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진악의 웃음소리가 동굴 벽면을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렸다. 손에 쥔 편지를 구겼다.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고요한 지하 광장을 메웠다. 진운휘였던 사내의 시신은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채 바닥에 뉘어 있었다. 위진악이 한 걸음 다가왔다. 그의 발소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규칙적으로 울렸다.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 목구멍 안쪽이 바짝 말라붙어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위진악은 소매 안으로 손을 감췄다. 그의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죄책감이라기보다는 흥분에 가까운 떨림이었다.
동굴 깊숙한 곳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나가 아니었다. 수십, 수백의 목소리가 겹쳐지며 고막을 찔렀다. 어둠 속에서 푸르스름한 안개가 밀려왔다. 안개 너머로 비틀거리는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나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검을 움켜쥐었다. 그림자들의 정체는 청운검문의 제자들이었다. 사라졌던 사질들과 하급 제자들이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인간의 모습이 아니었다. 피부는 얼음처럼 투명하게 변해 속의 혈관이 다 비쳤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흰자위만 번들거렸다. 입술 사이로는 허연 김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괴물로 변한 제자들이 나를 향해 울부짖었다. 그들의 손톱은 이미 짐승처럼 길고 날카로웠다. 사부님. 환청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가장 앞줄에 선 소년은 작년에 입문했던 막내 사질이었다. 소년의 가슴팍에는 정무맹의 낙인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어금니가 부서질 듯 맞물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가슴 속 한빙주가 요동치며 차가운 기운을 뿜어냈다. 슬픔은 순식간에 날카로운 살기로 변해 전신을 휘감았다. 천천히 검을 들어 올렸다. 검신 위로 푸른 서리가 맺히며 공기가 얼어붙었다.
위진악이 뒤로 물러나며 손을 휘저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돌려드릴 시간입니다. 명령이 떨어지자 괴물들이 지면을 박차고 쇄도했다. 바닥의 얼음판이 박살 나며 파편이 튀었다. 발을 굴렀다.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공간을 갈랐다. 선두에 섰던 사질의 목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피 대신 차가운 얼음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무딘 감각이 손목을 타고 전해졌다.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다시 검을 휘둘렀다. 가슴속에서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하다. 나는 속으로 짧게 뇌까렸다. 너희를 이렇게 만든 자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하마. 검이 허공을 휘저을 때마다 냉기가 폭발했다. 괴물들의 신체가 조각나며 바닥에 쌓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을 벨 때마다 기괴한 기운이 검신을 타고 스며들었다. 제자들의 체내에 심겨 있던 미완성 한빙 기운이었다. 그 기운들은 나의 단전으로 빨려 들어갔다. 파괴되었던 혈맥이 강제로 이어지며 공력이 솟구쳤다. 고통은 사라졌으나 그 자리에 서늘한 공허가 들어찼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다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얼어붙었다. 눈빛이 점점 무기질적으로 변해갔다.
한 명을 더 밸 때마다 가슴속의 불길이 식어갔다. 분노조차 얼어붙어 만져지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손끝의 감각이 희미해졌다. 검을 휘두르는 행위는 이제 단순한 노동에 불과했다. 마지막 남은 사질의 심장을 꿰뚫었을 때, 동굴 안은 정적에 잠겼다. 제자들의 시체 더미 위에 홀로 서 있었다. 나의 숨결은 이제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긁어 나오는 차가운 한기뿐이었다. 단전의 한빙주는 비대해져서 늑골을 압박했다. 피부 위로 푸른 정맥이 도드라지며 기괴한 무늬를 그렸다.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의 피부가 점차 투명해지고 있었다.
손톱 아래의 살점이 비쳐 보였다. 뼈의 윤곽이 얼음 속에 갇힌 유물처럼 드러났다. 인간으로서의 체온이 급격히 소실되었다. 나는 더 이상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심지어 배신당했다는 사실조차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생경했다. 위진악의 비릿한 웃음도 자극이 되지 않았다. 눈동자는 이제 완전한 청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것은 생명체의 눈이라기보다 잘 세공된 보석에 가까웠다. 전신을 타고 흐르는 냉기가 혈맥을 긁어냈다. 기연이라 믿었던 한빙주가 존재 자체를 먹어치우고 있었다. 입을 열어 짧은 신음을 내뱉으려 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등 뒤의 벽면이 거대한 힘에 눌려 갈라졌다. 수천 년을 버텨온 화강암이 모래알처럼 바스러졌다. 자욱한 먼지 구름 사이로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그 빛은 동굴 천장까지 닿으며 거대한 형상을 빚어냈다. 실체가 없는 영체였다. 반투명한 기운으로 이루어진 노인이 허공에 앉아 있었다. 정무맹의 맹주였다. 그의 모습은 홀로그램처럼 일렁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노인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것은 공들여 키운 화초의 개화를 지켜보는 원예사의 표정이었다.
