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이 서재 바닥에 길게 늘어졌다.
백색 대리석 위로 차가운 은색 광채가 감돌았다.
책상 위에 놓인 은제 촛대는 고요하게 빛을 반사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숨을 죽인 채 책상 서랍 손잡이에 매달렸다.
앞발 끝에 걸린 금속의 감촉이 매끄럽게 느껴졌다.
고양이의 몸으로 서랍 하나를 여는 일은 고역에 가까웠다.
발톱을 좁은 틈새에 끼워 넣고 온 힘을 다해 뒤로 당겼다.
나무가 맞물려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고요한 방안을 울렸다.
조금만 더 당기면 내부가 보일 것 같았다.
서랍이 아주 미세하게 틈을 보이며 열리기 시작했다.
그 안에는 킬리안이 숨겨둔 비밀 장부가 들어 있을 터였다.
아이리스는 뒷발에 힘을 주며 서랍 안쪽으로 앞발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서랍 안쪽에 설치된 가느다란 마력 실이 발톱에 걸렸다.
공중에 투명한 파동이 일더니 날카로운 금속음이 정적을 찢었다.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말아 서재 구석으로 파고들었다.
거대한 책상 아래의 어둠 속으로 몸을 급히 숨겼다.
복도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소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서늘한 금속음이 고막을 찔렀다.
아이리스는 가슴팍이 조여드는 압박감에 숨을 들이켰다.
서재 문이 열리며 길쭉한 그림자가 바닥을 가로질렀다.
검은 실크 잠옷 차림의 킬리안이 문가에 서 있었다.
그의 머리카락이 달빛을 받아 은실처럼 흐트러진 상태였다.
평소의 완벽한 차림과는 다른 묘한 분위기가 풍겼다.
킬리안의 시선이 가장 먼저 서랍의 벌어진 틈에 닿았다.
그의 미간에 아주 얇은 주름이 잡히기 시작했다.
결벽증이 있는 그에게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었다.
자신의 영역을 침범당했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는 기분이 들었다.
킬리안이 방 안으로 천천히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발 주변으로 투명한 파동이 일렁이며 퍼져나갔다.
반경 10미터 안의 오염원을 소멸시키는 절대 영역이었다.
책상 밑의 먼지들이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아이리스는 털 끝이 바짝 서는 감각에 몸을 떨었다.
이 영역 안에 완전히 노출되면 정체가 탄로 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숨을 내뱉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입을 꾹 다물었다.
킬리안은 책상 위의 서류들을 하나씩 훑어내렸다.
손가락 끝이 서랍의 벌어진 틈을 느릿하게 스쳤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으며 주변을 샅샅이 살폈다.
침입자의 흔적을 찾는 포식자의 눈빛이었다.
나오지 않으면 이곳 전체를 정화하겠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서재 안을 무겁게 울렸다.
킬리안이 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은색 마력이 피어올랐다.
제국 근위대가 사용하는 고성능 마력 탐지 마법이었다.
은밀하게 퍼져나가는 마력의 실이 구석구석을 훑어 내려갔다.
아이리스는 체내의 에테르 링을 억제하려 애를 썼다.
심장 부근에서 요동치는 마력을 강제로 내리눌렀다.
하지만 짐승의 신체는 인간의 의지를 온전히 따르지 않았다.
억누를수록 마력은 오히려 반동을 일으키며 팽창했다.
하얀 털 사이로 미세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고농축 에테르가 피부 밖으로 밀려 나오는 현상이었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꼬리가 발광하는 것을 보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라면 흑마법사로 오해받아 처형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킬리안의 발소리가 책상 근처에서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이 어둠 속에서 빛나는 작은 생명체에 고정되었다.
책상 밑으로 길게 뻗어 나온 은빛 마력이 아이리스를 감쌌다.
더 이상 숨을 곳도 도망칠 곳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짐승치고는 지나치게 영리한 움직임이군.
킬리안이 허리를 숙여 어둠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손이 가차 없이 아이리스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허공으로 붕 떠오른 아이리스는 앞발을 허우적거렸다.
킬리안의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냉기가 피부를 훑었다.
그는 아이리스를 자신의 눈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은색 눈동자가 고양이의 금색 눈동자를 꿰뚫듯 응시했다.
아이리스는 반사적으로 하악질을 하려다 간신히 멈췄다.
지금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 범인이라 자백하는 꼴이었다.
아니면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첩자인가.
킬리안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온기도 섞여 있지 않았다.
그는 아이리스의 목덜미를 쥔 채 서재의 중앙으로 걸어갔다.
환한 달빛 아래 드러난 아이리스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하얀 털은 먼지가 묻어 군데군데 얼룩진 상태였다.
