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색 증기가 사방을 가득 메웠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폐부 깊숙이 날카로운 마력의 파편이 박히는 기분이었다. 아이리스는 네 발을 바르르 떨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바닥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마법진은 은은한 빛을 내뿜으며 공간을 압박했다. 제국 최북단, 블랙 로즈 공작저의 진입 관문인 제1 소독실은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정제되어 있었다. 티끌 하나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공기 중의 수분마저 메마르게 했다. 아이리스는 앞발을 들어 코끝을 가렸다. 고양이의 예민한 후각에 닿는 소독액의 냄새는 지독하게 역했다. 몸을 뒤덮은 하얀 털 사이사이로 마력의 전류가 흘러 피부가 따끔거리고 근육이 수축했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 나온 것은 가느다란 신음뿐이었다. "아직 멀었나."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증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킬리안 블랙 로즈였다. 그는 소독실 강화 유리 너머에 서서 무심한 시선으로 내부를 관찰했다. 빳빳하게 다려진 검은 제복 위로 먼지 하나 내려앉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하얀 실크 장갑을 낀 손으로 턱을 괴며 무미건조한 눈빛을 보냈다. "3차 소독 공정 중입니다, 공작님. 대상의 마력 반응이 예상보다 강해 출력을 높였습니다." 옆에 선 중년의 사내가 답했다. 블랙 로즈 가문의 집사, 레나르트였다. 그는 아이리스를 바라보는 눈빛에 노골적인 혐오를 담았다. 레나르트의 손에 들린 기록판에는 아이리스의 체온과 마력 수치가 실시간으로 기록되고 있었다. 아이리스는 고개를 들어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젖은 털이 몸에 달라붙어 볼품없는 몰골이었다. 에반스 백작가의 영애로서 받아온 교육이 뇌리를 스쳤다. 어떤 상황에서도 품위를 잃지 말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품위는커녕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다. 마력 소독은 외부의 오염원을 제거하는 절차였지만 저주받은 몸인 아이리스에게는 영혼을 갉아먹는 고문이나 다름없었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증기가 걷혔다. 육중한 강철문이 좌우로 밀려나며 외부의 찬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아이리스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을 뻔한 것을 간신히 버텼다. 킬리안이 천천히 소독실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가 다가올수록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듯했다. 킬리안의 고유 능력인 절대 영역이 작동하고 있었다. 반경 10미터 이내의 모든 불순물을 소멸시키는 힘이었다. 평소라면 아이리스 같은 저주받은 존재는 그 자리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졌어야 했다. 킬리안이 아이리스의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를 감싸고 있던 투명한 막이 미세하게 일렁였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것처럼 견고하던 절대 영역의 경계가 아이리스의 주변에서만 흐릿하게 뭉개졌다. 킬리안의 눈썹이 아주 잠시 위로 치솟았다. 그는 장갑 낀 손을 뻗어 아이리스의 턱 끝을 들어 올렸다.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닿자 아이리스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킬리안의 손길은 단호했다. "이것 봐라." 그가 짧게 읊조렸다. 은회색 눈동자가 아이리스의 보라색 눈동자를 깊게 파고들었다. 인간의 지성이 담긴 그 눈빛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의 시선은 집요하고 날카로웠다. 아이리스는 숨을 멈췄다.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몸이 굳었다. 그저 평범한 짐승인 척해야 했다. 하지만 킬리안의 눈앞에서 연기는 무의미해 보였다. "공작님, 위험합니다. 물러나십시오." 레나르트가 급히 다가와 킬리안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손에는 은으로 제작된 짧은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마력 측정기였다. "이 짐승은 역병의 인도자입니다. 제국 신화에서도 불결함의 상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정체불명의 고농축 에테르를 품고 있습니다. 당장 처분하셔야 합니다." 레나르트의 목소리에는 단호한 살기가 서려 있었다. 그는 지팡이 끝을 아이리스에게 겨눴다. 은색 금속 끝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아이리스는 털을 곤두세우며 뒷걸음질 쳤다. 