맹주의 영체가 천천히 손을 뻗었다. 허공을 가로지른 손가락이 나의 이마를 향했다. 훌륭하게 익었구나. 그의 목소리가 동굴 전체를 진동시켰다.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발바닥이 지면에 얼어붙어 있었다. 위진악은 어느새 맹주의 발치 아래 엎드려 있었다. 그의 어깨가 공포와 환희로 동시에 떨렸다. 투명해진 가슴 안쪽에서 푸른 구슬이 박동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기괴한 소리를 냈다. 맹주의 영체가 나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의식이 거대한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노인이 입을 열었다. 이제 너는 나의 가장 완벽한 그릇이 될 것이다.
그의 손끝이 이마에 닿는 순간, 전신이 유리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쩌적, 소리와 함께 피부 위로 균열이 번졌다. 고통은 없었다. 다만 영혼이 깎여 나가는 생경한 감각만이 뇌를 자극했다. 위진악이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질투와 경외심이 뒤섞여 있었다. 맹주의 영체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동굴의 산소마저 얼려버렸다.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 안의 한빙주가 맹주의 기운에 공명하며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포식자를 향한 공포였다.
단전이 터져나갈 듯 부풀어 올랐다. 혈맥을 타고 흐르던 냉기가 역류하며 심장을 찔렀다. 쿨럭, 입에서 뿜어져 나온 것은 선혈이 아니었다. 잘게 부서진 얼음 가루들이 바닥을 적셨다. 시야가 온통 푸른빛으로 점멸했다. 맹주의 손가락이 이마를 파고드는 감각이 선명해졌다. 그는 나의 기억과 무공, 그리고 생명력을 하나하나 훑어 내렸다. 모든 것이 벌거벗겨진 기분이었다. 청운검문에서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제자들과 나누었던 술잔과 검을 가르치던 새벽의 공기. 그 모든 것이 차가운 한기 속으로 매몰되어 사라졌다.
위진악이 기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드디어 완성되는군요. 맹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나의 단전을 응시할 뿐이었다. 한빙주의 회전이 극에 달했다. 동굴 내부의 모든 수분이 얼어붙어 허공에 정지했다.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정적이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 검을 쥐려 했다. 그러나 손가락은 이미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맹주의 손이 나의 가슴으로 향했다. 투명한 피부를 뚫고 들어온 그의 손이 박동하는 한빙주를 움켜쥐었다.
으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고요를 깼다. 맹주의 손가락이 늑골 사이를 파고들어 구슬을 끄집어내려 했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 했으나 목소리는 얼음 속에 갇혔다. 한빙주가 신체에서 분리되는 순간, 모든 감각이 정지했다. 시간조차 흐름을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맹주의 영체는 구슬을 손에 쥔 채 광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인간의 표정이라기보다 악귀의 형상에 가까웠다. 위진악의 얼굴에서 기대감이 사라지고 의혹이 번졌다.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듯 뒷걸음질 쳤다.
맹주의 영체가 갑자기 팽창하기 시작했다. 한빙주를 삼킨 그의 신체가 푸른빛을 내뿜으며 동굴을 가득 채웠다. 영체였던 그의 모습이 점점 실체화되어 갔다. 그는 나를 소모품처럼 바닥에 내던졌다. 얼음 바닥에 부딪힌 나의 신체에서 날카로운 파열음이 났다. 다리 한쪽이 조각나 흩어졌지만 피는 흐르지 않았다. 나는 그저 무너진 인형처럼 맹주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제 완벽한 육체를 얻은 것처럼 보였다. 위진악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맹주님, 약속하셨던 제 자리는 어디입니까. 맹주는 고개를 돌려 위진악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동자에는 자비라고는 없었다. 위진악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목을 조르는 듯했다. 맹주는 비릿하게 웃으며 위진악을 자신의 앞으로 끌어당겼다. 너의 자리는 이곳이다. 맹주의 손이 위진악의 가슴을 꿰뚫었다. 위진악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손가락이 허공을 긁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이 맹주의 손에 들려 나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위진악의 몸에서 빠져나온 생명력이 맹주의 새로운 육체로 스며들었다. 배신자의 최후는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바닥에 누워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부서진 몸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식이 점차 흐려졌다. 동굴 천장에서 떨어진 고드름이 가슴 위로 떨어졌다. 맹주는 위진악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치워버렸다. 그는 만족스러운 듯 자신의 새로운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나의 흐릿한 눈동자와 그의 푸른 눈이 마주쳤다. 맹주는 나의 뺨을 차가운 손으로 어루만졌다. 너의 희생은 무림의 새로운 질서를 위해 쓰일 것이다.
