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의위의 쾌검이 밤공기를 가르며 짓쳐들었다.
은백색 검신이 설무한의 목줄기를 스치는 찰나였다.
파지직.
설무한의 체내에서 갈무리되어 있던 한빙주의 냉기가 폭발했다.
투명한 장벽처럼 고착된 공기가 검의 궤적을 미세하게 굴절시켰다.
한 끗 차이로 검끝이 허공을 긁으며 불꽃을 튀겼다.
설무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신형을 띄웠다.
그의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굽어지며 암살 부대장의 가면을 향해 뻗어 나갔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았다.
힘을 주어 잡아당기자, 조잡한 귀면 가면이 맥없이 벗겨졌다.
달빛 아래 드러난 얼굴은 낯익었다.
아니,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설무한의 손가락이 잘게 떨렸다.
"운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십 년 전, 청운검문의 연무장에서 함께 땀을 흘리던 유일한 벗이었다.
진운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는 초점이 풀린 채 탁한 잿빛을 띠고 있었다.
입가에 맺힌 핏방울이 턱을 타고 흘러 바닥을 적셨다.
진운휘가 다시 검을 고쳐 잡았다.
그의 움직임은 살아 있는 사람이라기보다 잘 짜인 기계에 가까웠다.
주변을 에워싼 수백 개의 횃불이 일렁이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금의위 무사들이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진운휘의 검끝에서 서늘한 살기가 뿜어졌다.
그는 설무한의 부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신형을 날렸다.
검기가 바닥의 돌들을 가루로 만들며 쇄도했다.
설무한은 옆으로 몸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등 뒤의 석등이 일도양단되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정신 차려라, 진운휘!"
설무한이 외쳤지만, 돌아오는 것은 무감각한 검의 대화뿐이었다.
진운휘의 검로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오직 살상만을 위해 정제된 투박하고도 빠른 검술이었다.
설무한은 한빙진기를 끌어올려 정권으로 검신을 쳐냈다.
깡!
금속음이 고막을 찔렀다.
진운휘의 손목이 뒤로 꺾였으나, 그는 통증조차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즉시 반대편 손으로 단검을 뽑아 설무한의 옆구리를 노렸다.
설무한은 옷자락이 찢기는 것을 감수하며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밤바람이 살갗을 스쳤다.
진운휘의 목 뒤편에 새겨진 기괴한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색으로 점철된 그 문양은 정무맹의 금제 중 하나였다.
망각초의 독기운을 혈맥에 주입하여 기억을 지우고 인형으로 만드는 술법.
설무한의 가슴 안쪽이 뜨거워졌다.
친구를 도구로 부리는 정무맹의 잔인함이 뼛속까지 시리게 다가왔다.
진운휘는 다시 검을 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그의 호흡은 일정했고, 감정의 동요는 찾아볼 수 없었다.
"운휘야, 네 검은 예전보다 빨라졌지만, 예전보다 훨씬 차갑구나."
설무한이 낮게 읊조렸다.
그는 허리춤에 손을 얹고 내공을 갈무리했다.
한빙주의 기운이 파괴된 혈맥을 임시로 잇기 시작했다.
얼어붙은 진기가 혈관을 타고 흐를 때마다 칼로 도려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설무한은 그 고통을 감내하며 정면으로 걸어 나갔다.
진운휘의 검이 다시 한번 허공을 갈랐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검날이 설무한의 어깨를 깊게 파고들었다.
뜨거운 선혈이 솟구쳐 진운휘의 얼굴에 튀었다.
그럼에도 설무한은 멈추지 않고 진운휘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왼손이 진운휘의 뒤통수를 붙잡고, 오른손이 단전을 눌렀다.
"끄악!"
진운휘의 입에서 짐승 같은 괴성이 터져 나왔다.
설무한의 손끝에서 푸르스름한 냉기가 뿜어져 나와 그의 체내로 흘러 들어갔다.
한빙주의 정순한 진기가 망각초의 독기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진운휘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탁했던 눈동자에 미세한 생기가 돌기 시작하며 그의 몸이 경련했다.
포위하고 있던 금의위 무사들이 당황한 듯 서로를 쳐다봤다.
"부대장님을 구해라!"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수십 자루의 검이 설무한을 향해 쏟아졌다.
설무한은 등 뒤로 쏟아지는 공격을 무시했다.
오직 진운휘의 단전에 집중하며 진기를 역류시켰다.
얼음 송곳이 박히는 듯한 감각이 두 사람의 혈맥을 공유했다.
진운휘의 목 뒤에 새겨진 붉은 문양이 검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머릿속을 짓누르던 암흑의 장막이 찢겨 나갔다.
단편적인 기억들이 조각나며 그의 의식을 강타했다.
함께 술을 마시던 밤, 청운검문의 뒷산, 그리고 정무맹 지하 감옥의 차가운 바닥.
모든 진실이 해일처럼 몰려왔다.
진운휘의 비명이 사찰의 고요를 깼다.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바닥에 부딪혔다.
설무한의 어깨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손을 떼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진기를 주입하며 기억의 봉인을 파괴했다.
