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운검문의 파멸이 시작된 그날처럼 하늘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백골동의 깊은 어둠 속에서 푸른 안개가 소리 없이 피어올랐다. 설무한의 발치에서 시작된 한기가 동굴 바닥의 습기를 움켜쥐었다. 바닥이 순식간에 하얗게 얼어붙으며 쩍쩍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날카로운 파열음이 고막을 찔렀으나 그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허공이 기괴하게 일렁였다. 형체도 없는 기운이 응집되더니 이윽고 노인의 형상을 한 영체가 나타났다. 정무맹주 백운비였다. 그의 영체는 반투명한 빛을 내뿜으며 설무한을 내려다보았다. 설무한은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제자들에게 배신당한 이후 몸에 밴 느린 반응이었다. 마치 말의 무게를 혀 안에서 재보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백운비가 입을 열었다.
"그 몸으로 한빙주의 진기를 이 정도로 다루다니 대단하군."
백운비의 목소리가 동굴 벽에 부딪혀 공명했다. 설무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검자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가락 마디마디가 하얗게 질렸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가죽 칼집을 짓눌렀다.
"내공이 파괴된 혈맥을 얼음으로 이어 붙여 쓰다니 가히 광기다."
백운비가 한 걸음 다가왔다. 영체가 움직일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비명을 지르듯 뒤틀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네 공력은 이전의 경지를 아득히 넘어섰지."
설무한의 시선은 백운비의 발치를 향해 있었다. 그는 습관적으로 왼손가락으로 검자루를 톡톡 두드렸다. 규칙적인 박자는 과거 청운검문의 수련 구령과 정확히 일치했다. 본인은 의식하지 못한 채였다.
"설무한, 너는 청운검문의 수석제자로 썩기엔 아까운 재능이다."
백운비의 영체가 가늘게 떨렸다.
"위진악 같은 뱀들이 판치는 이 강호를 보아라. 정의는 사라졌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목 안쪽에서 비릿한 쇠 맛이 올라왔다.
"그래서 네놈이 정의를 바로잡겠다는 건가."
그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인간을 괴물로 만들면서 말이지."
백운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희생 없는 혁명은 없다. 나는 이 썩은 강호를 갈아엎을 것이다."
백운비가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에서 황금빛 검기가 가늘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의 후계자가 되어라. 나와 함께 천하를 통치하자꾸나."
설무한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거절한다."
거절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주변의 온도가 급격히 하강했다.
"그럴 줄 알았다. 협객의 자부심이란 참으로 피곤한 것이지."
백운비의 눈빛이 기이하게 번뜩였다.
"하지만 이것도 거절할 수 있을까."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와 속삭였다.
"네 부모와 누이가 정말로 그때 죽었다고 믿느냐."
설무한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부서진 혈맥 사이로 얼음 송곳이 박히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며 비틀거렸다. 호흡이 거칠어지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들은 살아있다. 정무맹의 지하 깊은 곳에서 너를 기다리고 있지."
백운비의 영체가 설무한의 귓가로 다가왔다.
"가족을 살리고 싶다면 네 안의 한빙주를 완전히 개화시켜라."
설무한의 사고가 일순간 멈췄다. 십 년 전 불타오르던 가옥과 피 냄새 진동하던 마당이 떠올랐다. 분명히 보았다. 차가운 시신이 되어 구르던 이들을 직접 묻어주었다.
"거짓말이다."
"믿고 안 믿고는 네 자유다. 하지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군."
백운비가 손가락을 튕겼다.
쿠구궁.
동굴 천장에서 거대한 바위가 떨어져 내렸다. 백골동 전체가 거대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지지대 역할을 하던 석주들이 힘없이 꺾여 나갔다. 먼지 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살아서 낙양으로 돌아오너라. 그때 진실을 마주하게 될 테니."
백운비의 영체가 먼지처럼 흩어졌다.
"기다려. 백운비."
설무한이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움켜잡은 것은 자욱한 흙먼지뿐이었다. 천장이 무너져 내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바닥이 갈라지며 지하의 검은 심연이 입을 벌렸다.
설무한은 본능적으로 몸을 날렸다. 무너지는 바위 사이를 종이 한 장 차이로 빠져나갔다. 한빙주의 진기가 폭발적으로 끓어올랐다. 전신의 모공에서 푸른 안개가 뿜어져 나왔다.
'가족이 살아있다고.'
이성이 마비될 정도의 혼란이 그를 덮쳤다. 위진악의 배신보다 더 큰 충격이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걸어온 복수의 길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발아래 지면이 솟구쳤다. 설무한은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낙하 지점을 가늠했다. 출구가 보였다. 무너지는 돌더미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강렬한 살기가 정면에서 쇄도했다.
"어딜 가느냐, 배신자 놈아."
익숙하면서도 증오스러운 목소리였다. 먼지 구름을 뚫고 한 노인이 나타났다. 청운검문의 대장로 위철심이었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검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손에는 검은 기운이 서린 장검이 들려 있었다.
