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운휘의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지도의 얼룩진 구석이 아니었다. 그것은 기억의 심연, 혹은 누군가 강제로 도려내려 했던 뇌리 속의 금지된 구역이었다. 그의 창백한 입술이 달싹이며 뱉어낸 이름은 백골동이었다.
"그곳에 모든 것이 있다."
진운휘의 음성은 쇠사슬을 끄는 소리처럼 거칠었다. 설무한은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했다. 벗이라 믿었던 사내가 정무맹의 금의위 부대장이 되어 돌아왔을 때, 가슴을 찌른 것은 배신감보다 서글픔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서글픔은 서늘한 긴장으로 치환되었다.
백골동.
이름조차 불길한 그곳은 정무맹의 비밀 기지였다. 아니, 정무맹이 천하에 알리고 싶지 않은 추악한 실험실이자 무덤이었다. 설무한은 가슴께를 압박하는 둔탁한 통증을 느꼈다. 십 년 전 삼켰던 한빙주가 단전 깊은 곳에서 고동치고 있었다.
낙양 전장의 계좌는 이미 동결되었고, 그의 이름은 파렴치한 횡령범으로 강호에 뿌려졌다. 돌아갈 곳도, 물러설 곳도 없었다. 설무한은 자신을 따르는 소규모 부대를 둘러보았다. 폐사찰에서 포섭한 부랑 무인들과 파문당한 제자들. 그들의 눈에는 독기와 갈망이 뒤섞여 있었다.
"출발한다."
설무한의 짧은 명령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백골동으로 향하는 길은 험준했다. 십만대산의 북단, 천검봉의 그림자가 드리운 계곡은 대낮에도 빛이 들지 않았다. 발을 내디딜 때마다 마른 나뭇가지가 비명을 지르며 부서졌다. 안개는 살아있는 생물처럼 그들의 발목을 휘감아 돌았다.
입구는 거대한 바위 틈새에 숨겨져 있었다. 일반인의 눈에는 그저 흔한 동굴처럼 보였으나, 설무한의 감각은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기의 흐름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려 있었다. 거대한 진법이 산 전체를 감싸고 침입자의 생기를 빨아들이는 구조였다.
동굴 내부로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찌르는 것은 비릿한 약취와 썩은 내였다. 천장에서는 차가운 물방울이 떨어져 어깨를 적셨다. 바닥은 미끄러웠고, 벽면에는 이끼 대신 정체 모를 푸른 곰팡이가 피어 있었다.
"온도가 낮아지고 있습니다."
뒤를 따르던 무인 하나가 이를 맞부딪히며 속삭였다.
정말이었다. 입구에서 불과 수십 보 들어왔을 뿐인데, 내뱉는 숨결이 하얀 서리로 변해 흩어졌다. 설무한은 벽면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냉기가 손바닥을 타고 혈맥으로 파고들었다. 단순한 추위가 아니었다. 침입자의 온기를 감지하면 스스로 온도를 낮추어 얼려버리는 고대의 진법, 빙하금제였다.
"서로의 거리를 좁혀라. 내공을 운용해 체온을 유지하도록."
설무한이 앞장섰다. 그의 단전 속 한빙주가 외부의 냉기에 반응하며 요동쳤다. 파괴되었던 혈맥을 임시로 잇고 있는 이 푸른 구슬은 고통인 동시에 유일한 동력이었다. 십 년 전, 사부가 건넸던 그 영물이 사실은 이곳에서 만들어진 소모품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옥죄었다.
길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다. 인공적으로 깎아낸 석실들이 좌우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어떤 방에는 깨진 단약병들이 굴러다녔고, 어떤 방에는 무인들의 것으로 보이는 낡은 검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여기서 죽어간 이들의 원한이 공기를 얼리고 있다."
설무한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바닥에 흩어진 뼈들은 이미 백색으로 변해 부스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공을 익히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더 강한 무기를 만들기 위한 재료로 쓰였다. 정무맹이 추구하는 정의의 뒷면에는 이런 시산혈해가 숨겨져 있었다.
갑자기 사방에서 기괴한 소음이 들려왔다.
쩍, 쩌적.
벽면을 덮고 있던 얼음들이 갈라지는 소리였다. 통로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했다. 발아래 고여있던 물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신발을 붙들었다. 진법이 발동한 것이다.
"모두 멈춰!"
설무한이 검을 뽑았다.
