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가 난도질하듯 뺨을 할퀴었다. 시야는 온통 뿌연 수증기로 뒤덮여 한 치 앞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킬리안의 품에 안긴 아이리스는 젖은 털을 가늘게 떨며 그의 셔츠 자락을 앞발로 꽉 움켜쥐었다. 귓가를 때리는 것은 거친 숨소리와 빗소리뿐이었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작은 몸을 부서질 듯 감싸 안았다. 등 뒤에서 고막을 찢는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세바스티안이 발사한 마력 탄환이 지면을 짓이긴 흔적이었다. 흙먼지와 빗물이 뒤섞인 매캐한 냄새가 비강을 찔렀다.
비밀 통로는 이미 붕괴의 전조를 내비치고 있었다. 축축한 흙벽 사이로 앙상한 나무뿌리들이 기괴하게 튀어나와 앞길을 가로막았다. 안개 숲 네벨의 경계가 가까워질수록 대기는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폐부를 찌르는 서늘한 기운에 아이리스는 몸을 더 깊숙이 웅크렸다. 킬리안의 흰 셔츠는 이미 진흙과 오물로 엉망이 된 상태였다. 결벽에 가까운 청결을 숭상하며 오염된 공간에서 호흡조차 힘겨워하는 그에게 지금의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를 안은 팔에 더욱 강한 힘을 실을 뿐이었다.
바닥이 움푹 패며 고여 있던 웅덩이가 사방으로 튀었다. 킬리안은 비틀거리면서도 무게 중심을 잃지 않고 전방을 향해 쇄도했다. 그의 발치 뒤로 은색 섬광이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나무 밑동이 단숨에 가루가 되어 흩날리는 광경이 망막에 박혔다. 추격자들의 기척은 이미 숲 전체를 촘촘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꼬리가 바짝 오그라들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그를 벼랑 끝으로 밀어 넣고 있다는 자책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제국의 고결한 공작이 고양이 한 마리를 지키기 위해 반역자로 몰리는 비논리적인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기도가 타들어 가는 듯했다. 아이리스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젖은 앞발로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저항했다. 지금이라도 자신을 버린다면 그는 공작의 지위와 명예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순간 아이리스의 예민한 감각에 기이한 위화감이 포착되었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을 유지하는 황금빛 마력막이 그녀의 신체와 닿는 지점에서 미세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아나테마의 저주가 깃든 자신의 마력이 킬리안의 순수한 마력과 충돌하며 간섭 현상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대로 붙어 있다가는 그의 방어 기제 자체가 붕괴할 것이라는 지성적인 판단이 뇌리를 스쳤다.
아이리스는 냐앙, 하고 짧고 날카로운 비명을 내뱉었다. 제발 놓아달라는, 이대로는 둘 다 공멸할 뿐이라는 간절한 경고였다. 가시덤불이 킬리안의 뺨을 할퀴고 지나가며 붉은 선혈을 만들어냈다. 상처에서 배어 나온 피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는 것을 보며 아이리스는 가슴 안쪽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인간의 언어를 뱉을 수 있었다면 비명이라도 질렀을 터였다. 그녀는 기어이 그의 팔 사이를 빠져나와 진흙탕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발바닥에 닿는 축축하고 불쾌한 감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는 숲의 어둠 속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거리를 두어야 그의 영역이 안정될 것이었다.
멈춰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채찍처럼 날아와 꽂혔다. 아이리스는 앞발에 힘을 주어 속도를 높였다. 심장 박동이 고막을 터뜨릴 듯 거세게 요동쳤다. 발바닥에 날카로운 돌부리가 박히는 감각이 선명했으나 통증보다 죄책감이 더 날카롭게 폐를 찔렀다. 자신만 사라진다면 그는 다시 제국의 태양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에반스의 낙인은 자신 혼자 짊어지고 사라지면 그만인 일이었다. 바로 그 찰나,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시야를 차단했다.
단단한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꼬리를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하게 낚아챘다.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다시 차가운 빗속에서 그의 뜨거운 품으로 회귀한 순간이었다. 킬리안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더 짙은 청색으로 타오르며 이성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는 아이리스를 바닥에 내려놓는 대신 자신의 젖은 외투를 벗어 그녀의 몸을 꽁꽁 감싸 쥐었다.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아이리스는 놓치지 않았다.
도망치지 마라.
킬리안의 목소리는 거센 빗소리를 뚫고 명확하게 고막에 와닿았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셔츠를 앞발로 긁어댔다. 자신 때문에 그가 파멸의 길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묵과할 수 없었다. 제국법 제12조는 서슬 퍼런 칼날과 같았다. 변이된 짐승을 비호하는 자는 그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극형에 처해졌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모든 생애를 걸고 승산 없는 도박을 벌이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눈가에 맺힌 액체가 차가운 빗물인지, 아니면 억눌러온 감정의 잔해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내 영역은 이제 네가 존재하는 곳까지다.