그의 목소리는 산 자의 것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망자가 동시에 속삭이는 듯한 괴리감이 느껴졌다. 맹주는 등을 돌려 동굴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발을 내디딜 때마다 대지가 진동하며 얼어붙었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부서진 팔을 움직이려 했으나 손가락 끝이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동굴 입구로 스며드는 달빛이 서글프게 빛났다.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심장 대신 박동하던 차가운 기운이 아직 한 줄기 남아 있었다. 그것은 맹주가 가져가지 못한, 제자들의 마지막 원혼이었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작은 불꽃이 일었다. 냉기가 아닌, 지독하게 뜨거운 분노의 불꽃이었다. 조각난 신체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흩어졌던 얼음 조각들이 자력을 얻은 듯 다시 모여들었다. 부러진 다리가 이어지고 찢어진 혈맥이 다시 붙었다. 그것은 재생이라기보다 재조립에 가까웠다. 인간의 신체가 아닌, 얼음으로 이루어진 괴물로서의 부활이었다. 나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관절이 맞물릴 때마다 기괴한 금속음이 들렸다. 시야는 이제 인간의 것보다 훨씬 넓고 선명했다.
무너진 동굴 벽 너머로 맹주의 기운이 멀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서서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한빙주가 있던 자리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구멍 사이로 차가운 밤바람이 통과했다. 눈물이 흘러야 할 자리에서는 서리가 맺혔다. 나는 위진악의 시신 옆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검신은 이미 반토막이 나 있었지만, 나에게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손잡이를 잡는 순간, 나의 냉기가 검신을 타고 흘러 투명한 얼음 칼날을 만들어냈다.
동굴 밖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눈앞에 펼쳐진 십만대산의 전경이 온통 푸른 서리로 덮여 있었다. 맹주가 지나간 길은 생명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대기를 가르는 서늘한 한기만이 나의 존재를 증명했다. 무림은 이제 지옥으로 변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 지옥을 끝내기 위해 지옥보다 더 차가운 존재가 되어야 했다. 산 아래에서 정무맹의 순찰대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동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를 확인하러 온 자들이었다. 수십 명의 무인이 나를 포위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괴물이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투명한 얼음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대기를 얼렸다. 순찰대원들의 몸은 단 한 번의 휘두름에 조각상처럼 굳어버렸다. 나는 그들 사이를 유령처럼 통과했다. 나의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맹주의 심장을 얼려 부수는 것.
등 뒤에서 얼어붙은 무인들이 산산조각 나며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멈추지 않고 산을 내려갔다. 멀리 낙양의 불빛이 보였으나, 그것은 이제 나에게 따뜻한 안식처가 아니었다. 맹주가 머무는 정무맹의 본산, 천검봉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슴의 구멍 속으로 바람이 울부짖으며 지나갔다. 나는 부러진 검을 고쳐 잡으며 속으로 뇌까렸다.
기다려라, 맹주.
나의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산천초목이 하얗게 질려 죽어갔다. 그것은 복수의 시작이자, 인간 설무한의 완전한 종말이었다. 어둠 속에서 푸른 눈동자가 번뜩이며 길을 열었다. 숲을 지키던 짐승들이 겁에 질려 굴 속으로 숨어들었다. 나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심장도 뛰지 않았다. 오직 타오르는 증오만이 나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이었다.
천검봉 입구에 도착했을 때, 수천 명의 무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정무맹의 정예들이었으나, 내 눈에는 그저 부서지기 쉬운 얼음 조각들에 불과했다. 나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하늘에서 차가운 눈송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계절에 맞지 않는 폭설이 대지를 덮었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무사들의 살점을 파고들었다. 비명소리가 설산의 고요를 깨웠다. 나는 그 비명소리를 배경 삼아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맹주의 기운이 정점에서 나를 비웃고 있었다. 나는 얼음으로 된 심장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맹주의 목소리가 산 전체를 울렸다. 오너라, 나의 실패작이여.
나는 대답 대신 검을 휘둘러 산문을 통째로 얼려버렸다. 거대한 얼음 장벽이 무너지며 길이 열렸다. 나는 그 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맹주와 나, 둘 중 하나가 가루가 되어 사라질 때까지 이 추위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죽어라.
나의 얼음 검이 맹주의 목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