그는 다른 손으로 아이리스의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엄지손가락이 눈가 주변의 부드러운 털을 쓸어내렸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돌리려 했지만 그의 힘을 이길 수 없었다.
킬리안의 시선이 그녀의 눈동자 깊숙한 곳을 파고들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이리스의 금색 눈동자 속에서 기묘한 파장이 일었다.
그것은 단순한 짐승의 본능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깊은 사유와 명백한 의지가 담긴 인간의 지성이었다.
킬리안의 눈에 서려 있던 냉혹함이 경악으로 변했다.
그는 아이리스의 눈동자 색을 유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평범한 금색이 아닌 짙은 호박색이 섞인 사파이어 빛이었다.
제국 역사에서 사라진 에반스 가문의 비보와 닮아 있었다.
짐승의 눈에 담기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지성이군.
킬리안의 손가락이 아이리스의 턱 끝을 느릿하게 훑었다.
그는 아이리스를 내려놓지 않은 채 더욱 가까이 당겨 물었다.
내 말이 들린다면 대답해 보아라. 너는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곳에 들어왔지?
아이리스는 대답 대신 가늘게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짐승의 흉내를 내려 애썼지만 근육의 떨림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킬리안의 입술이 비스듬하게 말려 올라가며 냉소를 머금었다.
침묵이라. 에티켓 르네를 배운 귀족 영애처럼 구는군.
그의 시선이 아이리스의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내려갔다.
아이리스는 낮은 울음소리를 내며 그의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다.
킬리안은 그녀의 반항을 가볍게 제압하며 귓가에 속삭였다.
이 눈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킬리안의 낮은 읊조림이 서재 안의 공기를 갈랐다.
그는 아이리스를 바닥에 내려놓는 대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 근육 너머로 그의 심장 박동이 전해졌다.
규칙적이었던 그의 박동이 평소보다 한 박자 빠르게 뛰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품 안에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음을 직감한 순간 감각이 예민해졌다.
킬리안의 체취와 마력의 향기가 코끝을 강하게 찔렀다.
거부할 수 없는 압도적인 포식자의 냄새였다.
킬리안은 아이리스의 이마에 손을 얹고 마력을 주입했다.
강제적인 마력 순도 측정이 서재 안에서 시작되었다.
아이리스의 체내에서 잠자던 에테르 링이 비명을 지르며 반응했다.
은백색 광채가 서재 안을 가득 채우며 폭발하듯 번져나갔다.
빛이 가라앉은 후에도 킬리안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아이리스의 목덜미를 다시 한번 꽉 쥐어 올렸다.
그녀의 눈을 똑바로 마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네가 누구인지 이제야 알 것 같군.
킬리안의 손이 아이리스의 등줄기를 거칠게 훑어 내렸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마다 피부가 따갑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아이리스는 도망치기 위해 발톱을 세워 그의 손등을 긁었다.
붉은 선이 세 줄기 그어지며 선명한 핏방울이 배어 나왔다.
공작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는 자신의 손등에서 흐르는 피를 무심하게 핥아 올렸다.
금속성의 비릿한 향이 서재 안의 정적을 무겁게 짓눌렀다.
킬리안은 피가 묻은 입술을 천천히 떼며 낮게 읊조렸다.
나의 영역을 더럽힌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을 거다.
그는 아이리스를 안은 채 서재 구석의 대형 거울 앞으로 걸어갔다.
거울 속에는 차가운 눈매의 남자와 작은 고양이가 비쳤다.
킬리안은 거울의 특정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매끄러웠던 거울 표면이 수면처럼 요동치며 뒤틀리기 시작했다.
거울 너머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아이리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며 그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그곳은 공작저 아래에 숨겨진 금지된 지하 서고의 입구였다.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언급했던 제국의 진실이 묻힌 장소였다.
킬리안은 주저 없이 뒤틀린 거울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시공간이 일그러지는 기묘한 부유감이 아이리스를 덮쳤다.
눈을 떴을 때는 수천 권의 책들이 끝없이 늘어선 공간이 보였다.
고대 마법으로만 유지되는 빛조차 닿지 않는 심연이었다.
그는 아이리스를 차가운 대리석 제단 위에 내려놓았다.
제단 주변에는 복잡한 기하학적 문양들이 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제단 위를 벗어나려 했지만 투명한 벽에 가로막혔다.
킬리안은 제단 옆에 놓인 은제 침을 천천히 집어 들었다.
네 피가 에반스의 이름을 증명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
킬리안의 목소리가 서늘한 복도를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그는 아이리스의 앞발을 잡아당겨 날카로운 침 끝을 갖다 댔다.
아이리스는 목 안쪽에서 뜨거운 기운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억눌렀던 인간의 언어가 비명처럼 터져 나오기 일보 직전이었다.