벽면의 대리석이 차갑게 등을 압박했다. "처분이라니. 레나르트, 네가 내 수집품에 손을 대겠다는 건가." 킬리안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그는 레나르트를 돌아보지 않은 채 여전히 아이리스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작님, 가문의 가언을 잊으셨습니까. 순백의 복도에 티끌을 허용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고양이는 존재 자체가 오염입니다. 마력 탐지기가 이토록 요동치는 것을 보십시오." 레나르트가 기록판을 내밀었다. 수치는 이미 위험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아이리스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에테르 링의 흔적이 공작저의 정화 결계와 충돌하며 소음을 만들어냈다. 킬리안은 잠시 침묵했다.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아이리스와 접촉했던 장갑 끝에 희미한 잔상이 남아 있었다. 절대 영역을 뚫고 들어온 기이한 마력의 파동이었다. 그것은 불결함이라기보다 오히려 지독하게 순수한 무언가에 가까웠다. "이 동물의 몸에는 에반스의 낙인이 찍혀 있다." 킬리안의 말에 레나르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에반스라는 이름은 제국에서 지워진 이름이자 금기시되는 반역자의 가문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살려두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황실 근위대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공작저의 성결도 의심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 즉시 소각로로 보내는 것이 최선입니다." 레나르트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이라도 마법 탄환을 쏘아 올릴 기세였다. 아이리스는 절망적인 기분으로 킬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결정 한마디에 자신의 목숨이 달려 있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소독실의 문은 굳게 닫혔고 복도는 끝을 알 수 없는 미로처럼 뻗어 있었다. 킬리안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그는 아이리스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의중을 읽어내기란 불가능했다. 그는 논리적이지 않은 모든 것을 배제하는 남자였다. 고양이가 된 영애라는 비논리적인 존재를 그가 받아들일 리 없었다. "레나르트." "예, 공작님." "내 결벽증이 어느 정도인지 네가 가장 잘 알 텐데." 킬리안이 장갑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아이리스와 닿았던 장갑이 바닥에 닿자마자 미세한 불꽃과 함께 재가 되어 사라졌다. 그는 맨손을 뻗어 아이리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털에 닿는 순간 아이리스는 전신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꼈다. 뜨거웠다. 그가 가진 마력이 아이리스의 저주받은 마력과 부딪히며 기묘한 공명을 일으켰다. 킬리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의 절대 영역이 다시 한번 크게 요동치며 주변의 공기를 비틀었다. "이 짐승은 내가 직접 관리한다." "공작님!" "토 달지 마라. 다시 말씀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킬리안의 서늘한 경고에 레나르트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분노와 의혹이 뒤섞인 눈으로 아이리스를 쏘아보았으나 주인의 명령을 거역할 배짱은 없었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서재 안쪽, 내 침실과 이어진 비밀 방에 거처를 마련해라. 외부인의 출입은 물론 하인들의 접근도 금한다. 식사는 내가 직접 확인한 것만 들여보내도록." 그것은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공작저에서 가장 청결하고 신성해야 할 공간에 유해 조수로 분류되는 고양이를 들이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리스는 그의 품 안에서 심장 소리를 들었다. 일정하고 차가운, 기계적인 박동이었다. 그러나 그 속도는 아주 미세하게 빨라져 있었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안은 채 복도를 걸었다. 백색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순백의 복도는 끝없이 이어졌다. 벽면에는 가문의 문장인 검은 장미와 은색 검이 교차한 장식들이 즐비했다. 아이리스는 그의 어깨 너머로 멀어지는 소독실을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일단 첫 번째 고비는 넘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킬리안은 거대한 흑단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복잡한 마법 봉인이 걸린 그의 개인 서재였다. 문이 열리자 수천 권의 고서가 뿜어내는 묵직한 종이 냄새와 정화 향수의 향이 섞여 밀려왔다. 