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세희의 비명이 좁은 방안을 날카롭게 찢었다. 강태윤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려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 너머로 세희의 가쁜 숨결이 뜨겁게 배어 나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헤엄치고 있었다. 방금 서하진이 강제로 주입한 기억의 파편들이 그녀의 신경계를 난도질하는 중이었다.
서하진은 창백해진 안색으로 태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의 몸에서 흘러나온 한기가 태윤의 쇄골을 타고 스며들었다. 영체를 유지할 힘조차 바닥난 듯 그의 형체가 미세하게 일렁였다. 태윤의 손등에 새겨진 검은 낙인이 맥박에 맞춰 붉게 점멸했다. 심장 부근이 조여드는 통증에 태윤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세희의 몸이 경련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태윤은 천천히 손을 떼며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세희의 뺨 위로 굵은 눈물줄기가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자신의 제복 가슴팍에 달린 성역 센터 휘장을 찢어발기듯 움켜쥐었다. 금속 장식이 바닥에 떨어지며 날카로운 마찰음을 냈다.
우리가 배운 역사는 전부 피로 쓴 거짓말이었어, 세희 씨.
태윤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방안을 맴돌았다. 세희는 대답 대신 바닥을 짚은 손가락 끝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방금 본 환영이 낙인처럼 박혀 있었다. 정화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민간인 학살과 영맥을 독점하기 위해 조작된 대재앙의 진실이 그녀를 옥죄었다. 관리국이 성전이라 부르던 기록의 뒷면은 오물보다 더러운 욕망으로 가득했다.
서하진이 태윤의 귓가에 차가운 숨을 불어넣었다. 이래도 저 여자를 믿을 건가. 그의 음성에는 짙은 냉소와 함께 숨길 수 없는 피로가 섞여 있었다. 태윤은 대답 대신 하진의 차가운 손을 꽉 쥐었다. 자신의 영력이 낙인을 타고 하진에게 흘러 들어가는 감각이 선명했다. 명치 끝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에 호흡이 가늘어졌다.
세희는 멍한 눈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영석 탐지기를 바라보았다. 관리국의 명령에 따라 수많은 귀신을 소멸시키며 정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믿어온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휘두른 검 끝에 스러져간 존재들이 사실은 관리국의 기만극에 희생된 피해자였다는 사실이 그녀를 짓눌렀다. 창밖에서 들려오는 도시의 소음이 유독 이질적으로 다가왔다.
태윤은 무릎을 굽혀 세희와 눈을 맞췄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이미 깊은 혼란의 늪에 빠져 있었다. 진실을 확인하고 싶다면 이번 한 번만 눈감아줘요. 태윤의 간절한 호흡이 세희의 뺨에 닿았다. 그는 자신이 가진 마지막 패를 던지는 심정으로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손바닥을 통해 전달되는 그녀의 떨림이 태윤의 심장까지 전해졌다.
세희가 고개를 들어 태윤을 응시했다. 그녀의 시선이 태윤의 어깨 너머, 반투명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서하진에게 향했다. 증오해야 할 괴물이 아니라, 지워진 역사의 증인을 보는 눈빛이었다. 세희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 같은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손등에 솟은 핏줄이 그녀가 겪고 있을 심리적 갈등을 대변했다. 공기는 차갑게 식어 가는데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방안의 전등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영맥의 흐름이 뒤틀리며 공기 중의 입자들이 거칠게 요동쳤다. 서하진의 영체가 흐려질 때마다 태윤의 시야도 함께 흔들렸다. 수명을 깎아 바치는 대가는 생각보다 가혹했다. 태윤은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세희의 대답을 기다렸다. 목 안쪽이 쇠를 씹은 듯 비릿하고 깔깔했다.
세희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허리춤에 매달린 개인용 탐지기를 꺼내 들었다. 정화 위원회와 실시간으로 연결된 장치였다. 그녀의 손가락이 파괴 스위치 위에서 머뭇거렸다. 이 장치를 부수는 순간, 그녀는 평생 쌓아온 명예와 지위를 모두 잃게 될 터였다. 그것은 단순한 기계의 파괴가 아닌 삶의 궤적을 부정하는 행위였다.
