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단 위로 비린 마력이 진동했다. 흰 털 사이로 번지는 광채가 시야를 가로막았다. 아이리스는 비명을 삼키며 몸을 한껏 웅크렸다. 뼈마디가 어긋나고 가죽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호흡을 고를 틈조차 허락되지 않는 통증이었다. 억지로 벌어진 목구멍 안쪽이 화끈거렸다. 폐부 깊숙한 곳까지 타오르는 열기가 밀려들었다.
작은 앞발이 바닥을 긁어내며 길게 늘어났다. 뾰족한 발톱이 빠진 자리에서 매끄러운 손가락이 돋았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마력의 파동에 등줄기가 휘어졌다. 시야가 명멸하며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킬리안이 제단 가장자리로 성큼 다가섰다. 그의 절대 영역이 백색 광휘와 부딪히며 파열음을 냈다. 공기 중의 먼지가 타닥 소리를 내며 소멸했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검 자루를 고쳐 쥐었다. 정갈한 장갑 위로 핏방울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결계의 파동이 그의 손등을 사정없이 할퀴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꽂았다. 은제 검신이 제단 중심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마력의 흐름이 강제로 뒤틀리며 소용돌이쳤다. 킬리안의 팔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그는 이를 악물며 뒤틀린 마력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타들어 가는 피부의 감각이 뇌를 찔렀다. 검은 연기가 그의 발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공간이 오염되는 불쾌한 감각에 킬리안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검을 비틀었다. 제단에서 뿜어져 나온 정화의 빛이 어둠과 충돌했다. 굉음과 함께 석판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다. 화약 냄새와 썩은 이끼 향이 코끝을 찔렀다. 폐가 굳어가는 듯한 압박감이 전신을 짓눌렀다.
세바스티안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제단으로 도약했다. 지팡이 끝에 매달린 마력석이 기괴하게 점멸했다. 그것은 제국의 금기인 무영창 흑마법이었다. 끈적한 어둠이 킬리안의 등 뒤를 노리고 쇄도했다. 공기 중에 섞인 미아즈마가 피부를 따갑게 자극했다.
아이리스의 시야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고양이의 작은 앞발이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변했다. 매끄러운 피부 위로 식은땀이 줄기처럼 흘러내렸다. 그녀는 바닥에 떨어진 낡은 쪽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파르르 떨리며 종이 가장자리를 움켜쥐었다. 손톱 끝이 돌바닥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쪽지에 적힌 글자들이 마력을 머금고 명멸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남긴 최후의 기록이었다. 아이리스는 갈라진 목소리로 주문의 마지막 절을 뱉었다. 공기가 얼어붙듯 차갑게 식어 내렸다.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숨결이 하얗게 흩어졌다.
세바스티안의 발치에서 마력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가 휘두르던 흑마법의 줄기가 제 주인을 향해 꺾였다. 조사관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지며 뒤로 넘어졌다. 자신의 마력에 먹혀 들어가는 그의 비명이 동굴을 울렸다. 그는 허공을 긁으며 바닥을 뒹굴었다.
아이리스는 무너지는 제단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리며 바닥이 가깝게 다가왔다. 무릎이 딱딱한 돌바닥에 닿기 직전이었다. 단단하고 서늘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코끝에 익숙한 항마력 향수 냄새가 닿았다. 킬리안의 품은 생각보다 넓고 단단했다.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아이리스를 붙들었다. 그의 옷자락에 묻은 핏물과 먼지가 아이리스의 뺨에 묻어났다. 킬리안의 심장 박동이 늑골을 타고 전해졌다.
세바스티안은 바닥을 기며 멀어지려 애썼다. 그의 손등에 새겨진 마력의 낙인이 검게 타들어 갔다. 아이리스는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입술을 뗐다. 목소리는 낮았으나 얼음처럼 견고했다.
"기록은 죽지 않아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정적 속에서 선명하게 울렸다.
"당신들이 지운 진실이 바로 나니까."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묵직한 금서 한 권이 들려 있었다. 세바스티안의 몰락과 제국의 치부가 적힌 증거였다. 세바스티안은 헛웃음을 흘리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힘없이 꺾였다.
주변을 감돌던 살벌한 마력 반응이 가라앉았다. 동굴 내부에는 거친 호흡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들렸다. 킬리안은 대답 대신 그녀의 어깨를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끝의 떨림이 그녀의 얇은 옷감을 뚫고 들어왔다.
