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불길하게 진동하며 좌우로 비틀거렸다. 천장에서 하얀 석고 가루가 눈송이처럼 흩날렸다. 킬리안의 단단한 팔이 품 안의 고양이를 억눌러 잡았다. 그의 가슴팍에서 전해지는 박동은 기묘할 정도로 일정하고 고요했다.
침입인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흉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복도의 마법 전등이 붉은빛을 토하며 기괴하게 점멸했다. 공작저를 가득 채웠던 정적은 비명 같은 경보음으로 대체되었다. 킬리안은 망설임 없이 복도 끝 지하 계단을 향해 달렸다.
습기 하나 없는 차가운 공기가 코끝을 날카롭게 스쳤다. 지하로 내려갈수록 역한 악취가 진해졌다. 썩은 이끼와 마른 핏물이 뒤섞인 듯한 냄새였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옷자락을 앞발로 움켜쥐었다.
비단 같은 털이 곤두서며 등줄기를 타고 한기가 흘렀다. 지하 창고 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백색 대리석 벽면에는 거미줄 모양의 균열이 깊게 패였다. 자욱한 먼지 구름 너머로 검은 그림자들이 일렁거렸다.
안개 숲 네벨의 변종들이군.
킬리안이 허리춤에서 은빛 검을 매끄럽게 뽑아 들었다. 푸른 마력이 검신을 감싸며 공기 중에 오존 향을 뿌렸다. 먼지가 걷힌 공간에는 기괴하게 뒤틀린 마수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칠흑 같은 점액을 흘리며 성배가 안치된 제단을 에워쌌다.
마수들의 눈동자가 수십 개의 붉은 점이 되어 번뜩였다. 킬리안의 발치에서부터 투명한 파동이 구형으로 퍼져 나갔다. 그의 절대 영역이 전개되자 바닥의 오물들이 순식간에 소멸했다. 마수들이 고통스러운 듯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지르며 물러났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어깨 너머로 제단 위를 살폈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배 옆에 낯익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은으로 세공된 작은 원통형의 기록 장치가 보였다. 아버지가 생전 마지막까지 몸에 지녔던 유품이었다.
목 안쪽이 뜨거워지며 숨이 가쁘게 몰아쉬어졌다. 저 장치 안에 가문의 몰락을 증명할 진실이 담겨 있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품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다. 그의 손아귀는 강철처럼 완고하게 그녀를 붙들었다.
위험하다. 가만히 있어.
차가운 명령이 귓가를 울렸으나 눈앞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마수 한 마리가 제단을 향해 길쭉한 팔을 뻗었다. 검은 손톱이 기록 장치의 은제 표면을 긁으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킬리안의 손등을 앞발로 밀쳐냈다.
속박이 느슨해진 틈을 타 작은 몸뚱이가 허공을 날았다. 백색의 털 뭉치가 어둠을 가르며 제단 위로 착지했다. 킬리안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아이리스의 꼬리 끝에 닿았다. 마수들의 끈적한 시선 역시 일제히 고양이에게 쏠렸다.
멈춰라. 그곳은 내 영역 밖이다.
킬리안의 고함이 지하 창고 전체를 날카롭게 찢어놓았다. 아이리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앞발을 뻗어 장치를 낚아챘다. 입안에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의 질감이 소름 끼치도록 반가웠다. 승리감은 찰나의 순간에 불과했다.
머리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우며 사방이 어두워졌다. 가장 거대한 마수가 낫 같은 발톱을 치켜들고 있었다. 휘둘러진 공격은 공기를 가르며 아이리스의 등을 향했다. 피할 곳 없는 좁은 제단 위에서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등 뒤로 타는 듯한 통증이 신경을 타고 뇌를 때렸다. 아이리스는 비명을 삼키며 기록 장치를 입에 꽉 물었다. 킬리안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그녀의 몸을 낚아챘다. 그의 손바닥에 축축하고 뜨거운 액체가 배어 나왔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이성을 잃은 듯 거칠게 흔들렸다. 그의 품에 안긴 작은 몸이 바르르 떨리며 경련했다. 상처 입은 고양이의 몸에서 갑자기 백색 광휘가 뿜어졌다. 제국의 어떤 마법보다도 순수하고 압도적인 빛이었다.
장치와 성배가 공명하며 지하 전체가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리스의 체내에 잠들어 있던 마력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빛이 닿는 곳마다 검은 안개와 마수들이 흔적도 없이 증발했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조차 그 빛에 삼켜져 경계가 사라졌다.
