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없이는 내 연주가 완성되지 않아. 넌 내 가장 완벽한 부품이잖아."
엘라라가 세라의 멱살을 움켜쥐고 차가운 대리석 벽으로 밀어붙였다.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이 뺨에 닿았다. 세라는 등 뒤로 전해지는 벽의 서늘한 감각보다 엘라라의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떨림에 집중했다. 공포였다. 대중의 태양이라 불리는 연주자가 느낄 수 없는, 밑바닥의 비릿한 두려움이 세라의 피부를 타고 전해졌다.
텅 빈 공연장의 음향 반사판이 두 여자의 거친 숨소리를 증폭시켰다. 기괴하게 뒤틀린 소음이 천장을 맴돌다 바닥으로 추락했다. 세라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비린 혈향이 입안을 감돌자 흐릿했던 감각이 선명해졌다. 나무껍질처럼 굳어버린 손가락 마디가 벽면을 긁으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부품이라니. 그 부품이 없어서 무대 위에서 비명을 지를 뻔한 건 너잖아."
세라의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엘라라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세라의 굳어버린 손가락을 혐오스러운 오물을 보듯 내려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완벽하게 연출된 고결한 예술가의 가면 아래로 추악한 본성이 비어져 나왔다.
"이 꼴을 봐. 이제 손가락도 제대로 못 움직이는 폐기물 주제에.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이 지옥에서 꺼내줄 거라 생각하니?"
엘라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세라의 호흡이 막혔지만 그녀는 오히려 눈을 가늘게 떴다. 엘라라의 목 근처 맥박이 불규칙한 박자로 뛰고 있었다. 무대 위에서의 완벽한 크레센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오직 자신의 추악한 진실이 들통날까 전전긍긍하는 삼류 연주자의 불협화음만이 공간을 채웠다.
엘라라는 세라의 얼굴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향수 냄새 뒤로 역겨운 탐욕의 향이 풍겼다.
"다시 돌아와, 세라. 원로원에는 내가 잘 말해줄게. 조율 수치가 조금 어긋났던 건 내 실수였다고, 네가 필요하다고 하면 그들도 널 폐기하지 못해. 넌 다시 내 전용 조율사가 되는 거야. 무대 뒤 어둠 속에서, 오직 나만을 위해 네 신경을 바치는 거지."
회유였다. 아니, 그것은 굶주린 짐승이 먹이를 달래는 소리에 가까웠다. 세라는 엘라라의 눈속에서 일렁이는 절박함을 읽었다. 세라가 없으면 엘라라는 다음 연주회에서 쏟아질 불협화음을 감당할 수 없다. 공명 분산 능력이 없는 연주자는 결국 자신의 공명력에 먹혀 악기화 현상으로 소멸할 운명이었다.
세라는 천천히 고개를 떨구며 힘을 뺐다. 엘라라의 제안이 자신을 영원히 노예로 묶어두려는 수작임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흔들리는 척을 해야 했다. 세라는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정말… 나를 구해줄 거야?"
엘라라의 입가에 승리감에 도취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자애로운 여신처럼 세라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 손길이 닿는 곳마다 소름이 돋았지만 세라는 참아냈다. 대신 굳어버린 오른손을 천천히 뻗어 엘라라의 뒤편에 놓인 피아노 건반 위로 가져갔다.
손가락 끝은 이미 감각이 마비되어 목재처럼 딱딱했다. 하지만 그 갈라진 틈 사이로 카이가 건네준 작은 금속 조각이 숨겨져 있었다. 공명 분산 침이었다. 세라는 엘라라가 자신의 연약한 연기에 도취해 방심한 틈을 놓치지 않았다.
손가락 마디를 억지로 꺾자 뼈가 어긋나는 비명 같은 소리가 났다. 세라는 고통을 집어삼키며 건반 사이의 좁은 틈새로 침을 밀어 넣었다. 금속이 피아노의 향판에 닿는 순간, 미세한 진동이 세라의 손목을 타고 뇌장까지 전달되었다.
"물론이지. 넌 내 가장 소중한 악기니까."
엘라라가 속삭였다. 그녀는 세라의 손이 피아노에 닿아 있는 것을 그저 과거의 그리움이라 착각하는 모양이었다. 세라는 피아노 내부의 현이 침과 반응하며 내는 기분 나쁜 공명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이제 이 피아노는 엘라라의 명령을 듣지 않을 것이다.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침은 엘라라의 모든 공명력을 역류시켜 그녀의 신경계로 되돌려 보낼 테니까.
그때였다. 폐쇄된 공연장의 육중한 철제 셔터 너머에서 거친 기계음이 들려왔다.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불꽃이 튀더니, 철통같던 보안 시스템의 붉은 경고등이 일제히 꺼졌다.
"어이, 거기 언니들. 수다는 적당히 하고 나오지?"
경쾌한 목소리와 함께 셔터가 위로 말려 올라갔다. 어둠이 깔린 복도 끝에서 카이가 한 손에는 해킹 단말기를, 다른 한 손에는 껌통을 든 채 서 있었다. 그는 휘파람을 불며 공연장 내부로 걸어 들어왔다.
"분위기 살벌하네. 조율사님, 퇴근 시간 지났어."
카이의 등장에 엘라라가 비명을 지르며 세라를 밀쳐냈다. 세라는 비틀거리며 피아노에서 손을 떼어냈다. 바닥에 주저앉은 세라의 시야에 피아노 향판 밑바닥에서 붉게 점멸하기 시작한 작은 빛이 들어왔다. 심어둔 침이 데이터를 전송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저 무공명자 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
엘라라가 분노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소리쳤다. 그녀가 손을 뻗어 공명력을 끌어올리려 했지만, 공연장 전체의 전력이 차단되며 가동되던 공명 가속기가 멈춰 섰다. 카이가 미리 손을 써둔 모양이었다.
카이는 빠르게 다가와 세라의 허리를 낚아채듯 부축했다. 그는 세라의 굳어버린 손가락을 힐끗 보더니 혀를 찼다.
"몰골 봐라. 이래서 내가 클래식 하는 인간들이랑은 안 논다니까."
카이는 그대로 세라를 이끌고 열린 셔터 문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엘라라의 광기 어린 목소리가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세라!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 도시 끝까지 쫓아가서 널 잡아 올 거야! 네 사지를 잘라서라도 내 피아노 옆에 박아두겠어! 넌 절대 인간으로 죽지 못해! 내 완벽한 악기가 되어 평생 비명이나 지르게 해주지!"
탈출하는 세라의 등 뒤로 거대한 불협화음이 폭발하듯 울려 퍼졌다. 엘라라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건반을 내리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소리는 예전처럼 맑지 않았다. 침에 의해 뒤틀린 소음은 마치 짐승의 단말마처럼 들렸다.
복도로 빠져나온 세라는 카이의 어깨에 기댄 채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피아노에서 손을 뗄 때, 부서진 건반의 상아 조각 하나가 살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세라는 피가 배어 나오는 손바닥을 꽉 쥐었다.
날카로운 통증이 신경을 자극했지만, 세라는 오히려 입가에 차가운 미소를 띠었다. 손바닥에 박힌 이 작은 조각이 엘라라의 화려한 왕국을 무너뜨릴 첫 번째 파편이 될 것임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세라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