허공에서 날카로운 고드름들이 화살처럼 쏟아졌다. 무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검을 휘둘렀다. 챙, 채쟁! 금속음이 동굴 안을 어지럽게 울렸다. 쏟아지는 얼음 화살은 끝이 없었다. 한 명의 무인이 어깨에 고드름이 박히자 그의 상처 부위부터 푸른 얼음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으아악! 몸이 굳어갑니다!"
상처를 통해 침투한 냉기는 순식간에 그의 혈맥을 잠식했다. 설무한은 망설이지 않고 그의 뒤로 다가가 명치를 타격했다. 뜨거운 한빙진기를 주입해 외부의 냉기를 밀어냈다. 무인의 안색이 잠시 돌아왔으나 진법의 위력은 더욱 거세졌다.
설무한은 눈을 감았다. 사방을 뒤덮은 냉기의 흐름을 읽으려 애썼다. 그의 단전 속에 있는 한빙주가 공명하고 있었다. 이것은 이 장소의 일부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자식처럼 한빙주는 동굴의 기운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나를 따라라. 멈추면 죽는다."
설무한의 검 끝에서 푸른 검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진법의 중심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얼어붙은 바닥이 그의 발걸음마다 박살 났다. 쏟아지는 얼음 폭풍을 검기로 갈라내며 그는 어둠 속으로 질주했다. 뒤를 따르는 이들은 설무한이 만들어낸 좁은 길목에 필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얼마나 달렸을까. 광활한 지하 공동이 나타났다.
그곳은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수십 개의 거대한 수정 원통들이 세워져 있었고, 그 안에는 정체 모를 액체와 함께 무언가가 잠겨 있었다. 원통 사이를 잇는 관들을 통해 푸른 진기가 흐르고 있었다. 중앙의 거대한 제단 위에는 정무맹의 문장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설무한은 걸음을 멈췄다.
수정 원통 안에 들어있는 것들은 인간이었다. 아니, 한때는 인간이었을 것들이었다. 그들의 피부는 투명할 정도로 창백했고, 혈맥은 푸른색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눈동자는 초점을 잃은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들의 가슴에는 낯익은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청운검문.
설무한의 심장이 내려앉았다. 자신의 문파였다. 자신이 평생을 바쳐 지키려 했던, 그리고 자신을 배신했던 그 문파의 제자들이 이곳에 소모품으로 박혀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뒤따라온 무인 중 하나가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원통 속의 괴물들이 일제히 눈을 떴다. 그들의 눈동자에는 지성도,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오직 파괴적인 본능과 억눌린 살기만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들은 원통의 유리를 손톱으로 긁어대기 시작했다.
기괴한 금이 유리창에 번져나갔다.
챙그랑!
가장 가까운 원통이 박살 나며 액체가 쏟아졌다. 그 안에서 기어 나온 괴물은 설무한과 똑같은 푸른 진기를 내뿜고 있었다. 아니, 그것은 진기라기보다 저주에 가까운 냉기였다. 괴물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손에는 얼음으로 빚어진 기괴한 검이 들려 있었다.
괴물이 고개를 들었다. 일그러진 안면 근육 사이로 낯익은 이목구비가 보였다. 설무한이 직접 검을 가르쳤던, 3년 전 실종되었다던 막내 사질이었다.
"아."
설무한의 입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괴물은 대답 대신 검을 휘둘렀다. 차가운 검기가 설무한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뒤이어 수십 개의 원통이 동시에 깨지는 소리가 지하 공동을 가득 메웠다. 어둠 속에서 수십 쌍의 푸른 눈동자가 설무한을 향해 빛나기 시작했다.
설무한은 떨리는 손으로 검자루를 고쳐 쥐었다.
가장 앞에 선 괴물이 짐승 같은 포효를 내지르며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가 내뿜는 냉기는 설무한의 단전 속에 있는 한빙주와 똑같은 파동을 그리며 공간을 뒤흔들었다. 괴물의 가슴에 새겨진 청운검문의 문장이 붉게 달아올랐다.
설무한은 검을 들어 올렸다.
"오지 마라."
그의 목소리가 떨렸으나 괴물의 검은 이미 그의 머리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바닥을 휩쓰는 한기에 발목이 묶였다. 설무한은 뒤로 반 보 물러나며 검을 비스듬히 세웠다. 괴물로 변한 사질의 검초는 정교했다. 아니, 그것은 정교함을 넘어 기계적이었다. 청운검문의 비전인 '낙화검법'의 변형이었다.
살점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설무한의 어깨가 붉게 물들었다. 고통보다 먼저 느껴진 것은 소름 끼치는 냉기였다. 상처를 통해 파고든 기운은 단전의 한빙주를 강렬하게 유혹했다. 내공의 흐름이 뒤엉키며 시야가 일렁였다.
