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틀 너머로 비쳐 드는 새벽빛이 유난히 시렸다. 백색 대리석으로 마감된 침실은 먼지 한 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매끄러운 광택을 내뿜었다. 서늘한 민트 향이 섞인 소독약 기운이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을 타고 흐르는 듯했다.
아이리스는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시야가 낮았다. 복슬복슬한 앞발이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왔다. 인간의 손으로 돌아갔던 감각은 짧은 꿈처럼 사라지고, 다시금 하얀 털 뭉치로 돌아와 있었다. 옆구리 부근이 묵직했다. 고개를 돌리자 정교하게 감긴 붕대가 보였다. 매듭 하나까지 결벽증적인 완벽함을 자랑하는 솜씨였다. 누가 감았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침대 옆, 등받이가 높은 가죽 의자에 누군가 앉아 있었다. 킬리안 블랙 로즈였다. 그는 아이리스가 목숨을 걸고 챙겨왔던 은색 기록 장치를 손에 쥐고 있었다. 장치 위로 푸른 마력이 흐르며 공중에 투명한 영상이 맺혔다. 치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검은 안개가 뒤덮인 전장의 모습이 펼쳐졌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그 빛을 받아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의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앞발을 뻗어 침대 시트를 꾹 눌렀다. 천의 매끄러운 감촉이 발바닥에 닿았다. 킬리안은 그녀가 깬 것을 알면서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공중에 떠오른 영상 속에서 제국군 기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들을 덮치는 것은 마수가 아니었다. 아군이 휘두른, 성결의 힘이라 믿었던 백색 광휘였다. 정화라는 명목 아래 자행된 학살의 기록이었다.
킬리안의 턱 근육이 단단하게 뭉쳤다. 그가 입술을 떼자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가문이 지켜온 것이 이런 오물이었나."
대답할 수 있는 입이 없었다. 아이리스는 대신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상처 부위가 욱신거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킬리안의 주변을 감싼 절대 영역이 미세하게 파동치고 있었다. 평소라면 오염원이라며 밀어냈을 그 공간이 지금은 속수무책으로 흔들렸다. 그의 발치에 다가가 앞발로 장화 끝을 톡 건드렸다.
킬리안의 시선이 그제야 아래로 내려왔다. 분노인지 알 수 없는 열기가 그의 눈 안쪽에서 소용돌이쳤다. 그는 장치를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등의 뼈마디가 하얗게 불거졌다.
"이것이 세상에 알려지는 날, 제국은 무너질 것이다."
킬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그의 뒷모습이 아침 햇살을 받아 날카로운 윤곽을 그렸다. 아이리스는 침대 위에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다시 냉혹한 공작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에반스 백작은 이 진실을 이용해 황실을 협박하려 한 건가."
아이리스의 목 안쪽이 뜨거워졌다. 아버지는 협박이 아니라 복원을 원했다. 지워진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했던 것뿐이었다. 킬리안은 창틀을 짚은 채 말을 이었다.
"네 아버지는 영웅이었나, 아니면 제국을 파멸로 몰아넣을 시한폭탄이었나."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그를 쏘아보았다. 에테르 링이 존재하지 않는 고양이의 몸에서 희미한 마력이 흘러나왔다. 킬리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의구심과 혼란이 뒤섞였다. 그는 다시 의자에 앉아 기록 장치의 마지막 버튼을 눌렀다. 장치가 과열된 듯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영상의 노이즈가 걷히고, 한 남자의 얼굴이 화면 가득 나타났다. 아이리스의 아버지, 에반스 백작이었다. 그의 얼굴은 피와 먼지로 얼룩져 있었다. 하지만 눈동자만큼은 아이리스의 그것처럼 선명하게 빛났다. 백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화면 너머의 누군가를 간절하게 부르는 목소리였다.
- 킬리안, 자네라면 이 비극을 끝낼 수 있을 걸세.
킬리안의 손에서 기록 장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힌 금속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굴렀다.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초점을 잃었다. 아이리스는 그가 내뱉는 짧은 숨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강철 같던 남자가 처음으로 내보인 균열이었다. 킬리안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째서, 내 이름을."
