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가라앉았다.
코끝을 찌르는 건 서늘한 박하 향이었다.
사방이 지나치게 하얗고 정갈했다.
아이리스는 몽롱한 정신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닿는 건 거친 바닥이 아니었다.
부드럽고 매끄러운 실크의 감촉이었다.
몸이 가벼우면서도 묘하게 묵직했다.
네 발로 땅을 딛던 감각이 흐릿해졌다.
아이리스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등 근육이 뻐근하게 조여들었다.
본능적으로 두 팔을 머리 위로 뻗었다.
허리를 활처럼 둥글게 말아 올렸다.
입술 사이로 짧은 신음이 새어 나갔다.
기지개를 켜는 동작은 지독히도 익숙했다.
앞발을 쭉 뻗어 발톱을 세우던 버릇.
그 습관이 고스란히 손끝에 남았다.
등줄기를 타고 짜릿한 자극이 흘렀다.
시원한 감각에 취해 눈을 감으려던 순간.
시야 끝에 낯선 그림자가 걸려들었다.
아이리스는 동작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침대 옆 안락의자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서류를 넘기던 킬리안의 손이 멎었다.
그의 시선이 아이리스의 굴곡진 허리에 닿았다.
아이리스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뒷목부터 화끈거리는 열기가 솟구쳤다.
황급히 팔을 내리고 이불을 끌어당겼다.
킬리안은 무표정하게 안경을 벗어 내려놓았다.
정신이 드나 보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아이리스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숙였다.
손가락 마디가 하얘지도록 이불을 움켜쥐었다.
인간의 몸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났다.
얇은 잠옷 너머로 맨살의 온기가 느껴졌다.
킬리안의 방은 모든 것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먼지 하나 허용하지 않는 결벽의 공간.
그곳에 자신이 존재한다는 게 어색했다.
킬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왔다.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규칙적이었다.
그가 허리를 숙여 아이리스와 눈을 맞췄다.
서늘한 눈동자 속에 당황한 얼굴이 비쳤다.
여긴 공작님의 침실인가요.
목소리가 갈라져서 형편없이 흘러나왔다.
킬리안은 대답 대신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의 촉각이 선명했다.
차가운 피부가 닿자 가슴 안쪽이 울렁였다.
열은 내렸군.
그가 손을 거두며 짧게 덧붙였다.
아이리스는 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백색 대리석 복도가 낯설었다.
인간으로 돌아온 기쁨보다 민망함이 컸다.
방금 전의 기괴한 자세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고양이처럼 몸을 말았던 자신의 모습.
그걸 이 남자가 정면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준비되는 대로 방을 옮기도록 하지.
킬리안은 뒤를 돌아 문으로 향했다.
그의 걸음걸이에는 일말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공작저의 공기는 얼음처럼 차갑고 투명했다.
킬리안이 나간 뒤 하녀들이 들어왔다.
그녀들의 손에는 은제 대야와 향수가 들려 있었다.
아이리스가 침대에서 내려오자 시선이 꽂혔다.
하녀들의 눈빛은 호의와 거리가 멀었다.
경멸과 호기심이 뒤섞인 기묘한 압박감.
그녀들은 아이리스의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마치 오물이라도 보는 듯 거리를 두었다.
에반스 가문의 생존자라니.
작은 속삭임이 귓가를 예리하게 찔렀다.
반역자의 핏줄이 어떻게 이곳에.
다른 하녀가 입술을 달싹이며 맞장구쳤다.
아이리스는 못 들은 척 시선을 고정했다.
어깨가 자꾸만 안으로 굽어들려 했다.
무릎을 펴고 당당하게 걸으려 애썼다.
하지만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이 무거웠다.
하녀 한 명이 그녀가 지나간 자리를 닦았다.
마력 소독액을 뿌리는 소리가 유독 컸다.
치익, 소리가 날 때마다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인간의 옷을 입었음에도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새로 배정받은 방은 화려하지만 공허했다.
순백의 대리석 벽면이 거울처럼 매끄러웠다.
아이리스는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백합이 흐드러진 정원은 완벽한 질서 속에 있었다.
그 풍경 속에서 자신만 이물질 같았다.
고양이였을 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짐승의 가죽 뒤에 숨어 눈치를 보지 않았다.
지금은 모든 행동이 관찰당하는 기분이었다.
문밖에서 들리는 발소리 하나에도 몸이 굳었다.
식사로 올라온 음식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은제 식기가 뿜어내는 광채가 위협적이었다.
목 안쪽이 바짝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오후가 되자 킬리안이 방을 방문했다.
그는 문가에 서서 방 안을 훑어보았다.
아이리스는 의자에서 일어나 예법을 갖췄다.
치맛자락을 쥐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불편한 점이 있다면 말하도록.
그의 말투는 사무적이고 건조했다.
아이리스는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배려해주신 덕분에 충분히 과분합니다.
거짓말은 입술 위에서 겉돌며 흩어졌다.
킬리안의 눈썹이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그는 아이리스에게 성큼 다가와 멈춰 섰다.
그의 절대 영역이 아이리스를 감싸 안았다.
표정이 좋지 않군.
킬리안이 그녀의 안색을 살피며 물었다.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발뒤꿈치가 의자 다리에 걸려 휘청였다.