아이리스의 의식이 하얀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침잠했다. 입에 문 장치에서 아버지의 낮은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킬리안은 빛에 휩싸인 아이리스를 놓지 않으려 팔을 조였다. 그의 은색 머리카락이 거센 마력의 바람에 흩날렸다.
빛이 최고조에 달하며 지하 창고의 대기가 비명을 질렀다. 정화의 힘은 벽면의 균열을 메우고 오염된 공기를 씻어냈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몸이 기묘하게 팽창하는 감각을 느꼈다. 고양이의 작은 골격이 비틀리며 인간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우득, 뼈가 어긋나고 다시 맞춰지는 생경한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짐승의 짧은 사지가 비정상적으로 길어지며 근육이 팽창했다. 털이 돋아났던 자리마다 매끄러운 살결이 돋아나며 차가운 지하 공기가 피부에 직접 닿았다. 폐부 깊숙이 인간의 호흡이 밀려들자 가슴이 찢어질 듯 부풀어 올랐다.
킬리안의 품 안에서 하얀 털이 사라지고 매끄러운 감촉이 닿았다. 그는 당혹감에 숨을 들이켜며 제 자리에 얼어붙었다. 빛이 잦아든 자리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여인이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목덜미를 잡은 채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피 냄새와 정화된 공기의 향이 기묘하게 섞여 들었다. 킬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등 뒤에 새겨진 붉은 자국에 멈췄다. 마수의 발톱 자국은 기괴한 문양으로 변해 검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녀의 손에 들린 기록 장치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킬리안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서둘러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의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턱 끝을 들어 올려 눈동자를 마주했다. 초점을 잃은 그녀의 눈에 비친 것은 공포가 아니었다.
아이리스는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뺨에 묻은 핏자국을 닦았다. 킬리안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리며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정적만이 감도는 지하 창고에 두 사람의 거친 호흡 소리만 울렸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이게 네 진짜 모습인가. 아이리스 에반스.
킬리안의 낮은 목소리가 젖은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이리스는 대답 대신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정신을 놓았다. 바닥에 떨어진 기록 장치가 기이한 점멸을 반복하며 빛났다. 멀리서 기사들의 구두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킬리안은 그녀를 안아 올린 채 부서진 제단을 뒤로하고 걸었다. 그의 등 뒤로 정화된 성배가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공명했다. 지하실 입구에 도착한 세바스티안이 경악 어린 표정으로 걸음을 멈췄다. 킬리안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검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이 여자는 내가 직접 심문하겠네.
공작의 서늘한 목소리에 세바스티안이 마력 탐지기를 내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이리스의 손에서 떨어진 은제 원통이 기사의 군화 끝에 닿아 챙그랑 소리를 냈다. 킬리안은 멈추지 않고 성결의 복도를 지나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이리스의 등에서 뿜어지던 검은 연기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녀의 쇄골 근처에 새겨진 낯선 문양은 여전히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그것은 금지된 마법의 흔적이자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비밀의 열쇠였다.
집무실의 육중한 문이 닫히자 킬리안은 그녀를 소파 위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장갑을 벗어 던진 그의 손등 위로 푸른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그는 책상 서랍 구석에서 정화의 성수를 꺼내 그녀의 상처 위로 쏟아부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아이리스의 몸이 한 번 크게 들썩였다. 그녀의 감긴 눈꺼풀 사이로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킬리안은 그 눈물을 손가락 끝으로 훑어내며 숨을 죽였다. 결벽증으로 점철된 그의 세계에 타인의 체액이 묻어났다.
불쾌함보다 앞선 것은 형언할 수 없는 기시감이었다. 킬리안은 그녀의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목덜미의 문양을 다시 확인했다. 그것은 멸문당한 에반스 가문의 인장이 아닌 황실의 금서에 기록된 고대 신성국의 문장이었다.
세계를 정화한 성녀의 피가 왜 네게 흐르고 있는 거지.
혼잣말처럼 내뱉은 목소리가 공허한 방 안을 떠돌았다. 아이리스의 손가락이 무의식중에 그의 소맷자락을 꽉 붙잡았다. 킬리안은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한동안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 창밖으로는 루미나리스의 새벽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겉옷에 머물렀다. 피로 더러워진 천 자락이 백색 대리석 위에서 흉물스럽게 흩어져 있었다. 평소라면 당장 태워버렸을 오염물이었으나 킬리안은 눈을 가늘게 뜨기만 했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아이리스의 호흡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갈 무렵 저택 외곽에서 다시 한번 경보음이 울렸다. 이번에는 지하 창고의 침입자가 아닌 정문을 돌파하려는 거대한 마력 반응이었다. 킬리안은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다시 움켜쥐며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집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며 레나르트가 창백한 안색으로 달려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황실의 인장이 찍힌 긴급 체포령이 들려 있었다. 레나르트의 시선이 소파 위의 여인에게 닿자마자 그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공작님. 지금 황실 근위대가 이 저택을 포위했습니다.
