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관의 구두 소리가 대리석 복도 너머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육중한 서재 문이 닫히자 방 안은 수조 속처럼 고요해졌다. 공기는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킬리안은 손에 든 양피지를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블랙 로즈 상단의 붉은 인장이 찍힌 위조 공문이었다. 황실의 개입을 차단하기 위해 방금 급조된 거짓의 증거가 서늘한 조명 아래 산란했다. 그는 깃펜을 내려놓으며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책상 한구석에 웅크린 아이리스는 가늘게 떨리는 앞발을 털 속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 털 뭉치 너머로 느껴지는 시선은 피부를 뚫고 뼈를 긁어내는 듯했다. 남자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정적은 공포보다 더 잔인하게 목을 죄어왔다. 인간이었을 때보다 예민해진 감각은 공기 중에 섞인 그의 서늘한 체취를 집요하게 잡아냈다.
킬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리스의 뒷덜미를 가볍게 쥐었다. 손가락 끝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체온에 등줄기가 빳빳하게 굳었다. 그는 고양이를 안아 들고 서재 뒤편의 숨겨진 벽을 밀었다. 소리 없이 열린 공간 너머로 백색 대리석이 깔린 실험실이 나타났다. 에스테리아의 결벽을 상징하듯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는 공간이었다.
실험실 내부는 비정상적일 만큼 청결했다. 공기 중에는 독한 소독 약품 냄새와 정화 향의 서늘한 기운이 뒤섞여 있었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차가운 은제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금속의 냉기가 발바닥 패드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아이리스는 털을 바짝 세운 채 주변을 살폈다. 사방이 은과 백색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벽면을 채운 유리병 안에는 이름 모를 마력 촉매들이 기괴한 빛을 내뿜었다. 킬리안은 테이블 옆의 마력 조절 장치를 만지작거렸다. 기계음이 낮게 울리며 실험실의 조도가 한층 어두워졌다. 그는 테이블 앞에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
그의 얼굴이 아이리스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푸른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한없이 작고 초라했다. 킬리안의 긴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턱 끝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접촉한 부위에서 미세한 마력 파동이 일었다. 그의 절대 영역이 아이리스의 존재와 충돌하며 내는 파열음이었다.
"세바스티안 앞에서의 연극은 끝났다. 이제 네 안의 '그것'을 꺼내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짐승의 탈 뒤에 숨은 지성을 낱낱이 파헤치려는 집요함이 느껴졌다. 아이리스는 숨을 세 번 골랐다. 인간일 때부터 위기 상황마다 반복하던 습관이었다. 폐부 깊숙이 차가운 공기를 밀어 넣자 요동치던 박동이 조금 잦아들었다. 고양이의 몸은 본능적으로 도망치라 외치고 있었으나 이 남자의 손아귀를 벗어날 길은 어디에도 없었다.
"네 눈동자 속에 비친 건 공포가 아니군."
킬리안의 입술 끝이 비틀리듯 올라갔다. 그것은 호기심 어린 탐구자의 미소라기보다 사냥감을 몰아넣은 포식자의 것에 가까웠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은제 메스를 집어 들었다. 가느다란 칼날이 천장 조명을 받아 번뜩였다.
"이곳은 내 규칙만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그는 메스의 끝으로 아이리스의 앞발 근처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제국법도 황제의 권위도 이곳까지는 닿지 않는다. 오직 진실만이 너를 이 테이블 위에서 내려가게 할 것이다. 칼날이 아이리스의 하얀 털 끝에 닿을 듯 말 듯 머물렀다.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아이리스는 인간의 언어를 내뱉으려 입을 벌렸다. 가냘픈 고양이의 울음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목소리는 저주라는 단단한 벽에 부딪혀 형체도 없이 흩어졌다. 손끝이 떨려오고 시야가 흐릿해졌다.
킬리안은 메스를 내려놓고 대신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병 안에는 보라색 연기가 일렁이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마력 강제 추출액이었다. 짐승의 몸에 주입될 경우 영혼까지 갉아먹는 극약이다.
"마지막 기회다."
감정이 완전히 배제된 어조였다. 인간의 의지를 가졌다면 증명해라. 그렇지 않다면 너는 그저 흥미로운 해부용 표본으로 남게 될 테니까. 그가 유리병의 마개를 열자 역한 마력의 냄새가 진동했다. 아이리스의 꼬리가 바닥을 거칠게 내리쳤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돌려 테이블 위를 훑었다. 킬리안이 공문을 작성할 때 썼던 잉크병이 비스듬히 놓여 있었다. 검은 액체가 입구 근처까지 찰랑이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앞발을 뻗었다. 킬리안의 손이 주사기를 집어 들려던 찰나였다.