서하진이 비웃음을 흘리며 태윤의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인간의 선택이란 항상 비겁한 법이지. 그의 말은 태윤의 가슴에 가시처럼 박혔다. 태윤은 주먹을 움켜쥐며 세희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제복 위로 떨어진 눈물 자국이 어둡게 번져 있었다. 그 얼룩이 마치 거대한 음모의 지도처럼 보였다.
세희가 힘을 주어 탐지기를 바닥에 내팽개쳤다. 구두 굽으로 그것을 짓이기자 불꽃이 튀며 기계음이 멎었다. 그녀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문고리를 잡은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세희는 잠시 멈춰 서서 복도 천장에 설치된 은밀한 감시 카메라를 응시했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후였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태윤은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 힘이 풀리며 바닥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서하진이 뒤에서 그를 받쳐 들었다. 차가운 냉기가 전신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마비시켰다. 태윤은 하진의 품 안에서 가쁜 숨을 고르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머리카락 끝에 닿는 하진의 체온 아닌 체온이 서늘하게 감겼다.
하지만 안도는 길지 않았다.
천장의 모서리부터 검은 균열이 시작되었다. 물리적인 파손이 아니었다. 공간 자체가 일그러지며 발생하는 영적 균열이었다. 태윤의 목걸이 펜던트가 경고하듯 격렬하게 진동했다. 공기 중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고, 비릿한 오존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폐부 깊숙이 스미는 공기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영자 도약이다.
하진의 목소리가 전율과 함께 들려왔다. 태윤은 본능적으로 진은의 검을 뽑아 들었다. 천장에서 쏟아져 내리는 백색의 빛무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정화 위원회 소속의 특수 요원들이 허공에서 실체를 드러냈다. 그들의 제복에 새겨진 칠성 의회의 문양이 살벌한 빛을 내뿜었다. 검은색 전술복이 방 안의 그림자를 집어삼켰다.
요원들은 착지와 동시에 태윤과 하진을 포위했다. 그들이 들고 있는 영식 소총의 총구가 태윤의 심장을 향했다. 공간의 뒤틀림 때문인지 벽에 걸린 시계 바늘이 미친 듯이 거꾸로 회전했다. 태윤은 하진을 자신의 등 뒤로 밀어내며 검신에 영력을 주입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빛 광채가 요원들의 헬멧 유리에 반사되었다.
최선두에 선 요원이 무감각한 눈으로 태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목에 달린 제어 장치가 붉은빛을 띠며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방안의 가구들이 강력한 압력에 눌려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태윤의 발밑에서부터 차가운 그림자가 뱀처럼 기어 올라와 그의 발목을 묶었다.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요원이 차가운 금속음을 내며 칼날을 뽑아 들었다. 태윤은 떨리는 숨을 들이켜며 검 자루를 고쳐 쥐었다. 하진의 한기가 등 뒤에서 더욱 짙어졌다. 요원의 발이 지면을 박차는 순간, 태윤의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살아서 나가고 싶으면 내 팔이라도 뜯어 먹어."
태윤이 하진을 향해 자신의 왼쪽 손목을 거칠게 내밀었다. 요원의 칼날이 태윤의 콧등 앞까지 육박했다. 하진의 송곳니가 태윤의 살점 위로 차갑게 내려앉았다. 살이 찢기는 감각과 동시에 폭발적인 영력이 전신을 관통했다. 태윤은 고통을 씹어 삼키며 그대로 검을 휘둘러 요원의 흉갑을 쳐냈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며 불꽃이 방 안을 수놓았다.
