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소의 공기는 폐부를 찌를 듯이 차가웠다. 윤세희는 거친 숨소리가 복도 끝까지 퍼질까 봐 아랫입술을 짓눌렀다. 손끝에 닿는 금속 잠금장치가 얼음처럼 차가웠다. 훔쳐낸 관리자 카드를 단말기에 꽂자 기계적인 신호음이 적막을 깨고 울려 퍼졌다. 육중한 강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좌우로 갈라졌다.
내부는 온통 푸른빛의 정적에 잠겨 있었다. 수천 개의 영석 데이터가 벽면을 가득 채운 채 점멸했다. 세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가장 깊숙한 곳으로 발을 옮겼다. 발등 위로 서늘한 한기가 내려앉았다. 100년 전의 기록이 보관된 구역은 먼지조차 죽은 듯 고요했다. 그녀의 시선이 영체 소멸법이라 적힌 검은색 데이터 상자에 머물렀다.
손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상자를 여는 순간 자신이 믿어온 모든 세계가 무너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단말기에 상자를 연결하자 붉은 경고등이 시야를 덮었다. 홀로그램 화면 위로 누런 종이 질감의 문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낡은 글자들 사이로 정화라는 단어가 핏빛처럼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그것은 학살의 기록이었다. 귀신들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영석 채굴을 위한 자원으로 규정한 초안이었다. 관리국의 시조들이 작성한 문장마다 탐욕의 냄새가 진동했다. 세희는 위장이 뒤틀리는 감각에 상체를 숙였다. 신월구의 평화는 죽은 자들의 비명 위에 세워진 신기루였다.
문서 하단에는 환영의 다리에 관한 비밀 조항이 덧붙여져 있었다. 다리의 중심축인 제3영맥이 불안정해질 때 특정 주파수의 영력을 주입하면 결계가 무너진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이 관리국이 숨겨온 유일한 약점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데이터를 자신의 개인 전송기에 복제하기 시작했다.
복제 진행률이 절반을 넘어섰을 때였다. 등 뒤의 그림자가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났다. 세희는 목덜미를 스치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고개를 돌렸다. 복도 끝에서 정화 위원회 고위 간부의 제복이 어둠을 가르고 나타났다. 그의 구두 소리가 규칙적으로 바닥을 때렸다.
윤세희 요원, 기대가 컸는데 아쉽군.
낮게 깔린 목소리가 천장을 타고 흘렀다. 세희는 전송기를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벽면의 영석들이 그의 기운에 반응하여 검게 변색되었다. 간부의 눈동자에는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무미건조한 살의가 서려 있었다. 퇴로가 차단된 폐쇄된 공간이었다.
그녀는 주머니 속의 영자 메시지 단말기를 더듬었다. 전송 완료를 알리는 진동이 손바닥을 간지럽혔다. 세희는 전송기를 바닥에 던져 박살 내며 단말기의 발신 버튼을 눌렀다. 가슴 밑바닥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태윤 씨, 내가 믿었던 정의는 당신이 살아남는 거예요.
그녀의 목소리가 서늘한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간부의 손에서 뿜어져 나온 흑색 영력이 뱀처럼 바닥을 타고 달려들었다. 세희는 자신의 제식 검을 뽑아 들며 눈을 부릅떴다.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손목에 들어간 힘은 풀리지 않았다.
같은 시각 미명가의 낡은 은신처에 머물던 태윤의 손목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단말기에서 뿜어져 나온 영자 메시지가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세희의 마지막 음성과 함께 복잡한 구조의 데이터들이 쏟아졌다. 태윤은 가슴의 통증을 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진은 침대 곁에 기댄 채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하진의 영체는 평소보다 옅어져 투명한 안개처럼 보였다. 그는 태윤의 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서늘한 손가락으로 닦아내었다. 비웃음 섞인 미소조차 짓지 못한 채 하진의 눈동자에는 짙은 우수가 서렸다.
결국 저 여자도 너를 위해 목숨을 거는군.
태윤은 대답 대신 벽에 기대어 있던 진은의 검을 쥐었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검자루의 차가운 금속과 맞물렸다. 가슴을 관통했던 상처 부위가 맥박을 칠 때마다 욱신거렸다. 하지만 지금은 통증보다 더 거대한 중압감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세희가 보낸 자료 속에는 환영의 다리를 무너뜨릴 수 있는 좌표가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곧 백색 탑으로 향하는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태윤은 피 냄새 섞인 숨을 내뱉으며 신발 끈을 고쳐 맸다. 거울 속의 자신은 이미 죽음과 맞닿아 있는 표정이었다.
가야 해. 가서 끝내야 한다.
태윤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하진은 말없이 태윤의 뒤로 다가와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귀신의 한기가 태윤의 뜨거운 몸으로 스며들었다. 하진의 손끝이 잘게 떨리며 태윤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의 영체가 일시적으로 황금색 빛을 내뿜으며 요동쳤다.