"사질, 나다. 정신 차려라!"
설무한의 외침은 공허한 메아리로 돌아왔다.
괴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죽은 눈으로 설무한의 심장을 노리고 검을 찔러넣을 뿐이었다. 뒤따라오던 부랑 무인들은 이미 아수라장이 된 공동에서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수정 원통에서 풀려난 수십 명의 괴물들이 그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지옥이다."
누군가의 단말마가 동굴 벽에 부딪혀 부서졌다.
설무한은 이를 악물었다. 단전의 한빙주를 강제로 억눌렀다. 억지로 끌어올린 내공이 혈맥을 깎아내며 타오르는 통증을 유발했다. 그는 검을 휘둘러 사질의 목을 겨냥했다. 그러나 검 끝은 찰나의 순간 흔들렸다.
자신이 직접 목판을 깎아 선물했던 아이였다. 명절마다 술병을 들고 찾아와 수줍게 웃던 제자였다. 그 기억이 검신을 무겁게 짓눌렀다.
"크어어!"
괴물이 허공을 가르며 도약했다.
차가운 검기가 폭풍처럼 몰아쳤다. 설무한은 바닥을 구르며 공격을 피했다. 그가 서 있던 자리가 얼음 파편과 함께 박살 났다. 괴물의 손에서 뻗어 나온 냉기는 이미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것은 자연의 재해와도 같았다.
설무한은 숨을 몰아쉬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십 명의 괴물들이 원을 그리며 그를 포위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한때는 청운검문의 형제였고, 조카였고, 자식들이었다. 정무맹은 그들을 납치해 인간 병기로 개조한 것이다.
"위진악, 이 개만도 못한 놈."
설무한의 음성에서 살기가 뚝뚝 떨어졌다.
그가 배신자라 믿었던 제자 위진악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모든 추악한 계획의 중심에 그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설무한의 손가락이 검자루를 부서질 듯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피는 얼어붙은 바닥에 닿자마자 검붉은 얼음 조각으로 변했다.
중앙 제단 위에서 기이한 빛이 뿜어졌다. 거대한 진법의 눈이 떠오르며 지하 공동 전체를 붉은빛으로 물들였다. 괴물들의 움직임이 일제히 멈췄다. 그들은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병사들처럼 제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실험체 0호, 기동 확인."
어둠 속에서 냉소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설무한은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제단 뒤편의 그림자 속에서 한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금색 실로 수놓인 푸른 관복. 정무맹의 고위 간부임을 상징하는 복장이었다. 남자의 얼굴에는 기이한 흉터가 길게 그어져 있었다.
남자는 설무한을 보며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띄웠다.
"죽은 줄 알았더니, 제 발로 무덤을 찾아왔군. 수석제자 설무한."
"누구냐."
설무한의 목소리는 지하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것처럼 낮고 무거웠다.
남자는 대답 대신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제단 주위의 괴물들이 일제히 설무한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수십 자루의 얼음 검에서 뿜어지는 한기가 공간의 산소를 전부 얼려버릴 듯 몰아쳤다.
"나를 알 필요는 없다. 너는 그저 저들과 같은 재료가 될 뿐이니까."
남자의 손가락이 설무한을 가리켰다.
동시에 괴물들이 폭발적인 속도로 쇄도했다. 사방이 푸른 검기로 뒤덮였다. 설무한은 단전의 한빙주를 완전히 해방했다. 억눌려 있던 냉기가 폭주하며 그의 머리카락을 하얗게 물들였다.
챙! 채쟁!
설무한의 검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회전했다. 쏟아지는 공격을 막아낼 때마다 뼈가 어긋나는 충격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제단을 향해 나아갔다.
"비켜라!"
설무한의 검에서 거대한 빙룡이 솟구쳤다.
청운검문의 비기, '만화빙룡섬'이었다. 푸른 진기가 소용돌이치며 괴물들의 대열을 무너뜨렸다. 얼음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고, 괴물들의 신음이 공동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그들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즉시 일어나 다시 달려들었다.
설무한의 체력이 급격히 소모되었다.
한빙주의 힘을 빌려 무공을 펼치는 것은 양날의 검이었다. 혈맥이 얼어붙어 감각이 마비되기 시작했다. 발걸음이 무거워졌고, 검을 쥔 손목에 힘이 빠졌다.
"역시 정품은 다르군."
남자가 감탄하듯 박수를 쳤다.
"그 한빙주, 원래 네 것이 아니지 않나? 우리가 공들여 만든 물건인데 말이야."