공작의 목소리가 젖은 낙엽처럼 바스라졌다. 아이리스는 침대 가장자리로 기어갔다. 그의 손등에 조심스럽게 앞발을 올렸다. 킬리안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그는 고개를 들어 아이리스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검은 눈동자 너머로 형용하기 어려운 파동이 일었다.
"이 기록은 십 년 전의 것이다."
그가 낮게 읊조리며 아이리스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쥐었다.
"에반스 백작은 죽기 직전까지 너를 숨긴 게 아니었군."
킬리안의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귀 뒷부분을 느리게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은 정교하면서도 어딘가 위태로웠다.
"그는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
아이리스는 꼬리를 말아 제 몸을 감쌌다.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기록이 왜 킬리안을 향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두 가문은 정화 전쟁 이후 철저한 타인이었다. 적어도 아이리스가 기억하는 한 그랬다.
킬리안이 바닥에 떨어진 장치를 다시 집어 들었다. 그의 손끝에 닿은 마력석이 희미하게 명멸했다. 장치 하단에 새겨진 작은 문양이 보였다. 검은 장미와 백합이 얽힌 형태였다. 그것은 두 가문의 결합을 상징하는 인장이었다.
아이리스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제국법상 가문의 인장을 합치는 것은 오직 혼약뿐이었다. 킬리안이 그녀의 시선을 읽은 듯 입가에 비틀린 미소를 띄웠다.
"몰랐던 모양이군, 내 약혼녀여."
그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아이리스는 숨을 들이켜려 했으나 고양이의 폐는 너무나 작았다. 킬리안이 그녀를 품에 안아 올렸다. 그의 품에선 여전히 차가운 민트 향이 났다. 하지만 가슴팍에 닿은 고동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그는 아이리스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속삭였다.
"에반스 백작은 너를 내게 맡긴 게 아니다."
그의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턱밑을 부드럽게 긁었다.
"나를 너에게 귀속시킨 거지."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그의 소매를 앞발로 붙잡았다. 킬리안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재 구석의 비밀 금고를 향해 걸어갔다. 두꺼운 철문이 마력 반응에 응답하며 묵직한 소리를 냈다. 그 안에는 '정화의 성배'가 빛을 내며 안치되어 있었다. 아이리스의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였다.
킬리안이 성배를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성배의 표면이 아이리스의 하얀 털과 공명하듯 은은하게 빛났다.
"이것이 필요한가."
그가 성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려다 멈췄다. 그의 눈빛이 지나치게 소유욕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킬리안은 그녀의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그는 성배 안에 든 맑은 액체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저었다.
"인간으로 돌아가면 너는 다시 반역자의 딸이 된다."
그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내 곁에 이 모습으로 머문다면, 너는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사유물이 될 수 있지."
아이리스는 그의 손등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할퀴었다. 붉은 선이 그의 하얀 피부 위로 선명하게 그어졌다. 킬리안은 아픈 기색도 없이 자신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흐르는 피를 혀로 핥아 올리며 눈을 가늘게 떴다.
"길들이기 어려운 짐승이군."
그가 아이리스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성배의 빛이 아이리스의 온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변화의 전조가 골수까지 저릿하게 파고들었다. 킬리안이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들이댔다.
"기회를 주지, 아이리스 에반스."
그의 손이 아이리스의 등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나를 죽일지, 아니면 나의 주인이 될지 선택해라."
아이리스는 성배를 향해 앞발을 뻗었다. 강렬한 빛이 시야를 하얗게 덮쳤다. 그 순간 복도 너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킬리안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었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세바스티안이 들이닥쳤다. 그의 손에는 붉은 빛을 내뿜는 마력 탐지기가 들려 있었다. 탐지기의 바늘이 아이리스를 향해 미친 듯이 회전했다.
"공작님, 이 방에서 금지된 마력 반응이 감지되었습니다."
세바스티안의 시선이 책상 위의 고양이와 성배에 고정되었다. 킬리안이 아이리스의 앞을 가로막으며 검 손잡이를 쥐었다.
"내 허락 없이 이 방에 발을 들인 자는 대가를 치러야 할 텐데."
세바스티안이 탐지기를 내려놓으며 차갑게 웃었다.
"황실의 명입니다, 그 고양이를 넘기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