내 영핵이 네 심장과 공명하고 있어.
하진이 태윤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것은 단순한 접촉이 아니었다. 하진의 존재 자체가 태윤의 영맥 속으로 녹아들려는 위험한 전조였다. 영체 융합. 인간의 몸에 귀신의 핵을 받아들여 폭발적인 힘을 내는 금기의 기술이었다. 태윤의 시야가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가 돌아왔다.
태윤은 하진의 손을 맞잡으며 은신처의 문을 열었다. 밖에는 이미 관리국의 추격대들이 내뿜는 기운이 미명가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밤하늘 위로 백색 탑의 거대한 영안이 떠올라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태윤은 진은의 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어둠 속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검은 그림자들이 건물 옥상마다 기괴하게 솟아올라 있었다. 관리국의 정화 요원들이 내뿜는 영력이 공기를 짓눌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태윤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검 손잡이를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솟구쳤다. 하진의 영체가 등 뒤에서 파도처럼 출렁이며 태윤의 신경계를 파고들었다.
모든 감각이 평소보다 수십 배는 예민하게 살아났다. 바닥을 기어가는 벌레의 진동조차 고막을 때리는 굉음으로 변했다. 태윤은 무릎을 낮게 굽히며 전방을 주시했다. 정면의 어둠을 가르고 은색 탄환들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영력을 실은 탄환이 공기를 가르며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태윤은 검을 휘둘러 날아오는 탄환들을 쳐냈다. 금속음이 밤의 정적을 찢어발겼다. 하진의 힘이 섞인 진은의 검은 궤적마다 푸른 잔상을 남겼다. 태윤의 발밑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고 보도블록이 산산조각 났다. 그는 멈추지 않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추격대원 중 한 명이 옥상에서 뛰어내리며 거대한 낫을 휘둘렀다. 태윤은 상체를 뒤로 젖히며 아슬아슬하게 날붙이를 피했다. 뺨 위로 가느다란 핏줄기가 배어 나왔다. 상처의 쓰라림이 느껴지기도 전에 태윤의 검이 적의 복부를 꿰뚫었다. 상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연기가 태윤의 제복을 적셨다.
하진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뇌리를 울렸다. 영혼을 깎아 먹는 힘이라더니 꽤 쓸 만하지 않느냐는 빈정거림이었다. 태윤은 대답할 여유가 없었다. 심장 근처의 영핵이 요동칠 때마다 안구 뒷근육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그는 들이치는 고통을 씹어 삼키며 다음 골목으로 몸을 날렸다.
미명가의 폐허들 사이로 성역 센터의 장갑차들이 진입했다. 서치라이트의 강렬한 빛이 태윤의 시야를 방해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겼다. 등 뒤에서 느껴지는 하진의 무게감이 점점 무겁게 변했다. 융합이 진행될수록 두 사람의 경계가 희미해지고 있었다.
태윤의 머릿속으로 하진의 기억 조각들이 흘러들어왔다. 100년 전의 불타는 거리와 비명을 지르며 스러져가던 귀신들의 모습이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의 감정이 태윤의 가슴속에 응어리졌다. 분노가 아닌 차가운 살의가 전신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멈추지 마, 태윤아.
하진의 목소리가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태윤은 벽을 박차고 뛰어올라 장갑차의 지붕 위로 올라섰다. 검을 수직으로 내리꽂자 강철판이 종잇장처럼 찢어졌다. 내부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지만 태윤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넘어서고 있었다.
시청 광장으로 이어지는 환영의 다리가 멀리 보였다. 다리 위에는 관리국 최정예 요원들이 방진을 치고 대기 중이었다. 그들의 중앙에는 칠성 의회의 일원으로 보이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태윤은 입안에 고인 핏물을 바닥에 뱉어냈다.
태윤의 발걸음이 다리 입구에서 멈췄다. 하진의 영체가 그의 그림자와 완전히 하나로 합쳐졌다. 태윤의 눈동자가 평소의 검은색을 잃고 은백색으로 번뜩였다. 그는 검을 고쳐 쥐며 다리 건너편의 백색 탑을 응시했다.
끝내야 할 시간이었다. 부모님의 죽음과 세희의 희생 그리고 하진이 짊어진 100년의 원한을 전부 쏟아낼 순간이었다. 태윤은 자신의 수명이 타 들어가는 소리를 환청처럼 들으며 마지막 도약을 준비했다. 발아래의 영맥이 태윤의 의지에 반응하여 거대하게 진동했다.
다리의 결계가 태윤의 접근을 막기 위해 붉은빛을 내뿜었다. 태윤은 검끝을 지면에 박아 넣으며 영력을 폭발시켰다. 충격파가 광장 전체를 휩쓸며 유리창들을 가루로 만들었다. 하진의 서늘한 웃음소리가 공중에 흩뿌려졌다.
태윤은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며 하진을 자신의 품 안으로 강하게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