진운휘의 전신에서 검은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의 영혼을 갉아먹던 망각초의 잔재였다.
주변의 횃불들이 그 기운에 반응하여 푸른색으로 변하며 일렁였다.
금의위 무사들이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진운휘의 고개가 힘없이 꺾였다.
그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려 설무한의 손등에 떨어졌다.
"무……한……아……."
가까스로 터져 나온 이름은 애처로웠다.
설무한은 이를 악물고 마지막 남은 한빙진기를 쏟아부었다.
단전 안의 한빙주가 기괴한 박동을 내며 요동쳤다.
진운휘의 가슴 속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정무맹이 채운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끊어지는 소리였다.
진운휘의 몸이 경직되더니 이내 설무한의 품으로 쓰러졌다.
설무한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쓰러진 친구를 부축했다.
한빙주의 기운을 무리하게 사용한 탓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전신의 뼈마디가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아직 포위망은 건재했고, 정무맹의 본대는 도착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쓰러져 있던 진운휘가 돌연 설무한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 정도로 강력한 힘이었다.
"도망…… 쳐……."
진운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기억의 봉인이 풀린 환희보다 더 큰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는 설무한의 귀에 대고 갈라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놈들이…… 네 심장에…… 장치를……."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진운휘의 몸이 다시 한번 크게 튀어 올랐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 정체불명의 붉은 빛이 번쩍였다.
설무한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하고 신형을 뒤로 물렸다.
진운휘의 입에서 피 섞인 비명과 함께 가공할 만한 진기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자폭의 기운이었다.
정무맹이 기억의 봉인이 풀릴 경우를 대비해 심어둔 최후의 수단이었다.
설무한은 눈을 부릅뜨고 손을 뻗었다.
"안 돼!"
그러나 진운휘의 몸을 감싼 붉은 빛은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지고 있었다.
주변의 금의위 무사들도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그 순간, 진운휘의 가슴팍에서 튀어나온 것은 단순한 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수십 권의 비급 조각들과 함께 섞여 나온 청운검문의 비전 수인들이었다.
사라졌던 문파의 정수가 친구의 신체를 매개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설무한은 충격에 휩싸여 굳어버렸다.
제자들이 훔쳐 갔다던 무공들이 왜 친구의 몸 안에 봉인되어 있었단 말인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으나 생각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폭발의 여파가 사찰 전체를 뒤흔들었다.
대웅전의 지붕이 무너져 내리며 거대한 먼지 구름이 일었다.
설무한은 날아오는 파편들을 한빙진기로 쳐내며 진운휘를 향해 몸을 던졌다.
먼지 속에서 누군가의 차가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위진악의 목소리도, 사부의 목소리도 아니었다.
먼지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나타난 것은 처참한 광경이었다.
진운휘의 신체는 반쯤 타버린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가 쏟아낸 비급 조각들을 누군가 태연하게 줍고 있었다.
검은 도포를 깊게 눌러쓴 사내였다.
그는 설무한을 힐끗 쳐다보더니 품 안에서 작은 종을 꺼내 흔들었다.
딸랑.
기분 나쁜 금속음이 사찰 안에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맞춰 쓰러져 있던 금의위 시체들이 기괴한 각도로 몸을 일으켰다.
"과연, 한빙주의 위력이 대단하군."
사내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설무한은 주먹을 꽉 쥐었다.
단전의 냉기가 분노에 호응하듯 푸른 빛을 발했다.
"누구냐."
사내는 대답 대신 손에 든 비급 조각 하나를 설무한에게 던졌다.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 종이를 낚아챈 설무한의 눈이 커졌다.
거기에는 자신의 필체로 적힌 글귀가 있었다.
'위진악은 나의 뜻을 이을 유일한 그릇이다.'
조작된 장부의 뒷장이자, 자신이 결코 쓴 적 없는 내용이었다.
사내가 천천히 다가오며 가면을 벗었다.
달빛에 드러난 얼굴을 본 설무한은 숨을 들이켰다.
그것은 죽었다고 믿었던, 그리고 자신을 벼랑 끝으로 밀어 넣었던 사부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었고 피부는 창백한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스승님……?"
설무한의 목소리가 떨림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사부는 대답 대신 손을 들어 설무한의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실 같은 진기가 뻗어 나왔다.
설무한은 가슴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심장 깊숙이 박혀 있던 금제가 사부의 진기에 반응하여 요동쳤다.
"무한아, 너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사부의 입술이 기괴하게 달싹였다.
그는 품에서 또 다른 한빙주를 꺼내 보였다.
설무한이 삼킨 것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짙은 푸른색을 띤 구체였다.
사부가 그것을 천천히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설무한은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심장을 쥐어짜는 고통이 이성을 마비시켰다.
사부는 한빙주를 삼킨 뒤, 고통스러워하는 설무한을 내려다보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이제 마지막 조각을 회수할 시간이다."
그가 손을 뻗어 설무한의 명치를 강하게 타격했다.
커억.
설무한의 입에서 푸른 진기가 섞인 선혈이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사부의 손이 설무한의 단전 안으로 파고드는 감각이 소름 끼치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