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색 탑이 무너진 자리에 검은 연기가 솟구쳤다. 재가 섞인 바람이 신월구의 하늘을 빠르게 뒤덮었다. 무너진 석재 사이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태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품 안에서 서하진의 손이 점차 투명하게 변하고 있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희미한 진동이 태윤의 가슴팍까지 전달되었다. 태윤은 하진의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움켜쥐었다. 손바닥 사이로 서늘한 공기만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하진의 안색은 이미 창백함을 넘어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하진의 몸이 흐릿해질 때마다 태윤은 자신의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억지로 끌어올린 영력이 혈관을 타고 손등의 낙인으로 몰렸다. 타들어 가는 감각이 전신을 훑었다. 수명을 깎아 생명력을 전이하는 행위는 날카로운 칼날을 삼키는 것과 같았다. 하진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가 겨우 초점을 맞추며 태윤을 바라보았다. 입술이 달싹였으나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한기가 태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시의 중심부인 태화로는 이미 아수라장이었다. 고층 빌딩의 유리창들이 깨져 내리며 은색 파편을 비처럼 뿌렸다. 영맥의 흐름이 끊기자 가로등이 일제히 점멸하며 비명을 질렀다. 신월구의 경제를 지탱하던 영석 거래소의 전광판이 암전되었다. 화폐로서 가치를 잃은 영석들이 바닥에 굴러다녔다.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사방으로 흩어졌다. 누군가 무너진 탑의 잔해를 가리키며 고함을 쳤다.
저들이야. 저놈들이 탑을 무너뜨렸어.
먼지투성이의 사내가 손가락질하며 다가왔다. 그의 손에는 깨진 영석 조각이 들려 있었다. 한 명의 외침은 삽시간에 군중의 분노로 번졌다. 굶주림과 공포에 짓눌린 시민들이 태윤과 하진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이성이 없었다. 오직 자신들의 평온을 앗아간 대상을 향한 증오뿐이었다.
재앙의 근원이다. 죽여버려.
누군가 던진 돌멩이가 태윤의 어깨를 강타했다. 둔탁한 통증이 상체를 울렸으나 태윤은 하진을 감싼 팔에 힘을 풀지 않았다. 또 다른 돌이 하진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태윤은 하진의 머리를 제 가슴팍으로 끌어당겼다.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진의 영체가 다시금 발작하듯 파르르 떨렸다. 태윤의 목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세상을 구했는데.
태윤의 목소리가 젖은 채로 흘러나왔다. 하진의 가슴에 닿은 태윤의 손바닥이 잘게 떨렸다. 신월구를 옥죄던 영계 관리국을 무너뜨린 결과가 이것이었다. 부모님의 원수를 갚고 진실을 밝혔으나 남은 것은 차가운 돌팔매질뿐이었다.
왜 세상은 너를 밀어내는 거야?
하진은 대답 대신 태윤의 옷자락을 약하게 쥐었다. 그의 손가락에는 힘이 없었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환영 같았다. 태윤은 하진의 귓가에 얼굴을 묻었다. 사람들의 욕설이 고막을 할퀴었다. 영석이 휴지 조각이 된 도시는 이제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영맥이 뒤틀린 미명가의 어둠이 태화로까지 스며들고 있었다.
태윤은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거친 손길에 몸이 휘청였다. 하지만 하진을 놓칠 수 없었다. 여기서 손을 놓으면 하진은 영영 연기처럼 흩어질 것이 분명했다. 태윤은 제 수명을 한 줌 더 쥐어짜 내어 낙인으로 보냈다. 시야가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가 돌아왔다. 명치 부근이 뒤틀리며 구역질이 올라왔으나 억지로 삼켰다.
미명가 초입에 들어서자 추격하는 발소리가 조금씩 멀어졌다. 버려진 폐허의 그림자가 그들을 가려주었다. 태윤은 썩어 문드러진 벽에 몸을 기댔다. 하진을 바닥에 눕히려 했으나 하진이 그의 목을 팔로 감아왔다. 차가운 체온이 목줄기를 타고 심장까지 파고들었다. 하진의 숨결은 이제 얼음처럼 차가웠다.
하진은 태윤의 뺨을 더듬으며 힘겹게 미소 지었다. 그 여유로운 표정 뒤에 숨겨진 소멸의 공포를 태윤은 읽을 수 있었다. 하진의 손가락 끝이 공기 중에서 입자가 되어 흩어졌다. 태윤은 그 입자를 잡으려 허공을 휘저었다. 손등에 새겨진 은색 낙인이 하진의 고통에 반응해 박동했다.
그만해, 태윤아.
하진의 목소리는 파동에 가까웠다. 태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의 생명력을 다 써버려도 상관없었다. 하진이 없는 신월구는 그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부모님이 남긴 펜던트가 가슴 안쪽에서 뜨겁게 요동쳤다. 펜던트의 모서리가 살점을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했다. 태윤은 펜던트를 꺼내 꽉 쥐었다.
펜던트에서 뿜어져 나온 은백색 빛이 하진의 몸을 감쌌다. 흩어지던 영체의 입자들이 자석에 끌리듯 다시 모여들었다. 하진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태윤 역시 예상치 못한 반응에 숨을 들이켰다. 펜던트는 하진의 영력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진의 본질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제어 장치이자 저장고인 펜던트의 진정한 기능이 깨어나고 있었다.
태윤의 목걸이가 하진의 불규칙한 심장 박동에 맞춰 붉게 점멸했다. 규칙적인 붉은빛이 어두운 골목을 주기적으로 밝혔다. 하진의 몸이 점차 펜던트 안으로 흡수되는 것처럼 보였다. 태윤은 그것을 멈추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강력한 영적 압력이 전신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무너진 백색 탑 쪽에서 거대한 진동이 다시 발생했다. 도시 전체를 울리는 굉음과 함께 지면이 갈라졌다. 태윤은 하진의 몸을 덮치듯 안았다. 무너진 잔해 속에서 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정적 속에서 낯설고 기괴한 소리가 들려왔다.
지지직, 거리는 기계음이 허공을 갈랐다. 태윤은 고개를 들어 무너진 탑의 잔해를 응시했다. 거대한 돌무더기 아래에서 금속성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죽은 줄 알았던 의장의 것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목소리라기엔 지나치게 건조하고 뒤틀려 있었다.
계획대로군.
기계 변조된 목소리가 골목 구석구석을 파고들었다. 태윤의 가슴 위에서 붉게 빛나던 펜던트가 더욱 격렬하게 진동했다. 하진의 영체가 펜던트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 하진은 태윤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입술이 마지막으로 어떤 단어를 그려냈다.
태윤은 펜던트를 쥔 채 무너진 탑의 잔해로 시선을 던졌다. 먼지 사이로 기계 장치의 부품들이 꿈틀거리며 기어 나오고 있었다. 붉은 점멸은 멈추지 않았다. 태윤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목걸이를 낚아챘다. 펜던트 안에서 하진의 비명이 들린 것 같았다.
잔해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어섰다.
태윤은 펜던트를 움켜쥔 채 뒤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