그의 선언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 어떤 맹세보다도 묵직하게 심장을 파고들었다. 킬리안은 아이리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볍게 맞댔다. 그의 체온이 젖은 털 사이로 스며들며 얼어붙은 감각을 일깨웠다. 이것은 단순한 동정이 아니었다. 뒤틀린 제국의 역사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는 강인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아이리스는 저항을 멈추고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다. 홀로 모든 것을 감내하려 했던 오만한 고집이 그의 단호함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다시 마력 탄환이 머리 위를 가르며 숲의 정적을 깼다. 킬리안은 그녀를 고쳐 안고 숲 안쪽을 향해 몸을 날렸다. 안개 숲의 미아즈마가 더욱 짙어지며 시야를 가로막았다. 공기는 비릿한 금속성 냄새로 가득 찼고 보라색 안개가 발목을 휘감으며 생기를 빨아들였다. 킬리안의 절대 영역이 발동하며 주변의 오염원을 밀어내자 투명한 막이 형성되며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졌다.
아이리스는 그의 품 안에서 주변의 지형을 살폈다. 숲의 나무들은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고 잎사귀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서늘한 빛을 냈다. 제국의 공식 역사에서 지워진 진실이 이 안개 속에 은닉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남긴 기록 장치는 여전히 그녀의 체내 마력과 공명하며 일정한 파동을 내보내고 있었다. 특정 방향으로 향할수록 흉곽 안쪽이 징징거리는 진동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앞발을 들어 서쪽의 거대한 고목을 가리켰다.
저기군.
킬리안은 망설임 없이 그 방향으로 발을 내디뎠다. 뒤편에서는 세바스티안의 고함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실버 나이트의 마력 탐지기가 내뿜는 붉은 광선이 안개를 찢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짐승을 사냥하는 몰이꾼처럼 포위망을 좁혀왔다. 킬리안의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마력석 루비아를 매개로 하지 않은 무영창 마법의 반동이 그의 신체를 안쪽부터 갉아먹고 있었다. 그의 소매 끝에 박힌 고순도 루비아 커프스링크가 비정상적인 열기를 내뿜으며 비명을 질렀다. 이윽고 파지직거리는 소름 끼치는 소음과 함께 붉은 보석 표면에 하얀 균열이 거미줄처럼 번져 나갔다. 입가에서 흘러내린 핏방울이 아이리스의 하얀 털 위로 점점이 얼룩을 남겼다.
아이리스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눈을 감았다. 그가 흘린 피의 온기가 너무도 뜨거워 목 안쪽이 따가웠다. 조금만 더 가면 되었다. 숲의 가장 깊은 곳, 마력이 가장 순수한 원형을 유지하는 지점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대기 중의 에테르 농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마침내 안개를 헤치고 거대한 제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 신성국의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백색 대리석이었다.
제단 중앙에는 맑은 액체가 고인 작은 웅덩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성녀의 눈물이라 불리는 전설적인 정화 촉매였다. 그 영롱한 빛줄기가 빗속에서도 은은한 광채를 발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아이리스의 저주를 풀고 은폐된 진실을 밝힐 유일한 열쇠가 그곳에 있었다. 킬리안은 마지막 남은 마력을 쥐어짜 제단 위로 도약했다. 그의 발이 대리석 바닥에 닿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멈춘 듯 기묘한 정적이 숲을 지배했다.
성공인가.
킬리안이 거친 숨을 내뱉으며 아이리스를 바닥에 내려놓으려 팔을 풀었다. 그의 손등에는 푸른 힘줄이 돋아나 고통스러운 인내를 증명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성녀의 눈물이 담긴 웅덩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발을 뻗었다. 그 투명한 액체에 몸을 적시기만 하면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갈 터였다. 아버지의 누명도, 짐승의 모습으로 연명해야 하는 굴욕도 사라질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차가운 금속음이 정적을 무참히 깨뜨렸다.
파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허공에서 은색 사슬이 뱀처럼 튀어나왔다. 세바스티안이 미리 매복시켜 둔 마력 구속구였다. 그것은 킬리안이 대응할 틈도 없이 아이리스의 작은 몸을 낚아챘다.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아이리스는 허공으로 사정없이 끌려 올라갔다. 차가운 금속 고리가 목과 몸통을 조여 오며 호흡을 가로막았다. 폐가 압착되는 고통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안 돼!
그가 제단 위로 몸을 날렸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아이리스의 몸이 제단 중앙의 마법진에 닿는 순간, 바닥에 새겨진 고대 문양들이 황금빛으로 폭발하며 사방을 집어삼켰다. 제단의 방어 결계가 작동한 것이었다. 거대한 빛의 장벽이 킬리안과 아이리스 사이를 잔인하게 가로막으며 솟구쳐 올랐다. 킬리안의 주먹이 투명한 벽을 두드렸으나 날카로운 불꽃만 튈 뿐 장벽은 요지부동이었다. 아이리스는 구속구에 묶인 채 빛의 소용돌이 속으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멀어지는 의식의 끝자락에서 세바스티안의 비릿한 미소가 망령처럼 어른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마력석이 기괴한 진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진동에 호응하듯 아이리스의 저주가 증폭되며 온몸의 뼈가 마디마디 끊어지는 극심한 통증이 밀려왔다. 결계 너머에서 들려오는 킬리안의 절규가 점점 희미해졌다. 빛이 시야를 완전히 덮치기 직전, 아이리스는 자신의 골격이 기괴하게 비틀리며 팽창하는 감각에 휩싸였다.
구속구의 사슬이 아이리스의 살점을 파고들며 붉은 낙인을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