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지 섞인 바람이 폐허를 휩쓸었다. 백색 탑의 잔해가 짐승의 뼈처럼 드러났다. 태윤은 가슴을 짓누르는 압박에 상체를 굽혔다. 손바닥 아래의 콘크리트 조각이 살을 파고들었다. 통증은 무뎠으나 감각은 서늘하게 살아 있었다. 가슴속 펜던트가 얼음처럼 차가운 진동을 내뿜었다.
지지직거리는 기계음이 고막을 긁어댔다. 잔해 틈에서 솟아오른 의장의 그림자가 일렁였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기괴한 모습이었다. 관절마다 맞물린 금속 부품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계획대로라니.
태윤은 피가 섞인 침을 바닥에 뱉어냈다.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감각에 호흡이 가늘어졌다. 펜던트 너머로 하진의 희미한 맥동이 전해졌다. 서늘하고도 위태로운 박동이 손끝을 타고 흘렀다. 하진이 사라지기 직전 남긴 입모양이 망막을 맴돌았다.
도망쳐.
환청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발목에 납덩이라도 매단 듯 몸이 무거웠다. 뒤틀린 영맥의 흐름이 대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산소 대신 탁한 영기가 폐부 깊숙이 박혔다.
구두 굽이 지면을 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규칙적이고 건조한 금속음이 폐허에 울렸다. 폐허의 그림자 사이로 붉은 완장을 찬 무리가 보였다. 성역 센터의 정예 퇴마사들이 기괴한 옷차림을 했다. 제복 위에 새겨진 표식은 선혈처럼 붉게 타올랐다.
신인류 정화군.
관리국의 통제를 벗어나 폭주하는 과격파였다. 중심에 선 사내가 태윤을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았다. 사내의 눈동자는 감정이 거세된 상태였다. 오직 영석의 푸른 빛만이 그 안에서 번득였다.
귀신의 파동이 느껴지는군.
사내의 거친 손이 태윤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악력에 숨이 턱 막히며 시야가 흔들렸다. 태윤은 가슴팍의 펜던트를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손등에 새겨진 검은 낙인이 맥동하며 경련을 일으켰다. 수명을 갉아먹는 대가가 전신을 타고 진동했다.
이건 단순한 유품이 아니야.
사내의 시선이 태윤의 손아귀에 머물렀다. 그는 태윤의 손가락을 하나씩 비틀어 꺾었다.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고요한 공기를 찢었다. 태윤은 입술을 말아 쥐며 터져 나오려는 비명을 삼켰다. 시야가 붉게 점멸하며 바닥의 먼지가 소용돌이쳤다.
훌륭한 에너지원이군.
사내가 태윤의 목을 졸라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발끝이 허공을 휘저으며 무력하게 흔들렸다. 펜던트 안에서 하진의 영력이 날카로운 냉기가 되었다. 서하진, 제발 나오지 마. 태윤은 감각이 사라져 가는 손에 힘을 주었다.
잔해 너머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닿았다. 윤세희는 무너진 외벽 뒤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제복 소매를 쥔 그녀의 손이 잘게 떨려 왔다. 눈앞의 광경은 그녀가 믿어온 정의가 아니었다. 동료였던 이들이 태윤을 사냥감처럼 다루고 있었다.
태윤 씨.
세희의 입술이 소리 없이 달싹였다. 태윤의 창백한 얼굴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관리국이 갈구하던 금기된 힘, 서하진의 영핵이었다.
정화군의 사내가 허리춤에서 단검을 뽑았다. 영석이 박힌 칼날이 태윤의 가슴을 향했다. 펜던트를 강제로 도려낼 심산이 분명했다. 세희의 심장 근처에서 뜨거운 열기가 치밀어 올랐다. 시야가 일렁이며 세상의 색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회색빛 폐허 위로 황금색 영맥이 돋아났다. 그녀의 눈동자가 기괴한 빛을 내뿜으며 갈라졌다.
그만둬.
