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의 새벽은 서늘한 은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육중한 말발굽 소리가 정적을 거칠게 짓밟았다. 대리석 바닥을 타고 불길한 진동이 전해졌다. 아이리스는 하얀 앞발을 오므리며 귀를 쫑긋 세웠다.
무례한 발소리로군.
킬리안이 은제 만년필을 내려놓았다. 공기 중에 희박한 금속취와 마력 냄새가 섞여 들었다. 서재의 공기는 인공 기후 제어 장치 덕에 쾌적했으나, 문밖에서 밀려오는 긴장감은 차단하지 못했다.
공작님, 황실 조사관 세바스티안입니다!
문 너머에서 들리는 외침은 날카로운 송곳 같았다. 킬리안의 미간이 미세하게 비틀렸다. 그는 질서를 숭상하는 남자였다. 예고 없는 방문은 그에게 오염과 다름없었다.
당장 문을 열지 않으면 황명을 거역하는 것입니다.
세바스티안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적의가 서려 있었다. 킬리안의 반경 10미터 이내에서 불꽃이 일렁였다. 절대 영역이 외부의 불결한 마력을 밀어내고 있었다. 책상 위에서 몸을 웅크리던 아이리스는 작게 몸을 떨었다.
고양이가 된 이후 모든 감각이 예민해져 있었다. 복도를 메운 기사들의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마력 탐지기가 내뱉는 비프음이 고막을 찔렀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소매를 앞발로 툭 건드렸다.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킬리안의 시선과 맞닿았다. 킬리안은 잠시 침묵하며 고양이의 눈을 응시했다. 그는 감정을 논리적 오류로 치부하는 남자였으나, 지금 고양이의 눈에 서린 것은 명백한 의지였다.
도망치라는 뜻인가.
킬리안이 낮게 읊조리며 아이리스의 머리를 감쌌다. 가느다란 털 사이로 그의 서늘한 체온이 전해졌다. 아이리스는 목 안쪽에서 낮은 울음을 삼켰다. 그녀는 인간이었을 때보다 더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뒷다리에 힘을 주며 킬리안의 어깨 위로 올라갔다. 작은 발톱이 그의 실크 셔츠를 살짝 파고들었다. 평소라면 불결하다며 털어냈을 그였으나, 킬리안은 오히려 그녀를 떨어지지 않게 붙잡았다.
서재 문이 거칠게 열리며 은색 갑옷들이 들이닥쳤다. 실버 나이트의 기사들이 반원형으로 길을 텄다. 그 사이로 보라색 법복을 입은 세바스티안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붉게 점멸하는 탐지기가 들려 있었다.
블랙 로즈 공작, 제국법 제12조를 집행하러 왔다.
세바스티안이 입꼬리를 비틀며 탐지기를 치켜들었다. 기계는 아이리스를 향해 날카로운 경고음을 내뱉었다. 서재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은 듯 차가워졌다. 아이리스의 등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유해 조수를 은닉한 죄는 가볍지 않을 텐데.
내 저택에 발을 들일 때는 예법부터 갖춰야지.
킬리안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세바스티안을 내려다보았다. 압도적인 마력의 파동이 기사들의 숨통을 조였다. 몇몇 기사들이 뒷걸음질 치며 검자루를 움켜쥐었다.
아이리스는 세바스티안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동자 너머로 몰락하던 가문의 잔상이 스쳤다. 아버지를 반역자로 몰아세우던 그 비릿한 웃음이었다. 목구멍이 뜨거워지며 낮은 하악질이 터져 나왔다.
그 짐승이 에반스 가문의 생존자라는 소문이 있더군.
세바스티안이 한 걸음 다가오며 마력을 개방했다. 그의 주변으로 끈적하고 불쾌한 안개가 피어올랐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그 안개를 즉각 소멸시켰다. 두 남자의 마력이 허공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증거도 없는 추측은 논리적 비약에 불과해.
킬리안이 차갑게 대꾸하며 아이리스를 코트 안으로 넣었다. 어둠 속에서 그의 심장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평소보다 빠른 고동이 아이리스의 뺨에 고스란히 닿았다. 논리를 따지던 남자의 심장은 정직하게 뛰고 있었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보면 되겠군. 정화의 빛으로.
세바스티안이 품 안에서 루비아 마나 스톤을 꺼냈다. 보석이 뿜어내는 붉은 빛이 서재를 물들였다. 그것은 고위 마법사가 사용하는 광역 탐지 마법이었다. 아이리스의 몸 안에서 에테르 링이 요동쳤다.
저주받은 신체가 마법 반응에 격하게 거부감을 보였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셔츠를 찢을 듯이 발톱을 세웠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술 사이로는 신음만 샜다. 킬리안이 그녀의 작은 몸을 단단히 압박했다.
내 허락 없이 마법을 전개하는 것은 선전포고인가.
킬리안의 손이 허리춤에 찬 검자루에 머물렀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아이리스는 보았다. 결벽증인 그는 타인의 체액이나 먼지를 극도로 꺼렸다. 하지만 지금 그는 고양이의 침과 털을 감내하고 있었다.
공작, 이 짐승은 제국의 오염원일 뿐입니다!
집사 레나르트가 세바스티안의 뒤에서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은으로 세공된 소독용 단검이 들려 있었다. 평소의 정중함은 간데없고 눈에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레나르트, 너까지 제정신이 아니군.
주인님을 위해서입니다. 이 불결한 것을 치워야 합니다!