킬리안은 아이리스를 서재 한가운데 놓인 벨벳 소파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책상으로 향해 서류 더미를 뒤지기 시작했다. 마치 아이리스의 존재를 잊으려는 사람처럼 그는 업무에 몰두했다. 아이리스는 조심스럽게 소파에서 내려왔다. 발소리를 죽이며 서재 내부를 살폈다. 이곳 어딘가에 아버지가 말했던 증거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 그보다 먼저 찾아야 할 것이 있었다. 저주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 정화의 성배였다. 킬리안이 마차에서 언급했던 그 물건의 행방을 알아내야 했다. 아이리스는 서재 구석진 곳에 놓인 장식장으로 다가갔다. 그곳에는 제국 역사에서 금기시되는 유물들이 엄격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유리 격벽 너머로 낡은 양피지 한 장이 보였다. 아이리스는 앞발을 뻗어 유리 표면을 닦아냈다. 먼지가 걷히자 그 아래 숨겨진 문자가 드러났다. 정화의 성배: 오염된 영혼을 되돌리는 법. 아이리스의 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글자를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양피지 하단에는 에반스 가문의 인장과 함께 붉은 글씨로 추신이 적혀 있었다. 성배를 깨우는 것은 희생된 자의 피이며, 그 끝은 가문의 멸문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순간 서재의 공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뒤를 돌아보자 킬리안이 어느새 책상에서 일어나 아이리스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은색 칼날이 들려 있었다. "그걸 읽을 줄 아는 건가." 킬리안의 목소리는 칼날보다 차가웠다. 그는 칼끝을 아이리스의 목덜미에 갖다 댔다. "아니면 네가 바로 그 희생된 피의 주인인가." 칼날의 서늘한 감촉이 피부를 파고들었다. 아이리스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킬리안의 눈에는 더 이상 호기심이 없었다. 오직 침입자를 처단하려는 냉혹한 의지만이 서려 있었다. 킬리안이 칼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천천히 팔을 내리눌렀다. 아이리스는 숨을 들이켰다. 목덜미를 누르는 서늘한 감각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킬리안의 은회색 눈동자는 이제 단순한 의심을 넘어 확신에 찬 살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에반스 가문의 인장을 알아본 고양이. 그것만으로도 킬리안에게 이 생명체는 제거해야 할 위협이었다. "말을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이해는 하고 있군." 킬리안이 낮게 읊조리며 칼날을 조금 더 깊게 밀어 넣었다. 아이리스는 눈을 감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죽음이 코앞에 닥친 순간에도 에반스의 긍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녀의 보라색 눈동자 속에 서린 결연함이 킬리안의 움직임을 잠시 멈추게 했다. 서재의 정적 속에서 킬리안의 호흡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는 칼을 쥔 채 한참 동안 아이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논리적으로는 지금 당장 이 짐승의 목을 베어 후환을 없애야 했다. 그러나 그의 절대 영역을 무력화시킨 이 기이한 생명체에 대한 호기심이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었다. "살고 싶나." 킬리안의 물음에 아이리스는 짧게 냐앙,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비굴한 애원이 아니라 대답을 요구하는 듯한 당당한 울음이었다. 킬리안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거의 알아챌 수 없을 만큼 비틀렸다. 그는 칼을 거두어 허리춤에 꽂았다. "좋다. 네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다만 내 규칙을 어기는 순간, 그날이 네 제삿날이 될 것이다." 그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 의자에 몸을 묻었다. 아이리스는 다리에 힘이 풀려 소파 옆으로 주저앉았다. 살았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킬리안의 감시 아래에서 성배의 비밀을 풀고 가문의 누명을 벗겨야 했다. 아이리스는 자신의 앞발을 내려다보았다. 작고 연약한 고양이의 발이었지만 그 안에는 세상을 뒤엎을 진실이 숨겨져 있었다. 창밖으로 제국의 차가운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킬리안은 서류를 넘기면서도 시선 한쪽을 아이리스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두 사람, 아니 한 남자와 한 마리의 고양이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에스테리아 제국의 가장 깨끗한 장소에서 가장 불결한 진실이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