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는 벽면의 거대한 기록화 앞에 멈춰 섰다. 그것은 기록이라기보다 잔혹한 예언서에 가까웠다. 거대한 파동이 대지를 짓누르는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사람들이 귀를 막은 채 쓰려져 갔다. 메트로놈 시티가 건설되기 전의 풍경이었다. 인류가 자연의 소리를 통제하려다 맞이한 재앙이었다. 대공명 재앙의 참혹한 현장이 벽면에 박제되어 있었다.
카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손을 뻗었다. 차가운 벽면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전해졌다. 그림 속의 선율은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었다. 그것은 비명이며 동시에 거대한 파괴의 전조였다. 카이의 눈동자가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입안에서 굴리던 껌을 짓씹으며 벽화를 훑었다.
우리가 음악이라 믿었던 것들은 사실 자연의 비명을 억누르는 소음이었어.
카이가 허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이 그림 옆에 적힌 고대 음계에 머물렀다. 도시의 조화로운 법령은 이 재앙을 가리기 위한 가림막이었다. 완벽한 연주는 고통의 소리를 덮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세라가 그 곁으로 다가와 벽화를 응시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계적인 광택을 띠며 빛났다.
세라는 자신의 손바닥을 벽화 위에 겹쳤다. 거친 돌의 질감이 손등의 굳어버린 피부와 맞닿았다. 차가운 기운이 혈관을 타고 어깨까지 올라왔다. 그녀는 입술을 강하게 깨물어 통증을 확인했다. 비릿한 혈향이 입안으로 번지자 정신이 맑아졌다.
어둠 속에서 서늘한 기척이 일렁였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는 기이한 움직임이었다.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형체들이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그들은 발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두 사람을 에워쌌다. 무음의 수도사들이었다. 그들의 얼굴이 있어야 할 곳에는 매끄러운 가면뿐이었다.
수도사 하나가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공기가 순식간에 진공 상태로 변하며 먹먹해졌다. 소리가 사라진 공간은 고통스러운 압박감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소리가 세상의 균형을 깨뜨리는 악이라 믿었다. 그들에게 세라의 존재는 거대한 불협화음의 근원이었다.
세라의 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영체가 미세하게 흔들리며 형태가 일그러졌다. 수도사들이 내뿜는 무음의 파동이 세라를 짓눌렀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소멸의 위협 앞에 놓였다. 카이가 단검을 꺼내 들며 세라의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칼날은 허공을 가를 뿐 아무것도 베지 못했다.
단검이 허공을 긁으며 쇳소리를 냈다. 카이의 콧등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낮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려 했으나 숨이 막혔다. 수도사들이 내뿜는 정적이 폐부를 조여 왔다. 세라의 손가락 끝에서 나무껍질 같은 균열이 번졌다. 악기화 현상이 평소보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수도사들의 권능이 공간의 모든 진동을 지워버렸다. 세라의 몸이 투명하게 변하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무릎이 바닥에 닿는 충격조차 소리가 되지 못했다. 절대적인 고요가 공포보다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카이가 세라의 어깨를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은 연기처럼 세라의 몸을 통과했다. 세라의 눈동자에서 생기의 빛이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수도사들은 더욱 촘촘하게 포위망을 좁혀 왔다. 그들의 손끝에서 정적의 칼날이 푸르게 빛났다.
세라의 영체가 모래알처럼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의식이 먼 곳으로 멀어지는 환각이 보였다. 유리 성당의 차가운 바닥이 떠올랐다. 피아노 건반과 신경이 연결되던 감각이 되살아났다. 엘라라의 화려한 드레스 자락이 눈앞을 스쳤다. 고통스러웠던 그날의 기억이 거대한 파동으로 변했다.
세라의 가슴 중앙에서 둔탁한 울림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심장 박동보다 빠르고 강렬한 진동이었다. 그녀의 굳은 손가락 마디가 제멋대로 꺾였다. 관절이 뒤틀릴 때마다 기괴한 기계음이 고요를 찢었다. 저장고 중앙의 거대한 구조물이 반응하며 진동했다.
먼지에 쌓여 있던 태초의 건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수천 개의 신경선이 얽힌 기괴한 형태였다. 세라의 파동이 건반의 깊은 곳을 건드렸다. 멈춰 있던 기계 장치가 거대한 구동음을 내뱉었다. 바닥의 돌들이 공명하며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의 무음 장벽이 단숨에 깨져 나갔다. 거대한 건반이 주인을 만난 것처럼 스스로 움직였다.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은 건반이 연주를 시작했다. 그것은 도시의 어떤 악보에도 기록되지 않은 선율이었다. 세라의 흐릿하던 영체가 강렬한 빛을 내뿜으며 응집했다.
건반의 움직임은 세라의 신경계와 완벽히 동기화되었다. 땅바닥을 구르던 세라의 손가락이 건반의 박자에 맞춰 경련했다.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치켜 올라갔다. 눈동자에는 초점 대신 푸른 공명광이 가득 찼다.
세라, 정신 차려!
카이의 외침이 거대한 연주 소리에 묻혀 흩어졌다. 세라는 감긴 눈을 뜨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가락 끝이 보이지 않는 건반을 내리눌렀다. 허공에서 묵직한 베이스 음이 터져 나오며 파동이 일었다. 수도사들의 가면 위로 가느다란 금이 가기 시작했다.
세라의 등 뒤로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의 환영이 솟구쳤다. 그것은 그녀의 신경 다발이 거대하게 확장된 형태였다. 은빛 선들이 허공을 수놓으며 수도사들의 몸을 칭칭 감았다. 정적을 강요하던 자들이 오히려 소음의 감옥에 갇혔다. 세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바닥이 음계 모양으로 갈라졌다. 카이는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라의 손가락 끝에서 떨어진 나무 파편들이 노래를 불렀다. 그것은 복수를 갈망하는 죽은 조율사들의 통곡이었다. 세라는 가장 높은 옥타브를 향해 팔을 휘둘렀다.
폭발적인 굉음과 함께 저장고의 천장이 무너져 내렸다. 무음의 수도사들이 가루가 되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세라의 시선은 무너진 틈 사이로 보이는 고층 빌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엘라라가 서 있을 화려한 유리 성당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이 기괴한 각도로 꺾이며 허공을 긁었다.
카이는 전율하며 자신의 단검을 갈무리했다. 그는 세라의 낯선 뒷모습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세라의 피부 위로 돋아난 가시들이 차가운 금속음을 냈다. 그녀는 이제 인간의 숨소리가 아닌 기계의 파동으로 호흡했다.
"가자, 엘라라가 기다리는 무대로."
세라가 뒤를 돌아보며 카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의 손바닥 한가운데에는 6번 건반의 각인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카이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차가운 기계 손을 맞잡았다.
"너, 지금 네 심장 소리 들려?"
카이의 물음에 세라는 대답 대신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흉부 안쪽에서 메트로놈의 규칙적인 태엽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살아있는 생명의 박동이 아닌, 도시를 멈추기 위한 카운트다운이었다. 세라는 망설임 없이 암시장의 비밀 통로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골목 끝에서 붉은 제복을 입은 집행관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의 손에는 공명 억제용 사슬이 흉측하게 감겨 있었다. 세라는 그들을 향해 무너진 건반의 파편을 겨누었다.
"전부 찢어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