툭, 소리와 함께 잉크병이 넘어졌다. 진득한 검은 액체가 순백의 대리석 테이블 위로 번져나갔다. 킬리안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아졌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성격상 이 오염은 참기 힘든 도발이었을 것이다.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뗐다. 아이리스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검은 잉크가 묻은 앞발을 양피지 위로 가져갔다. 아이리스는 온 신경을 발끝에 집중했다. 젤리처럼 말랑한 발바닥은 글자를 쓰기에 최악의 도구였다. 기억 속의 획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아버지가 서재에서 가르쳐주었던 가문의 긍지가 담긴 그 이름을 떠올렸다.
에.
첫 획이 비뚤게 그어졌다. 반사적으로 숨이 막혀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반역자의 딸이라는 낙인 아래 숨겨진 진실을 전해야 했다. 잉크가 번져 형태가 뭉개지려 할 때마다 털을 세워 조절했다. 킬리안은 주사기를 든 채 석상처럼 굳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반.
두 번째 글자가 완성될 무렵 아이리스의 앞발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마력 억제 구속구가 채워진 몸으로 지적 능력을 행사하려 하자 저주의 반동이 찾아온 것이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지만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 글자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스.
마지막 획이 길게 꼬리를 물며 끝났다. 양피지 위에는 비뚤비뚤하고 투박한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졌다. 에반스. 제국 역사에서 지워진, 그리고 킬리안의 가문이 몰락시킨 가문의 이름이었다. 아이리스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들었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그는 자신이 들고 있던 주사기를 떨어뜨렸다. 유리병이 바닥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고 보라색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의 시선은 오직 양피지 위에 적힌 그 다섯 글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양피지를 움켜쥔 킬리안의 손등에 굵은 핏줄이 돋아났다. 종이가 바스라질 듯 구겨지는 소리가 고요한 실험실에 날카롭게 울렸다. 그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아주 나직하게, 마치 잃어버린 성물을 부르듯 입술을 뗐다.
"……아이리스 에반스."
그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너는 분명 그날 죽었어야 했다. 그의 눈에 서린 것은 단순한 놀라움이 아니었다. 거대한 운명의 수레바퀴가 다시 구르기 시작했다는 공포와 기묘한 열망이 뒤섞인 빛이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눈에서 일렁이는 복잡한 감정을 읽어냈다. 증오와 혼란, 그리고 아주 깊은 곳에 숨겨진 죄책감. 그녀는 앞발에 묻은 잉크를 털어낼 기력조차 없이 테이블 위에 쓰러졌다. 저주의 반동으로 온몸의 뼈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저택 전체를 뒤흔드는 날카로운 경보음이 실험실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붉은 마력 등이 점멸하며 백색의 공간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킬리안은 조건반사적으로 허리춤의 검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의 얼굴에서 방금 전의 동요는 씻은 듯이 사라지고 차가운 전사의 표정이 돌아왔다.
"누구냐."
그가 낮게 읊조렸다. 그의 절대 영역이 폭발적으로 확장되며 주변의 공기를 밀어냈다. 실험실 입구의 육중한 철문이 외부의 강력한 충격에 의해 안쪽으로 휘어졌다. 굉음과 함께 먼지 구름이 일었고 그 사이로 은색 갑주를 입은 그림자들이 나타났다.
실버 나이트들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황실 직인이 찍힌 압수 수색 영장이 들려 있었다. 선두에 선 기사가 검을 뽑아 들며 외쳤다. 블랙 로즈 공작, 금지된 흑마법 실험과 대역죄인 은닉 혐의로 황명에 따라 수색을 시작한다. 기사의 시선이 테이블 위의 아이리스에게 꽂혔다.
킬리안은 비웃음 섞인 헛웃음을 내뱉으며 아이리스를 품 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그는 잉크가 묻은 양피지를 손안에서 불태워버렸다. 재가 되어 흩어지는 가문의 이름 위로 그의 푸른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검신을 감쌌다.
"내 사유물에 손을 대고 싶다면 목숨을 걸어야 할 거다."
킬리안이 검을 휘두르며 기사들을 향해 도약했다. 아이리스는 그의 품 안에서 거세게 요동치는 박동을 느꼈다. 마주한 진실 앞에서 터져 나오려는 광기 어린 흥분이었다. 부서진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달빛이 킬리안의 차가운 눈동자를 비추었다.
그는 아이리스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살아남아라, 아이리스 에반스."
킬리안의 검이 선두 기사의 방패를 박살 내며 불꽃을 튀겼다. 아수라장이 된 실험실 한가운데서 아이리스는 정신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그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명령이자 이 지옥 같은 제국에서 그가 그녀에게 건네는 유일한 약속이었다. 킬리안은 기사들의 목을 향해 검을 고쳐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