아이리스의 눈가에 고였던 긴장이 눈물이 되어 뺨을 탔다. 뜨거운 액체가 턱끝을 타고 킬리안의 옷깃으로 떨어졌다. 킬리안은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그는 자신의 가슴팍을 적시는 온기를 묵묵히 받아냈다.
그는 피로 얼룩진 흰 장갑을 거칠게 벗어 던졌다. 맨손이 차가운 공기 속으로 드러났다. 결벽증을 가진 그에게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허공에 떨어진 장갑 위로 먼지가 가라앉았다.
그의 투박한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뺨에 닿았다. 거친 지문이 눈물자국을 조심스럽게 훑어 내렸다. 킬리안의 눈동자 속에서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일어났다. 그는 자신의 손끝에 묻은 습기를 멍하게 응시했다.
그는 젖은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아이리스를 더 깊숙이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맨살과 맨살이 맞닿은 곳에서 심장 박동이 불규칙하게 엉켰다. 킬리안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닿을 듯 가깝게 내려앉았다.
"더럽군."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하지만 이 감촉은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군."
킬리안의 손이 아이리스의 뒷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그가 그녀의 이마를 자신의 어깨에 깊이 파묻게 했다. 아이리스는 그의 목덜미에서 풍기는 서늘한 체향에 눈을 감았다.
전신을 감싸던 아나테마의 잔재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아이리스의 손가락 끝이 그의 정장 소매를 꽉 움켜쥐었다. 킬리안의 품 안에서 그녀의 작은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당신은 나를 증오해야 할 텐데."
아이리스의 속삭임은 킬리안의 셔츠 안으로 스며들었다. 킬리안은 대답 대신 그녀의 허리를 받친 팔에 힘을 더했다. 그의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아이리스의 척추를 타고 번졌다.
"이 오염된 공기 속에서 숨을 쉬는 건 죄악이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으나 어조는 미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하지만 그대의 심장 소리가 내 맥박보다 더 선명하게 들리는군."
킬리안의 시선이 동굴 입구의 어둠을 날카롭게 훑었다. 아직 정화되지 않은 마력의 찌꺼기가 대기 중에 부유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절대 영역을 한껏 넓혀 아이리스를 감쌌다.
아이리스는 그의 가슴에 뺨을 비비며 젖은 숨을 내뱉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금서가 바닥에 떨어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킬리안은 바닥에 떨어진 책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규칙을 어기고 오염된 존재를 품에 안았다. 맨손에 닿는 그녀의 피부는 비단처럼 매끄럽고 뜨거웠다. 킬리안은 자신의 손가락이 그녀의 목덜미를 파고드는 감각에 집중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자 통제 불능의 변수였다.
그의 이성이 경고음을 내뱉었지만 본능은 그녀를 놓지 않았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을 발하며 가라앉았다. 그는 아이리스의 젖은 속눈썹 위로 자신의 손등을 덮었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안아 든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걸음이 무너진 제단의 잔해를 짓밟으며 나아갔다. 세바스티안의 신음 소리가 등 뒤에서 멀어져 갔다.
아이리스는 그의 품에서 작은 신음을 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킬리안의 가슴팍에 묻은 피가 그녀의 콧날을 붉게 물들였다. 킬리안은 걸음을 멈추고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공작저의 모든 규칙을 다시 써야겠군."
그는 아이리스의 뺨에 묻은 자신의 핏자국을 엄지로 문질렀다. 거친 손길에 그녀의 하얀 피부가 붉게 달아올랐다. 킬리안은 그 붉은 흔적을 뚫어지게 응시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그대의 존재 자체가 나의 결벽을 무너뜨리고 있어."
아이리스의 손이 킬리안의 목을 감아쥐며 그를 더 가깝게 당겼다. 그녀의 숨결이 킬리안의 턱 끝에 닿아 흩어졌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크게 흔들리며 빛을 잃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그러니 책임져야 할 거다, 아이리스 에반스."
킬리안의 팔이 그녀의 몸을 부서질 듯 강하게 압박했다.
"그대가 내 세계에 남긴 이 불결한 흔적들을 말이야."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어둠이 짙게 깔린 동굴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킬리안의 그림자가 아이리스의 전신을 완전히 덮어버린 채였다.
멀리서 실버 나이트의 마력 탐지기가 울리는 경보음이 들려왔다. 킬리안은 검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누구도 이 영역 안으로 들어오게 두지 않겠다."
그의 목소리가 서늘한 바람을 타고 숲속으로 번져 나갔다.
킬리안의 품에 안긴 아이리스가 그의 셔츠 자락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등 위로 킬리안의 차가운 눈물이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킬리안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