설무한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십 년 전, 사부가 죽어가며 그에게 넘겨주었던 영물. 그것이 정무맹의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인공적인 물건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난도질했다. 사부 역시 이 추악한 실험의 일환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사부조차 속았던 것일까.
"진실을 알고 싶나? 그럼 먼저 죽어라."
남자가 품속에서 작은 방울을 꺼내 흔들었다.
딸랑.
맑은 방울 소리가 공동을 울리는 순간, 괴물들의 몸이 기괴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가슴에 새겨진 문양이 붉다 못해 검게 타올랐다. 괴물들의 입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기운은 이전보다 수 배는 더 강해졌다.
설무한은 검을 바닥에 박고 버텼다.
밀려오는 압도적인 살기에 숨이 턱 막혔다. 눈앞의 제자들은 이제 인간의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정무맹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사질……."
가장 먼저 달려들었던 막내 사질이 설무한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의 검이 설무한의 가슴을 향해 직선으로 뻗어 나왔다. 설무한은 피하지 않았다. 아니,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검을 들어 사질의 검을 받아내는 대신, 그의 어깨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미안하다. 내가 무능해서."
설무한의 목소리가 젖어 들었다.
그는 자신의 단전에 남은 마지막 진기를 사질의 몸속으로 쏟아부었다. 파괴적인 한빙진기가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따뜻한 귀원진기였다. 괴물의 몸속에서 충돌하는 두 기운이 격렬한 경련을 일으켰다.
사질의 눈동자에 아주 잠깐, 아주 찰나의 순간 동안 생기가 돌았다.
"사…… 부…… 님……."
갈라진 목소리가 설무한의 귓가를 스쳤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사질의 몸은 순식간에 차가운 얼음 조각으로 변해 바스러졌다. 설무한의 손에는 오직 부서진 천 조각만이 남았다.
설무한의 고개가 천천히 들렸다.
그의 눈은 이제 푸른 빛이 아니라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단전의 한빙주가 비명을 지르며 깨어졌다. 파괴된 한빙주에서 흘러나온 막대한 냉기가 설무한의 전신을 감싸 안았다.
"전부 죽인다."
설무한의 발치에서부터 바닥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단순한 얼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생기를 얼려 죽이는 절대적인 영도(零度)의 영역이었다. 제단 위의 남자는 당황한 듯 뒷걸음질 쳤다. 그는 방울을 미친 듯이 흔들어댔지만, 괴물들은 이미 설무한의 기세에 눌려 움직이지 못했다.
설무한이 바닥을 찼다.
공간이 왜곡될 정도의 속도였다. 그는 순식간에 남자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남자의 눈에 극도의 공포가 서렸다. 설무한의 검이 남자의 목을 향해 사선으로 그어졌다.
서걱.
남자의 머리가 허공을 날았다. 그러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설무한은 남겨진 괴물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것은 무공이라기보다 처절한 장례식에 가까웠다. 그는 제자들의 고통을 끝내주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깎아 나갔다.
지하 공동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대한 얼음 기둥들이 천장을 이기지 못하고 꺾였다. 설무한은 무너지는 돌무더기 사이에서 마지막 괴물을 베어 넘겼다. 그의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다. 내공은 바닥났고, 혈맥은 갈가리 찢어졌다.
그는 제단 중앙에 홀로 서서 거친 숨을 내뱉었다.
사방은 고요했다. 살아남은 부랑 무인들은 이미 도망쳤거나 얼어 죽었다. 오직 설무한만이 시산혈해의 중심에서 부러진 검을 쥐고 서 있었다.
그때였다.
제단 밑바닥에서 은밀한 기계 장치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설무한은 본능적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제단의 석판이 좌우로 갈라지며 작은 상자 하나가 솟아올랐다.
상자 위에는 편지 한 통이 놓여 있었다.
설무한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집어 들었다. 겉봉에는 낯익은 필체로 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위진악의 글씨였다.
[스승님, 여기까지 오실 줄 알았습니다.]
편지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설무한의 등 뒤로 서늘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생각보다 늦으셨군요."
동굴 입구에서 들려온 것은 진운휘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조금 전까지의 거칠고 힘겨운 음색이 아니었다. 맑고, 단정하며, 오만함이 묻어나는 위진악의 바로 그 목소리였다.
설무한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진운휘의 껍데기를 벗어던진 사내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는 진운휘가 아니었다. 얼굴 근육을 뒤틀어 변장했던 위진악 본인이었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설무한의 가슴에 박힌 부러진 검신을 가리켰다.
"방금 당신이 죽인 그 남자가 진짜 진운휘였습니다."
위진악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