세희가 잔해를 박차고 현장으로 튀어 나갔다. 외침과 동시에 공기가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다. 정화군 요원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겨냥했다. 수십 개의 총구가 세희의 심장을 향해 고정되었다.
배신자로군.
사내가 냉소하며 태윤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태윤은 거칠게 기침하며 바닥을 굴렀다. 펜던트가 바닥에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세희는 태윤의 앞을 가로막으며 양팔을 벌렸다.
그 사람 건드리지 마.
세희의 목소리는 평소와 확연히 달랐다. 수천 명의 망자가 속삭이는 듯한 잔향이 섞였다. 안경 너머로 비치는 눈동자는 이미 인간의 것이었다. 황금빛 안개가 그녀의 발등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정의가 사라진 곳에 남은 건 약탈뿐인가.
그녀의 물음에 사내는 대답 대신 방아쇠를 당겼다. 탄환이 공간을 가르며 날카롭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탄환은 세희의 몸에 닿기 전에 멈췄다. 세희의 눈에서 뿜어진 안개가 탄환을 집어삼켰다.
그것은 진실의 안개였다.
안개가 정화군 요원들의 발밑을 파고들었다. 그들의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났다.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림자 속에서 형체를 알 수 없는 손들이 튀어 나왔다. 망령들이 요원들의 발목을 붙잡고 끌어내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요원들이 당황하며 바닥을 향해 총을 쐈다. 하지만 그림자는 죽지 않고 계속 증식했다. 정화라는 명목으로 소멸시켰던 동료들의 원혼이었다. 망령들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며 육신을 낚아챘다.
태윤은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세희를 보았다. 그녀의 등 뒤로 거대한 영안이 떠올라 있었다. 펜던트의 진동이 멈추고 새로운 감각이 시작되었다. 태윤의 심장이 하진의 박동을 대신하기 시작했다.
세희의 눈에서 황금색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모두 돌아가야 할 시간이야.
안개 속에서 거대한 낫의 형상이 실체화되었다. 세희의 그림자가 정화군 전체를 집어삼킬 듯 부풀었다. 사내의 눈에 생생한 공포가 서렸다. 그는 뒷걸음질 치며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괴물, 저건 괴물이다.
태윤의 손바닥에 새겨진 낙인이 뜨겁게 타올랐다. 하진의 목소리가 뇌가 아닌 뼛속에서 울렸다. 이제 시작이야, 태윤아. 태윤은 자신의 수명이 타 들어가는 소리를 들었다. 세희의 낫이 허공을 가르자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공간이 뒤틀리며 검은 구멍이 사내의 발밑에 열렸다. 사내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주변의 요원들도 하나둘 그림자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폐허에는 오직 태윤과 세희, 그리고 안개만이 남았다.
세희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태윤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 속에는 수많은 기억이 소용돌이쳤다. 그것은 세희의 것이 아닌, 하진의 기억이었다. 태윤은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괜찮아요, 세희 씨.
태윤의 목소리가 갈라진 틈새로 흘러나왔다. 세희는 대답 대신 힘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황금빛 안개가 걷히고 차가운 달빛이 폐허를 비췄다. 태윤은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려 손을 뻗었다.
그때, 등 뒤에서 낯익은 한기가 느껴졌다. 펜던트의 진동과는 다른, 생생한 체온이 등에 닿았다. 누군가 태윤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태윤의 고개가 힘없이 뒤로 꺾이며 타인의 가슴에 기댔다.
너무 무리했네, 후배님.
서하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실체가 없는 영체일 텐데도 그의 손길은 선명했다. 태윤은 감기려는 눈을 억지로 뜨며 그의 얼굴을 보려 했다. 하진은 차가운 입술로 태윤의 귓볼을 살짝 깨물었다.
이제 내가 갚아줄 차례인가.
하진의 손이 태윤의 가슴 위에 놓인 펜던트를 덮었다. 펜던트가 검은 빛을 내뿜으며 태윤의 가슴 속으로 스며들었다. 태윤은 전신이 찢겨 나가는 고통에 상체를 비틀었다. 하진은 그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조금만 참아, 금방 끝날 테니까.
