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양 북쪽 외곽에는 이름조차 잊힌 폐사찰이 하나 있었다.
서까래는 썩어 문드러졌고 불상의 머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깨진 기와 사이로 스며든 달빛이 차가운 바닥을 비췄다.
설무한은 그 한가운데 서서 부서진 불단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사방에서 습한 흙내음과 곰팡이 섞인 바람이 불어왔다.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가 하나둘씩 겹쳐지기 시작했다.
누더기를 걸친 사내들이 사찰 담벼락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손에는 녹슨 칼이나 이가 빠진 도끼가 들려 있었다.
정무맹의 눈을 피해 뒷골목을 전전하던 부랑 무인들이었다.
정말로 이리로 오면 돈을 준다고 했나.
가장 앞에 선 흉측한 흉터의 사내가 침을 뱉으며 물었다.
사내의 누런 이 사이로 고약한 술 냄새가 풍겨져 나왔다.
설무한은 대답 대신 발치에 놓인 가죽 주머니를 툭 찼다.
주머니가 뒤집어지며 황금빛 덩어리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찰그랑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사내들의 귓가를 자극했다.
사내들의 눈동자가 일제히 커지며 탐욕으로 번들거렸다.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녹슨 칼날들이 달빛을 받아 기분 나쁜 빛을 산란시켰다.
이걸 다 준단 말이지.
흉터 사내가 칼날을 세우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주변에 있던 다른 무인들도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설무한은 시선을 들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주머니를 가리켰다.
가져갈 수 있다면 말이지.
혼자서 우리 모두를 상대하겠다는 거냐.
사내의 비웃음과 함께 서너 명이 동시에 바닥을 박찼다.
칼날이 허공을 가르며 설무한의 어깨를 노리고 쇄도했다.
먼지 섞인 공기가 칼날의 궤적을 따라 날카롭게 갈라졌다.
설무한의 손가락이 가볍게 튕겨졌다.
치익 소리와 함께 대기 중의 수분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사내들의 발등이 바닥에 고정된 듯 멈춰 섰다.
투득 소리가 나며 얼음 조각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사내들이 당황하며 발을 빼려 했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한기가 그들의 다리를 타고 올라가 단전까지 파고들었다.
설무한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바닥에 푸른 서리가 맺혔다.
사찰 내부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며 입김이 하얗게 뿜어졌다.
너희는 정무맹에 쫓기는 신세지.
설무한의 목소리는 낮고 서늘했다.
흉터 사내가 이를 악물며 내공을 끌어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얼어붙은 경맥은 기운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내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자신의 다리가 감각을 잃어가는 것을 공포스럽게 지켜봤다.
우리를 죽이려는 거냐.
사내의 목소리가 떨림을 숨기지 못하고 갈라졌다.
아니 살려주려는 거다.
설무한이 사내의 가슴팍에 손바닥을 가볍게 얹었다.
차가운 기운이 사내의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사내는 비명을 지르려 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몸속에서 묵직한 탁기가 입을 통해 뿜어져 나왔다.
검은 피가 바닥에 뿌려지며 사내의 안색이 묘하게 맑아졌다.
내상이 사라졌어.
사내가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수년 동안 그를 괴롭히던 통증이 씻은 듯이 가라앉아 있었다.
설무한은 나머지 무인들에게도 차례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동자가 푸른 빛을 머금으며 기묘한 압박감을 발산했다.
나는 너희에게 충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설무한은 바닥에 흩어진 황금을 다시 주머니에 담았다.
다만 정무맹의 목을 치는 데 동참할 기회를 줄 뿐이다.
무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압도적인 무력과 믿기 힘든 치유의 힘 앞에 그들은 굳었다.
한 사내가 무릎을 꿇으며 고개를 깊게 숙였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었습니다 시키는 대로 하죠.
하나둘씩 무기가 바닥에 놓이는 금속음이 이어졌다.
폐사찰 내부에 기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동맹이 맺어졌다.
설무한은 창밖의 어두운 숲을 응시했다.
그의 손가락은 습관처럼 빈 칼집이 있어야 할 허리를 더듬었다.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뒤 처음으로 손에 쥐는 무력이었다.
이들은 정규 무인이 아니었지만 잃을 것이 없는 자들이었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대인.
흉터 사내가 조심스럽게 물으며 자세를 낮췄다.
설무한은 대답 대신 품에서 낡은 서신 한 장을 꺼냈다.
청운검문의 문양이 새겨진 이제는 사라져야 할 흔적이었다.
그는 서신을 손안에서 으스러뜨려 가루로 만들었다.
죽은 자의 이름은 알 필요 없다.
사내들은 그의 서늘한 기운에 눌려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사찰 내부로 스며드는 밤안개가 점점 짙어졌다.
설무한은 한빙주의 기운을 가다듬으며 단전의 고동을 느꼈다.
차갑지만 뜨거운 모순된 힘이 전신을 순환하고 있었다.
위진악이 가로챈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한 첫 돌이 놓였다.
그는 바닥에 지도를 펼치고 낙양의 주요 거점을 가리켰다.
정무맹의 보급로를 먼저 끊는다 너희는 그곳 지리에 밝으니.
사내들의 눈에 서서히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 단순한 탐욕이 아니라 권력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사찰의 적막은 깊어갔고 계획은 구체화되었다.
사내들은 지도의 지점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통로를 설명했다.
