 없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탑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세라의 거대한 날개 형상을 한 탑 꼭대기에서 섬광이 번쩍였다. 잠시 멈췄던 도시의 메트로놈이 이전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박자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지배자의 행진곡이 아닌 평범한 이들의 심장 소리를 닮아 있었다. 카이는 탑의 심장부를 향해 계단을 오르며 등에 멘 연장 가방을 고쳐 멨다. 이제 그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는 탑의 중심부에 놓인 거대한 황금빛 결정체 앞에 멈춰 섰다. 결정체 안에는 세라가 평온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연결된 수만 개의 파이프가 도시 곳곳으로 생명의 박동을 전달하고 있었다. 카이는 결정체 위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껌 한 개를 꺼내 입에 넣고 천천히 씹기 시작했다.
갑자기 탑 외부에서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비명이 들려왔다. 빅토르 의원이 보낸 최후의 집행관들이 탑의 방어막을 뚫고 들이닥치고 있었다. 카이는 껌을 뱉어내고 바닥에 놓인 거대한 렌치를 집어 들었다. 그의 눈빛은 이전의 능청스러움 대신 날카로운 살의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잠든 세라를 등 뒤로 가로막으며 침입자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