킬리안의 손이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챘다.
단단한 팔의 근력이 옷감 너머로 전해졌다.
아이리스의 숨이 순간적으로 막혔다.
코끝에 닿은 그의 체향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의 가슴팍에 닿은 손바닥이 뜨거웠다.
킬리안은 그녀를 바로 세워준 뒤 놓아주었다.
그의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으나 신중했다.
몸은 인간이 되었는데.
아이리스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왜 공작님 앞에만 서면 꼬리가 돋은 기분일까요.
킬리안은 대답 대신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침묵은 부정보다 긍정에 가까워 보였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운 건가.
그가 정곡을 찌르자 아이리스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손등에는 고양이 시절의 상처가 희미하게 남았다.
전 고양이이자 반역자의 딸일 뿐이죠.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 것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킬리안은 잠시 그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곳의 규칙은 내가 정한다.
그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공간을 갈랐다.
누구도 내 허락 없이 그대를 평가할 수 없어.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흔들림 없는 확신이 서려 있었다.
그 확신이 아이리스의 불안을 잠시 잠재웠다.
킬리안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닫힌 문 너머로 그의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이리스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긴장이 풀리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닿자 정신이 맑아졌다.
창밖의 노을이 방 안으로 길게 늘어졌다.
붉은 빛이 대리석 바닥을 핏빛으로 물들였다.
아이리스는 떨리는 다리를 이끌고 일어났다.
방 한구석에 놓인 커다란 전신 거울로 향했다.
은으로 도금된 프레임이 기괴하게 반짝였다.
거울 속에는 낯선 여인이 서 있었다.
창백한 안색에 헝클어진 은빛 머리카락.
몰락한 백작가의 영애, 아이리스 에반스였다.
그녀는 떨리는 손을 들어 거울을 만졌다.
차가운 유리 표면 위로 자신의 얼굴이 겹쳤다.
아버지의 누명을 벗겨야 한다는 책임감이 도졌다.
이 저택 어딘가에 진실이 숨겨져 있을 것이다.
아이리스는 거울 속 자신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망막 너머의 어둠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짙은 보라색이었던 눈동자가 색을 바꾸기 시작했다.
동공 주변으로 푸른 빛이 실핏줄처럼 번졌다.
아이리스는 눈을 비비고 다시 거울을 보았다.
환각이 아니었다. 눈동자가 형광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에반스 가문의 보물과 같은 빛이었다.
정화의 눈물이라 불리던 전설 속의 보석.
그 보석의 광채가 안구 속에서 점멸했다.
빛은 점차 강해지며 시야를 하얗게 물들였다.
눈 안쪽이 타오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이리스는 비명을 삼키며 거울을 붙잡았다.
거울 속의 눈동자는 이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기괴하게 일렁였다.
시야가 붉게 물들며 사물의 형체가 뒤틀렸다.
방 안의 가구들이 괴물처럼 몸집을 불렸다.
벽면을 타고 흐르는 마력의 줄기가 보였다.
아이리스는 바닥을 구르며 자신의 눈을 감싸 쥐었다.
손가락 사이로 뜨거운 액체가 흘러내렸다.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푸른 빛을 내는 눈물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눈물이 대리석을 녹여내기 시작했다.
문밖에서 급박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리스, 문 열어.
킬리안의 목소리가 문을 뚫고 날아들었다.
그녀는 대답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시야가 완전히 차단된 채 어둠 속으로 잠겼다.
그 순간 방문이 박살 나며 누군가 뛰어 들어왔다.
강렬한 정화의 마력이 온몸을 압박했다.
킬리안의 손이 아이리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의 팔을 할퀴어 내렸다.
그의 소매가 찢어지며 선명한 핏자국이 새겨졌다.
킬리안은 신음조차 내지 않고 그녀를 껴안았다.
무엇을 본 거지.
그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아이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멱살을 잡았다.
푸른 눈물이 그의 흰 셔츠를 적셨다.
그녀의 눈에 비친 킬리안의 모습이 변했다.
그의 심장 부근에 검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것은 오염의 흔적이자 죽음의 징조였다.
아이리스는 공포에 질려 그의 가슴을 밀쳐냈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다 아이리스를 보았다.
아이리스는 피 섞인 푸른 눈물을 쏟으며 소리쳤다.
오지 마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방 안을 날카롭게 찢었다.
당신, 심장이 죽어 가고 있어.
킬리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의 절대 영역이 미친 듯이 소용돌이쳤다.
아이리스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킬리안은 쓰러지는 그녀를 받아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푸른 눈물에 머물렀다.
그것은 제국에서 금기시된 성녀의 유산이었다.
킬리안은 떨리는 손으로 아이리스의 눈가를 닦아냈다.
그녀의 눈꺼풀 아래로 푸른 빛이 여전히 가득했다.
이것이 당신의 비밀이었나.
킬리안이 나직하게 읊조리며 그녀를 고쳐 안았다.
그의 팔에 새겨진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 피가 아이리스의 눈물과 섞여 보라색으로 변했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기묘하게 진동했다.
복도 끝에서 세바스티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작님,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킬리안은 대답 대신 방문을 마력으로 봉쇄했다.
그는 아이리스의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이제 누구에게도 당신을 넘길 수 없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