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바닥이 지면을 박차고 올랐다.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고막을 할퀴었다. 중력이 뒤틀리며 몸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태윤의 시야가 푸른 안개로 뒤덮였다. 등 뒤에서 돋아난 반투명한 날개가 기류를 비틀었다. 백색 탑의 외벽을 감싸던 거대한 방어막이 유리창처럼 박살 났다. 파편이 은하수처럼 흩날리며 태화로의 밤을 밝혔다. 하진의 서늘한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뇌수를 적셨다. 두 개의 심장 박동이 하나의 궤적을 그렸다.
영자 도약은 물리적인 이동이 아니었다. 공간의 틈새를 억지로 벌려 몸을 밀어 넣는 고통이 수반되었다. 전신의 근육이 뒤틀리고 피부 밑의 혈관이 터져나갈 듯 팽창했다. 태윤은 이를 악물었다. 입 안에서 비릿한 금속 맛이 퍼졌다. 하진의 영체가 태윤의 신경망을 타고 흐르며 고통을 분담했다. 차가운 냉기가 타오르는 통증을 덮었다. 눈앞에 백색 탑의 최상층부가 보였다. 칠성 의회의 거점인 그곳에는 거대한 영안이 독기 어린 빛을 내뿜고 있었다.
결계의 파편이 태윤의 뺨을 스치며 붉은 선을 그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하진의 한기가 깃든 손이 허공을 휘저었다. 손끝에서 뻗어 나간 푸른 안개가 탑의 외벽을 얼려버렸다. 균열이 발생한 지점을 향해 태윤이 몸을 날렸다. 굉음과 함께 콘크리트 벽이 무너져 내렸다. 먼지 구름 속에서 태윤이 바닥을 짚으며 일어섰다. 등 뒤의 날개가 입자로 흩어지며 도시 전체로 퍼져 나갔다. 그것은 단순한 잔상이 아니었다. 하진이 간직해온 100년 전의 기억, 관리국이 지워버린 진실의 파편들이었다.
거대한 홀 중앙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칠성 의회의 의장, 박무혁이었다. 그는 구역질 나는 미소를 지으며 태윤을 내려다보았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더니." 태윤의 손가락이 떨렸다. 가슴팍에 걸린 펜던트가 옷감을 뚫고 나올 듯 진동했다. 의장의 발치에는 부모님의 유품인 진은의 검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10년 전, 사고사로 처리되었던 그날의 진실이 박무혁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네 부모는 훌륭한 재료였지. 그들의 영핵은 이 탑을 지탱하는 가장 견고한 주춧돌이 되었다."
명치 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이 전신을 지배했다. 눈앞의 시야가 붉게 점멸했다. 태윤은 자신의 수명이 깎여 나가는 것을 느꼈다. 영체 융합의 부작용이었다. 머리카락 끝이 하얗게 세어 가고 피부의 탄력이 죽어갔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하진의 분노가 태윤의 혈관을 타고 소용돌이쳤다. 하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아니, 그것은 태윤 자신의 의지였다. '베어라, 태윤아. 저 위선을.'
진은의 검이 태윤의 손안에서 다시 형체를 갖췄다. 부러진 칼날 사이를 하진의 청백색 한기가 메웠다. 박무혁이 손을 뻗자 천장의 영안이 검은 광선을 쏘아 올렸다. 영맥의 흐름이 뒤바뀌며 탑 전체가 진동했다. 의장은 자신의 영핵을 폭주시켜 탑과 함께 도시를 소멸시키려 했다.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면 진실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다." 태윤의 발바닥 아래로 지면이 갈라졌다. 거대한 중력이 몸을 짓눌렀다.
태윤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신발 밑창이 타들어 가는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하진의 영체가 태윤의 등에 밀착되었다. 차가운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포옹이었다. 태윤은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낙인이 검게 타오르며 뼈를 깎는 통증을 유발했다. 수명을 연료 삼아 태운 영력이 검신으로 응축되었다. 하얀 서리가 칼날을 타고 올라와 태윤의 팔꿈치까지 뒤덮었다.
"우리는 사라지지 않아."