레나르트가 단검을 휘두르며 킬리안에게 달려들었다. 세바스티안의 탐지 마법이 동시에 서재를 휩쓸었다. 아이리스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에 눈을 감았다. 사방에서 날카로운 마력의 파편이 튀었다.
챙!
고막을 찢는 듯한 금속음이 서재를 울렸다. 킬리안의 검이 레나르트의 단검을 가볍게 튕겨냈다. 그의 검 끝은 이제 세바스티안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단 1밀리미터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궤적이었다.
내 규칙은 내가 정한다. 이 저택의 주인은 나다.
킬리안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의 어깨 위에 매달린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었다. 세바스티안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는 순간이었다. 탐지기가 비정상적인 수치를 내뿜으며 과부하를 일으켰다.
이 고양이는 내 연구를 위한 사유물이다.
공작, 미쳤군! 짐승을 위해 황명을 거역하겠다는 건가!
세바스티안이 소리를 지르며 기사들에게 수신호를 보냈다.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고 포위망을 좁혔다. 서재의 책상과 의자들이 마력의 압박에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화분 속의 백합이 힘없이 짓밟혔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목덜미를 핥았다. 고양이의 혀가 닿는 순간 킬리안의 몸이 굳었다. 하지만 이내 그의 눈동자에는 전보다 더 짙은 살기가 서렸다. 그는 왼팔로 아이리스를 감싸 안으며 도약했다.
창문 유리창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박살 났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품에 안은 채 2층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차가운 새벽바람이 아이리스의 수염을 거칠게 흔들었다. 땅에 닿는 충격이 킬리안의 다리를 타고 전해졌다.
꽉 잡아라. 떨어지면 국물도 없으니까.
킬리안이 정원을 가로지르며 낮게 읊조렸다. 뒤편에서 기사들의 고함과 말 울음소리가 추격해왔다. 블랙 로즈 공작령의 백색 대리석들이 달빛에 번뜩였다. 아이리스는 킬리안의 품 안에서 꼬리를 말아 쥐었다.
정원 끝의 비밀 통로인 순백의 복도가 보였다. 평소에는 철저히 소독된 자들만 출입할 수 있는 성역이었다. 킬리안은 망설임 없이 그곳의 마법 봉인을 해제했다. 그의 마력이 문틈으로 흘러 들어가며 길을 열었다.
복도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킬리안은 등을 돌려 문을 폐쇄했다. 거대한 돌문이 웅장한 소리를 내며 외부와 단절됐다. 추격자들의 목소리가 멀어지며 복도 안에는 정적만이 남았다. 킬리안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
하, 내 인생에서 가장 비논리적인 행동이군.
그가 아이리스를 바닥에 내려놓으며 장갑을 벗어 던졌다. 가죽 장갑 위에는 아이리스의 하얀 털 몇 가닥이 묻어 있었다. 킬리안은 혐오감을 드러내는 대신 자신의 손등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리스는 앞발로 그의 장화를 툭툭 쳤다. 그리고는 복도 벽면에 새겨진 에반스 가문의 문장을 가리켰다. 과거 성녀의 기록관이었던 가문만이 알 수 있는 은밀한 표식이었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졌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이건 어머니의 유품에 있던 문양인데.
킬리안이 벽면의 문양에 손을 갖다 대는 순간이었다. 복도 바닥이 진동하며 숨겨진 지하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계단 아래에서는 푸른색의 마력이 은은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정화의 성배가 내뿜는 빛이었다.
아이리스는 먼저 계단 아래로 몸을 날렸다. 킬리안은 잠시 주춤하다가 이내 그녀의 뒤를 쫓아 내려갔다. 계단 끝에 도착했을 때 그들을 맞이한 것은 거대한 제단이었다. 제단 위에는 황금빛 액체가 담긴 성배가 놓여 있었다.
이것이 너를 인간으로 되돌릴 열쇠인가.
킬리안이 성배를 향해 손을 뻗으려 할 때였다. 제단 뒤쪽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아이리스는 하악질을 하며 털을 세우고 경계했다.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것은 죽은 줄 알았던 아이리스의 아버지였다.
오랜만이군, 블랙 로즈 공작. 내 딸을 데려와 줘서 고맙네.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 기록관의 예복을 입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아이리스가 그토록 찾던 금서의 원본이 들려 있었다. 킬리안은 검을 고쳐 쥐며 아버지와 아이리스 사이를 가로막았다.
당신은 반역자로 처형되었을 텐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지. 진짜 전쟁은 이제 시작이라네.
아버지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금서를 펼쳤다. 책 안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성배의 빛을 가렸다.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아버지가 예전의 그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눈에는 인간의 지성 대신 짐승의 안광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는 금서에서 뽑아낸 검은 실타래를 아이리스에게 던졌다. 킬리안이 급히 검을 휘둘러 실타래를 베어냈다. 그러나 잘린 실타래는 연기가 되어 아이리스의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아이리스의 의식이 급격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에반스의 마지막 기록 장치야. 내게 넘겨라.
아버지가 기괴하게 뒤틀린 목소리로 명령했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자신의 등 뒤로 밀어내며 대지에 검을 박았다. 절대 영역이 팽창하며 지하 실험실의 모든 기물을 가루로 만들었다.
내 소유물을 넘기라고? 제안치고는 꽤 무례하군.
킬리안이 피가 섞인 가래를 뱉으며 세바스티안보다 더 차가운 눈빛으로 아버지를 응시했다.
이 고양이는 오늘부터 내 아내다.
킬리안이 성배를 발로 차서 깨뜨리며 아버지를 향해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