태윤의 의식이 암전 속으로 천천히 침잠했다. 멀리서 성역 센터의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하진은 쓰러진 세희를 한 번 훑어보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형체가 안개처럼 흩어지며 태윤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폐허에는 오직 차가운 바람과 먼지만이 머물렀다. 잠시 후, 수십 대의 관리국 차량이 폐허를 포위했다. 무장한 퇴마사들이 차에서 내려 잔해 속으로 총을 겨눴다. 그들의 선두에는 안경을 치켜올리는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생존자를 확보해라.
남자의 명령에 요원들이 일제히 폐허 안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텅 빈 바닥뿐이었다. 태윤과 세희, 그리고 조금 전까지 존재했던 망령들의 흔적조차 사라졌다. 바닥에는 오직 태윤의 부러진 안경 다리만이 남았다.
그때, 하늘 높이 솟은 백색 탑의 꼭대기가 보였다. 그곳에서 거대한 영안이 눈을 뜨며 신월구를 내려다보았다. 도시 전체가 푸른 빛에 휩싸이며 지형이 실시간으로 변했다. 미명가의 폐허가 태화로의 고층 빌딩 사이로 솟아올랐다.
지도가 바뀌고 있었다.
태윤은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달렸다. 손바닥에 닿는 감촉은 매끄럽고도 차가웠다. 하진의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지며 길을 안내했다. 뒤편에서 추격자들의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 거야.
태윤의 물음에 하진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보았다. 그의 눈동자는 붉은 달빛을 받아 기괴하게 번득였다. 하진은 태윤의 손을 자기 심장 부근으로 가져가 대었다. 그곳에는 아무런 고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실이 숨겨진 우물로 가야지.
하진이 손가락을 들어 허공에 기괴한 문양을 그렸다. 공간이 종이처럼 구겨지며 새로운 통로가 열렸다. 태윤은 주저하지 않고 그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로 퇴마사들의 고함과 총성이 멀어져 갔다.
통로 너머에는 본 적 없는 숲이 펼쳐져 있었다. 진혼의 숲, 도시를 감싸는 결계의 중심부였다. 나무들은 인간의 척추처럼 뒤틀린 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하진은 태윤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낮게 읊조렸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안내할게.
하진의 손이 태윤의 셔츠 안으로 파고들어 낙인을 매만졌다. 낙인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태윤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태윤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하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숲의 나무들이 일제히 흔들리며 기괴한 노래를 불렀다.
숲의 끝자락에서 거대한 우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물 안에서는 은색 액체가 소용돌이치며 기억을 재생했다. 태윤은 우물가에 서서 자신의 부모님이 웃고 있는 환영을 보았다. 하진은 태윤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저 안에 네가 찾는 모든 게 있어.
태윤은 홀린 듯 우물 안으로 손을 뻗으려 했다. 그때, 하진의 손이 태윤의 목을 강하게 졸라 뒤로 젖혔다. 태윤의 시선이 하진의 서늘한 눈동자와 정면으로 부딪혔다. 하진의 눈에는 애정과 증오가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하지만 대가는 네 영혼이야.
하진은 태윤의 입술을 거칠게 집어삼키며 우물 안으로 함께 몸을 던졌다. 은색 액체가 두 사람의 육신을 감싸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태윤의 비명이 숲의 노래에 묻혀 사라졌다. 두 존재의 영핵이 하나로 융합되며 눈부신 빛을 내뿜었다.
관리를 담당하던 백색 탑의 영안이 일시적으로 멀었다. 신월구의 모든 시계가 동시에 멈추고 시간이 역행했다. 무너졌던 건물이 다시 세워지고 죽었던 자들이 눈을 떴다. 오직 태윤과 하진만이 그 시간의 흐름 밖에서 서로를 옭아맸다.
우물 바닥에 닿은 태윤은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보인 것은 100년 전, 대균열이 일어나기 전의 신월구였다. 하진은 인간의 옷을 입고 태윤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다녀왔어, 하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