태윤의 목소리가 홀 안에 낮게 깔렸다. 그것은 하진과 태윤이 동시에 내뱉는 선언이었다. "당신들이 지운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테니까." 태윤의 신형이 사라졌다. 박무혁의 눈동자가 좌우로 거칠게 흔들렸다. 검은 광선이 허공을 갈랐지만 태윤은 이미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든 뒤였다. 진은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의장의 가슴 중앙을 관통했다. 정확히 영핵이 자리 잡은 위치였다.
서늘한 냉기가 박무혁의 체내로 쏟아져 들어갔다. 폭주하던 영핵이 급격히 동결되며 표면에 금이 갔다. 의장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의 눈동자에 서린 황금빛 광기가 사그라들었다. 태윤은 검을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하진의 기운이 박무혁의 영혼을 조각조각 부수어 발밑의 그림자로 던져버렸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탑의 최상층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태윤의 무릎이 꺾였다. 검을 짚고 간신히 상체를 지탱했다. 시야가 흐릿했다. 하진의 영체가 분리되며 태윤의 옆에 주저앉았다. 하진의 몸은 이제 안개보다 더 투명해져 있었다. 손을 뻗어 보았지만 태윤의 손가락은 하진의 뺨을 통과해 허공을 휘저었다. 태윤의 호흡이 가늘어졌다. 가슴 안쪽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수명을 쏟아부은 대가는 가혹했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무너지는 잔해 사이로 신월구의 전경이 보였다. 밤하늘을 수놓았던 기괴한 영안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새벽녘의 푸르스름한 빛이 차올랐다. 하진의 진실이 담긴 환영들이 도시 곳곳으로 비처럼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가던 길을 멈추고 허공을 응시했다. 그들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하얀 가면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관리국이 강요했던 망각의 굴레가 깨어지는 소리가 도시를 가득 채웠다.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옆에 누운 하진의 손을 잡으려 애썼다. 감촉은 없었지만, 마음 끝자락에서 느껴지는 미미한 파동이 있었다. 하진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그는 소리 없이 웃고 있었다. 비웃음도, 냉소도 아닌, 오로지 한 사람만을 향한 온전한 미소였다. 태윤의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모든 힘이 빠져나간 자리에 지독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탑의 기둥이 힘없이 쓰러지며 먼지 구름을 일으켰다. 태윤은 마지막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하진의 희미한 형태를 부축하듯 제 어깨에 기대게 했다. 두 존재는 천천히 무너지는 계단을 내려갔다. 백색 탑의 권위가 바닥으로 추락하는 동안, 그들은 어둠 속으로 숨어들지 않았다. 당당히 드러난 미명가의 길 위로 태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외곽의 진혼의 숲이 보였다. 결계의 기운이 사라진 숲은 이제 더 이상 감옥이 아니었다. 숲의 입구에 서 있던 시민들이 태윤과 하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에는 더 이상 공포나 혐오가 없었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뒤늦게 찾아온 슬픔과 기억이었다. 한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것은 100년 동안 금지되었던 행위였다.
"서하진 씨."
그 이름이 공기 중에 파동을 일으켰다. 여기저기서 낮은 속삭임이 이어졌다. "이정우", "김미숙", "박철호". 지워졌던 귀신들의 이름이 산 자들의 입술을 타고 되살아났다. 하진의 영체가 미세하게 떨리며 빛을 발했다. 태윤은 하진의 손을 더욱 굳게 쥐었다. 비록 손가락 사이로 서늘한 바람만 지나갈 뿐이었지만, 태윤은 하진의 맥박을 느낄 수 있었다.
"들려요? 당신의 이름이에요."
태윤의 말에 하진이 고개를 숙였다. 하진의 눈에서 떨어진 투명한 입자가 태윤의 손등 낙인 위로 스며들었다. 검은 낙인이 서서히 옅어지며 은색 빛으로 변해갔다. 계약은 끝났다. 하지만 그들을 묶고 있는 것은 이제 저주받은 낙인이 아니었다. 태윤은 하진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숲의 깊은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제 어디로 갈까."
하진의 물음에 태윤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