침 끝이 피부를 뚫으려는 순간 서고 입구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누군가 공작의 허가 없이 지하 통로를 개방하려 시도하고 있었다.
킬리안의 고개가 순식간에 입구 쪽으로 돌아갔다.
그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전보다 훨씬 더 깊고 날카로워졌다.
서고의 육중한 철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외부에서 가해지는 강한 마력이 보호 결계를 갉아먹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이 틈을 타 제단의 결계를 무너뜨릴 방법을 찾았다.
앞발 끝에 마력을 모아 제단 바닥의 문양 중 한 곳을 찍었다.
킬리안이 그녀의 의도를 알아채고 손을 뻗었다.
하지만 아이리스의 발끝에서 터져 나온 마력이 먼저 문양을 건드렸다.
폭발적인 빛과 함께 제단을 감싸던 투명한 벽이 산산조각 났다.
아이리스는 파편 사이로 몸을 날려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아이리스 에반스, 멈춰라.
킬리안의 외침이 등 뒤에서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그가 자신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는 순간 사고가 정지했다.
아이리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책장 사이의 좁은 틈으로 파고들었다.
하지만 철문을 부수고 들어온 그림자가 그녀의 앞길을 막아섰다.
은색 갑주를 입은 사내가 거대한 검을 뽑아 들었다.
실버 나이트의 문장이 새겨진 검신이 파랗게 빛을 발했다.
사내의 뒤로 수십 명의 병사가 서고 안을 포위하듯 에워쌌다.
그들의 손에는 고양이의 마력을 추적하는 탐지기가 들려 있었다.
킬리안은 병사들 앞으로 걸어 나오며 차갑게 일갈했다.
그의 발걸음마다 서고의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했다.
병사들은 공작의 압도적인 위압감에 주춤하며 길을 터주었다.
킬리안은 도망칠 곳 없는 막다른 길에 선 아이리스를 보았다.
사냥은 여기서 끝이다.
킬리안이 손을 내밀자 공기 중의 수분이 얼어붙으며 사슬이 되었다.
아이리스는 가느다란 사슬이 자신의 몸을 결박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은색 사슬은 피부를 파고들 듯 조여들며 그녀의 마력을 차단했다.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천천히 다가와 아이리스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킬리안의 긴 손가락이 그녀의 턱 끝을 강제로 들어 올렸다.
그의 눈동자에는 정체 모를 소유욕과 냉혹한 이성이 혼재되어 있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남은 힘을 다해 으르렁거렸다.
킬리안은 그녀의 반응이 흥미롭다는 듯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는 품 안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내 아이리스의 코끝에 가져갔다.
병 안에서는 보라색 안개가 소용돌이치며 기괴한 빛을 내뿜었다.
그것은 기억을 강제로 끄집어내는 금지된 마법 약물이었다.
네가 숨긴 진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훑어주지.
킬리안이 병의 마개를 여는 순간 독한 향기가 서고를 가득 채웠다.
아이리스는 눈앞이 흐릿해지며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의식이 멀어지는 와중에도 그의 차가운 미소는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녀는 마지막 정신을 붙잡으며 그의 손등을 다시 한번 할퀴었다.
킬리안은 상처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약물을 아이리스의 입술 사이에 흘려넣으며 속삭였다.
등 뒤에서 병사들의 함성이 들려왔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아이리스의 머릿속으로 아버지가 처형당하던 날의 기억이 휘몰아쳤다.
이제부터 네 모든 비밀은 나의 것이 된다.
킬리안이 아이리스를 품에 안고 병사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의 뒤로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일며 서고 전체를 집어삼킬 듯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나는 순간 서고의 천장이 무너졌다.
아이리스는 암전되는 시야 속에서 킬리안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무너진 잔해 사이로 붉은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에반스 가문의 비보가 반응하며 내뿜는 최후의 경고였다.
킬리안은 그 빛을 향해 손을 뻗으며 아이리스를 더욱 강하게 안았다.
사라져가는 의식 끝에 그가 내뱉은 말이 낙인처럼 가슴에 박혔다.
살아서 증명해라, 네가 왜 내 앞에 나타났는지.
킬리안은 무너지는 서고를 뒤로한 채 거울 통로로 뛰어들었다.
그의 품 안에서 아이리스는 고양이의 형상을 잃고 점차 변해갔다.
하얀 털이 사라진 자리에 가느다란 소녀의 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킬리안은 자신의 어깨를 움켜쥐는 그녀의 손길을 느끼며 입술을 깨물었다.
거울 밖으로 튀어나온 킬리안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의 품에는 더 이상 고양이가 아닌 여인이 안겨 있었다.
아이리스는 젖은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킬리안은 그녀의 목덜미를 움켜쥐며 자신의 입술을 그녀의 귓가에 밀착시켰다.
들켰군, 나의 작은 침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