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의 다리 초입은 짙은 남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거대한 교각 위로 수백 명의 제복 입은 퇴마사들이 벽을 세웠다. 그들 너머 백색 탑 꼭대기에서는 거대한 기하학적 문양이 핏빛으로 점멸했다. 신월구 전체를 뒤덮을 소멸의 마법진이었다. 강태윤은 검자루를 쥔 손목에 힘을 주었다. 손등에 새겨진 검은 낙인이 맥박에 맞춰 검게 요동쳤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공기가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성역 센터의 정예 부대가 일제히 영식 술법을 전개했다. 허공에 수천 개의 은색 문자가 떠올라 창날처럼 태윤을 겨냥했다. 다리 바닥에 설치된 영맥 과부하 장치가 요란한 금속음을 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온 진동이 척추를 타고 뇌수까지 저릿하게 울렸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비릿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수명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태윤의 무릎이 힘없이 꺾이려 했다. 시야 모서리가 검게 타들어 가며 초점이 흐려졌다. 그때 등 뒤에서 서늘한 냉기가 감돌았다. 서하진의 영체가 태윤의 어깨 위로 가늘고 긴 손가락을 얹었다. 차가운 한기가 타오르는 혈관의 열기를 잠시 식혔다. 하진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깊은 보랏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태윤의 귓가에 낮게 숨을 불어넣었다.
"아직은 쓰러질 때가 아니야, 후배님."
하진의 목소리가 파동이 되어 고막을 흔들었다. 태윤은 억지로 상체를 세우며 검을 고쳐 쥐었다. 앞을 가로막은 퇴마사들이 일제히 영력을 방출했다. 폭발적인 압력이 전신을 짓눌러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피부 위로 실핏줄이 터지며 붉은 반점이 번졌다. 태윤은 입안의 핏물을 삼키며 바닥을 박차고 나갔다. 진은의 검이 궤적을 그리며 허공의 문자를 베어 넘겼다.
과부하 장치의 출력이 한계를 넘어섰다. 다리 전체가 좌우로 크게 요동치며 비현실적인 소음을 내뱉었다. 태윤의 시야 속에서 공간이 왜곡되며 바닥이 늪처럼 발을 붙잡았다. 영력이 바닥을 드러내자 심장 근처가 칼로 도려내는 듯 아팠다. 하진이 태윤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영체가 안개처럼 흩어지며 다리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연기가 아니었다. 하진이 지닌 100년의 기억이 응축된 사념의 결정체였다. 안개가 닿는 곳마다 퇴마사들이 고통스러운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하진의 형체가 점점 투명해지며 대기 중으로 녹아내렸다. 그는 자신의 본질을 태워 길을 만들고 있었다. 태윤은 하진의 손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만둬, 그러다가는 선배도 소멸해."
태윤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하진은 대답 대신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눈가에서 반짝이는 파편들이 먼지처럼 흩날렸다. 기억의 안개가 짙어질수록 하진의 존재감은 옅어졌다. 그는 태윤의 등을 가볍게 밀어내며 앞을 가리켰다.
"내 기억이 다 타버려도 상관없어, 너만은 저 탑에 보내줄게."
하진의 선언과 함께 안개가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퇴마사들의 진형이 순식간에 무너지며 길이 열렸다. 태윤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다리 중앙으로 질주했다. 발바닥에 닿는 감촉이 딱딱한 돌에서 무른 살덩이처럼 변했다. 다리 자체가 거대한 생물처럼 꿈틀대며 침입자를 밀어내려 했다. 태윤의 가슴 포켓 안에 있던 부모님의 펜던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금속이 비명을 지르며 반으로 쪼개졌다. 그 틈새로 눈부신 황금빛 영력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관리국의 기록 어디에도 없던 순수한 생명의 기운이었다. 태윤은 펜던트에서 흘러나온 빛이 자신의 혈관을 채우는 것을 느꼈다. 부모님이 마지막 순간까지 숨겨두었던 유산이었다. 그 빛은 하진의 차가운 한기와 섞이며 기묘한 공명을 일으켰다.
태윤은 멈추지 않고 다리의 가장 깊은 곳으로 파고들었다. 하진의 영체가 이제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릿해졌다. 그의 영핵이 가슴 중앙에서 위태롭게 명멸하고 있었다. 태윤은 손을 뻗어 그 작은 빛덩이를 움켜쥐었다. 차가운 얼음 조각을 쥔 듯한 통증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는 주저 없이 그 빛을 자신의 가슴 안으로 끌어당겼다.
두 존재의 영력이 충돌하며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했다. 태윤의 척추를 따라 은색 문양들이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인간의 육체가 감당할 수 없는 고밀도의 에너지가 근육을 팽창시켰다. 시야가 온통 은백색으로 물들며 감각이 확장되었다. 다리 건너편 백색 탑의 꼭대기에서 영안이 태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태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환영의 다리를 지탱하던 영맥을 타격했다. 교각 곳곳에서 균열이 발생하며 파편들이 어둠 속으로 추락했다. 완전한 융합이 이루어지는 순간 태윤은 깨달았다.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하진의 진동과 완벽히 일치하고 있었다. 태윤은 폭발하는 빛의 중심에서 검을 높게 치켜들었다.
무너져 내리는 다리 위에서 태윤의 시선이 백색 탑의 기단을 훑었다. 영체와 인간이 하나로 섞인 목소리가 대기를 찢으며 울려 퍼졌다. 빛의 폭풍이 가라앉은 자리에는 더 이상 인간 강태윤도, 귀신 서하진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은백색 날을 세운 거대한 그림자만이 허공에 떠 있었다.
태윤은 자신의 가슴을 뚫고 나온 하진의 투명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은 태윤의 심장을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던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었다. 다리가 완전히 붕괴하며 바닥이 사라지는 순간에도 두 존재는 서로를 놓지 않았다. 태윤은 입가에 번지는 비릿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탑의 중심부를 향해 검을 내리꽂았다.
검 끝이 지면에 닿기 직전, 거대한 마법진이 황금색에서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변했다. 태윤은 자신의 몸이 조각나며 탑의 일부로 흡수되는 감각을 느꼈다.
"이것이 당신들이 원하던 완성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