낙양 전장의 계좌가 동결되었다는 소문이 그들 사이에서 돌았다.
돈줄이 막힌 무인들에게 이 황금은 신이 내린 동아줄이었다.
설무한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변의 기척에 집중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방을 메우던 벌레 소리가 일순간 뚝 끊겼다.
설무한의 고개가 미세하게 틀어지며 살기를 감지했다.
지붕 위에서 아주 미세한 기와 긁히는 소리가 났다.
엎드려.
설무한의 외침과 동시에 천장이 폭발하듯 무너져 내렸다.
거대한 먼지구름과 함께 검은 그림자들이 내부로 낙하했다.
그들은 일정한 진형을 갖추며 무인들을 포위했다.
금빛 실로 수놓아진 비단 옷이 달빛에 번뜩였다.
정무맹 소속의 비밀 처단 부대 금의위였다.
그들의 검신에는 푸르스름한 독액이 발려 있었다.
기괴한 빛이 먼지 구름 속에서 번뜩이며 춤을 췄다.
쥐새끼들이 모여 있다는 보고가 틀리지 않았군.
가장 앞에 선 사내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그는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있었으나 턱선이 낯익었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초점이 흐트러졌다.
삿갓 아래로 보이는 사내의 눈매는 익숙한 것이었다.
십 년 전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그 눈이었다.
진운휘.
한때 생사를 함께하자 맹세했던 유일한 친우였다.
그가 지금 정무맹의 검을 들고 설무한 앞에 서 있었다.
진운휘는 설무한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손가락을 튕겼다.
살려두지 마라 배신자의 무리는 뿌리째 뽑아야 한다.
금의위의 검들이 일제히 설무한과 무인들을 향해 뻗었다.
독 기운을 머금은 검기가 사찰의 공기를 썩게 만들었다.
부랑 무인들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으나 길은 막혔다.
설무한은 한빙진기를 끌어올려 정면의 검을 막아냈다.
얼어붙은 공기와 독기가 충돌하며 불꽃이 튀었다.
진운휘의 검 끝이 설무한의 목줄기를 간발의 차로 스쳤다.
목 주변의 피부가 따끔거리며 붉은 선이 그어졌다.
운휘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설무한의 낮은 목소리에 진운휘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죽은 놈이 말이 많구나 무한아.
진운휘의 검이 다시 궤적을 그리며 가슴을 파고들었다.
설무한은 뒤로 물러나며 바닥에 떨어진 녹슨 도를 걷어찼다.
도가 회전하며 진운휘의 안면을 노리고 날아갔다.
진운휘는 가볍게 고개를 돌려 도를 피하며 거리를 좁혔다.
그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가 사찰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치며 파열음을 냈다.
네 놈이 살아 있다는 소식에 밤잠을 설쳤다.
진운휘가 검을 가로로 눕히며 내공을 집중했다.
검신에 발린 독액이 부르르 떨리며 기화하기 시작했다.
보랏빛 연기가 설무한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압박해왔다.
설무한은 숨을 멈추고 손바닥을 바닥으로 뻗었다.
한빙주의 냉기가 바닥을 타고 거대한 얼음 벽을 세웠다.
독 안개가 얼음 벽에 막혀 소용돌이치며 흩어졌다.
진운휘는 삿갓을 벗어 던지며 광기 어린 눈을 드러냈다.
그 눈에는 동정이나 그리움 따위는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위진악이 너를 죽이면 장로 자리를 주겠다고 하더군.
진운휘가 바닥을 박차며 번개처럼 쇄도했다.
그의 검이 얼음 벽을 산산조각 내며 설무한의 미간을 겨냥했다.
설무한은 부서지는 얼음 파편 사이로 몸을 던졌다.
두 사람의 신형이 엉키며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사찰의 기둥들이 검기에 잘려 나가며 천장이 비명을 질렀다.
무너지는 기와 아래서 설무한의 푸른 눈이 빛났다.
그는 자신의 심장 부근을 파고드는 진운휘의 검신을 손가락으로 튕겨냈다.
챙그랑 소리와 함께 진운휘의 검이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졌다.
친구라 믿었던 세월이 아깝구나.
설무한의 손끝에서 서리 맺힌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졌다.
진운휘의 가슴팍에 설무한의 정권이 깊숙이 박혔다.
우드득 소리와 함께 진운휘의 몸이 뒤로 날아가 벽에 처박혔다.
벽이 무너지며 자욱한 먼지가 다시 한번 사찰을 덮었다.
금의위 무사들이 주춤하며 뒤로 물러나 진형을 재정비했다.
설무한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가슴의 통증을 억눌렀다.
한빙주의 기운이 폭주하듯 날뛰며 혈맥을 긁어댔다.
먼지 속에서 진운휘가 비틀거리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입가에는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 무한아 너를 노리는 건 나뿐만이 아니니까.
진운휘가 품 안에서 신호탄을 꺼내 허공으로 쏘아 올렸다.
피익 소리와 함께 붉은 불꽃이 밤하늘을 찢으며 타올랐다.
사찰 주변 숲속에서 수백 개의 횃불이 일제히 밝혀졌다.
포위망은 이미 이 폐사찰을 수십 겹으로 에워싸고 있었다.
설무한은 자신의 손바닥에 맺힌 서리를 내려다보았다.
진운휘는 검을 고쳐 잡으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제 진짜 사냥을 시작해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