레나르트의 보고에 킬리안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그는 아이리스의 몸을 덮은 옷자락을 여며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검신에 맺힌 핏방울을 수건으로 닦아내는 그의 손길이 지나치게 우아했다.
죄목이 무엇인가.
반역자의 핏줄을 은닉하고 마법 오염원을 비호했다는 혐의입니다.
킬리안은 대답 대신 집무실 창가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수백 명의 실버 나이트가 횃불을 든 채 블랙 로즈 공작저를 겹겹이 에워싸고 있었다. 선두에 선 자는 황실 조사관 세바스티안이 아닌 황태자의 측근인 리버티 후작이었다.
준비가 너무 빠르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창틀을 짚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대리석 조각을 으스러뜨렸다. 아이리스가 신음하며 몸을 뒤척이자 킬리안은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몸을 낮췄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일렁이는 불빛이 비쳐 들어왔다.
아이리스. 네가 가져온 기록이 그들이 두려워하는 진실인가.
그는 대답 없는 여인의 손목을 잡아 자신의 가슴에 갖다 댔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그녀의 맥박에 맞춰 미세하게 파동치고 있었다. 그는 레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짧게 명령을 하달했다.
지하 통로를 개방해라. 이 여자를 데리고 에반스 가문의 옛 영지로 이동한다.
공작님. 그것은 정면으로 황명을 거역하는 일이 됩니다!
레나르트의 외침에도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단단히 안아 올릴 뿐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집무실 뒤편의 비밀 서고를 향했다. 등 뒤에서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킬리안은 어둠 속으로 몸을 던지며 아이리스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너를 죽여서라도 진실을 묻으려 했던 자들의 얼굴을 기억해라.
그의 목소리가 닫히는 석문 너머로 사라졌다. 아이리스는 희미하게 눈을 뜨며 자신을 안은 남자의 턱선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가락이 그의 옷깃을 스치며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섞여 길게 늘어졌다.
비밀 통로를 따라 흐르는 지하수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킬리안은 젖은 옷감이 살에 닿는 불쾌감을 견디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품 안에서 아이리스의 심장 박동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쳤다.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달싹이며 낯선 이름을 내뱉었다.
카시안.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킬리안의 걸음이 멈췄다. 황제의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증오와 슬픔이 배어 있었다. 킬리안은 그녀를 고쳐 안으며 통로 끝에서 비쳐오는 희미한 빛을 응시했다.
그들이 숨기려 했던 진짜 역사가 이제 네 입술을 통해 열리겠군.
킬리안은 빛을 향해 거침없이 발을 내디뎠다. 뒤편에서 추격자들의 마력 탐지기가 내뿜는 붉은 빛이 통로 벽면을 핥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검을 뽑아 통로 천장의 지지대를 단숨에 베어 넘겼다. 거대한 굉음과 함께 통로가 무너져 내리며 추격자들의 앞길을 막아섰다.
먼지 구름을 뒤로하고 숲속으로 빠져나온 킬리안은 멈추지 않았다. 아이리스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의 흰 셔츠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숲 저편에서 대기 중이던 검은 마차를 향해 달렸다. 마차 문이 열리고 킬리안이 그녀를 안은 채 안으로 몸을 실었다.
서둘러라. 북쪽 산맥으로 향한다.
마차 바퀴가 비명을 지르며 자갈길을 달리기 시작했다. 킬리안은 숨을 몰아쉬며 아이리스의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새겨진 문양이 더욱 선명한 광채를 내뿜으며 공명했다. 그것은 제국의 평화를 깨뜨릴 거대한 폭풍의 시작이었다.
아이리스의 손이 그의 뺨에 닿았다가 스르르 미끄러졌다. 킬리안은 그 작은 손을 꽉 움켜쥐며 창밖의 어둠을 쏘아보았다. 멀리 루미나리스 성벽 위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으나 그 빛은 축복이 아닌 전쟁의 선전포고와 같았다.
네가 살아남은 이유를 증명해 봐라. 아이리스 에반스.
킬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팍에 숨겨진 기록 장치로 향했다. 장치는 멈추지 않고 붉은빛을 깜빡이며 누군가의 마력 신호를 수신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국 어딘가에서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자가 보내는 경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