다른 요원들이 일제히 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영자로 구성된 탄환들이 빗줄기처럼 쏟아졌다. 태윤은 하진의 영력을 빌려 공간의 밀도를 비틀었다. 탄환들이 허공에서 궤적을 잃고 벽면에 박혀 터졌다. 콘크리트 가루가 안개처럼 피어올라 시야를 가렸다. 그 뿌연 연기 속에서 태윤의 눈동자가 푸른색으로 점멸했다.
공격을 주도하던 요원이 수신호를 보냈다. 요원들이 2인 1조로 나뉘어 태윤의 사각을 파고들었다. 하진은 태윤의 그림자 속에서 촉수 같은 연기를 뻗어 그들의 발을 묶었다. 하지만 칠성 의회의 정예병들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들은 각자의 영력을 결합해 거대한 결계 벽을 형성하며 압박해 왔다. 방 안의 산소가 희박해지는 기분이었다.
태윤의 발목을 묶은 그림자가 살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선혈이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전에 증발했다. 수명을 매개로 한 억지스러운 영력 운용이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하진의 형체도 점점 투명해지며 비명을 지르듯 일렁였다. 태윤은 이를 악물며 마지막 남은 영핵의 기운을 검 끝에 모았다.
벽장 속에서 최도현이 개조해준 비상용 영석 폭탄이 보였다. 태윤은 망설임 없이 검기를 날려 폭탄의 안전장치를 부셌다. 요원들의 눈에 처음으로 당혹감이 서렸다. 폭발이 일어나기 직전, 태윤은 하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유리가 박살 나며 파편이 태윤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추락하는 감각 속에서도 태윤은 하진을 놓지 않았다. 등 뒤에서 거대한 폭음과 함께 열기가 덮쳐왔다. 건물의 외벽이 무너져 내리며 자욱한 먼지가 신월구의 밤거리를 덮었다. 태윤은 굴러떨어지듯 지면에 착지하며 신음했다. 왼쪽 어깨가 탈구된 듯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하진은 태윤의 품에서 힘없이 늘어져 있었다.
멀리서 구급차와 관리국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태윤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어두운 골목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시야가 블랙아웃 되듯 깜빡였다. 저 멀리 태화로의 고층 빌딩 꼭대기에 설치된 거대한 영안이 이쪽을 향해 회전하고 있었다. 놈들에게 위치가 노출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태윤은 피 섞인 침을 뱉어내며 골목 끝의 막다른 벽에 기대앉았다. 하진의 차가웠던 손이 이제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마비되었다. 가슴 한복판의 낙인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젖은 아스팔트를 밟으며 다가왔다. 태윤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골목 어귀에 나타난 것은 찢어진 제복 차림의 윤세희였다. 그녀의 손에는 관리국 요원의 전술용 무전기가 들려 있었다. 세희는 멍든 눈으로 태윤과 하진을 번갈아 보더니 무전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무전기 너머로 태윤의 사살 허가 명령이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세희는 천천히 태윤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강태윤 씨, 내 차가 근처에 있어요."
세희의 목소리가 젖은 공기를 가르고 태윤의 귀에 박혔다. 태윤은 그녀의 눈에서 일렁이는 기괴한 황금빛을 보았다. 그것은 관리국의 정화 요원에게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종류의 광기 어린 결의였다. 세희는 태윤의 상처 입은 어깨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하진의 영체를 자신의 코트 안으로 숨겼다.
골목 입구로 관리국의 서치라이트가 들이닥쳤다. 태윤은 세희의 어깨에 기댄 채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차가운 빗방울이 하나둘씩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세희는 품 안에서 작은 주사기 하나를 꺼내 자신의 목에 주저 없이 찔러 넣었다. 그녀의 혈관이 검게 솟구치며 영력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했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건 퇴마가 아니에요."
세희는 바닥에 떨어진 진은의 검을 주워 태윤에게 건넸다. 그녀의 시선은 이미 골목을 포위해오는 관리국 요원들을 향해 있었다. 태윤은 그녀의 손가락 끝에 맺힌 검은 기운을 보며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관리국이 그토록 멸시하던 귀신의 기운, 한기였다. 세희는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지으며 요원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살육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