위철심의 주변으로 검은 번개가 튀었다. 그것은 정통 청운검문의 무공이 아니었다. 마교의 기운보다 더 불길하고 끈적한 암습의 힘이었다.
"대장로. 당신까지 정무맹의 개가 된 건가."
설무한이 이를 악물며 검을 세웠다.
"입 닥쳐라. 네놈 때문에 문파가 이 꼴이 되었다."
위철심의 눈동자는 이미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는 광기 어린 웃음을 터뜨렸다.
"맹주님께서 약속하셨다. 너를 죽이면 문파를 천하제일로 만들어주겠다고."
위철심이 검을 허공에 그었다. 검은 폭풍이 설무한을 향해 몰아쳤다. 무너지는 동굴의 바위 파편들이 그 폭풍에 휘말려 날카로운 흉기가 되었다.
설무한은 한빙진기를 검신에 집중시켰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려는 찰나였다. 설무한은 위철심의 목 뒤에 박힌 작은 금속 조각을 발견했다.
백골동의 인간 병기들에게 심어져 있던 금제였다. 대장로 역시 이용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철심의 검초는 이미 설무한의 심장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설무한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한빙주의 모든 기운을 끌어올려 정면으로 맞섰다.
콰아앙.
동굴이 완전히 무너지며 모든 빛이 차단되었다. 어둠 속에서 오직 푸른빛과 검은빛만이 뒤엉켜 요동칠 뿐이었다.
설무한이 위철심의 검신을 타고 손을 뻗었다. 그의 가슴을 강하게 밀쳐냈다.
"비켜라, 노인네."
그의 신형이 무너진 바위 틈새를 뚫고 허공으로 솟구쳤다. 뒤편에서 위철심의 비명 같은 고함이 들려왔다. 설무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절벽 아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안개 정국이었다. 설무한은 추락하는 와중에도 한빙진기를 발 끝에 모았다. 공기를 딛고 도약하는 신법을 펼쳤다.
발아래에서 차가운 기운이 뭉쳐지며 디딤돌이 되었다. 그는 몇 번의 도약 끝에 절벽 중턱의 소나무 가지를 붙잡았다. 거친 숨이 폐부를 찔렀다.
전신의 혈맥이 비명을 질렀다. 한빙주로 이어붙인 경맥들이 요동치며 차가운 고통을 전했다. 설무한은 소나무 가지에 매달린 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등의 핏줄이 푸른색으로 도드라져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피부라기보다 잘 닦인 얼음 조각에 가까웠다.
"으윽."
신음이 샜다. 그는 소나무를 박차고 절벽 아래 평지로 내려앉았다. 주변은 온통 잡목과 안개뿐이었다.
그는 품 안에서 낡은 옥패 하나를 꺼냈다. 위진악이 배신하던 날 그의 소매에서 떨어뜨린 물건이었다. 옥패에는 청운검문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설무한은 옥패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옥패의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어 핏방울이 맺혔다.
"살아있다면."
그의 목소리가 안개 속으로 흩어졌다.
"반드시 찾아낸다."
그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겼다. 낙양으로 향하는 길목은 멀고도 험했다. 정무맹의 감시망이 강호 곳곳에 뻗쳐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한참을 걷던 설무한이 멈춰 섰다. 숲 저편에서 규칙적인 발소리가 들려왔다. 평범한 나그네의 것이 아니었다. 일정한 보간과 호흡을 유지하는 무인의 발소리였다.
설무한은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한빙진기를 억제하여 기척을 죽였다.
세 명의 무인이 안개를 헤치며 나타났다. 그들은 정무맹의 휘장이 새겨진 청색 경장을 입고 있었다.
"이 근방이라 보고받았다. 흔적을 놓치지 마라."
"예, 조장님."
무인들은 설무한이 숨어 있는 나무 근처까지 다가왔다. 설무한은 숨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무인들의 허리춤에 달린 전음구에 머물렀다.
저것을 이용하면 정무맹 내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설무한의 눈동자에 푸른 안개가 서렸다. 그는 검 손잡이를 쥔 채 상체를 낮췄다.
첫 번째 무인이 나무 옆을 지나는 순간이었다. 설무한의 신형이 그림자처럼 튀어 나갔다.
검집 채로 무인의 목덜미를 강타했다.
"커헉."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무인이 고꾸라졌다. 나머지 두 명의 무인이 당황하며 검을 뽑으려 했다.
설무한은 멈추지 않았다. 회전하며 두 번째 무인의 가슴을 발로 찼다.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무인이 뒤로 날아가 나무에 부딪혔다.
마지막 남은 무인이 겁에 질린 눈으로 설무한을 바라보았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품 안의 신호탄을 꺼내려 했다.
설무한의 검이 무인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신호탄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구냐. 감히 정무맹의 순찰대를."
설무한은 대답 대신 무인의 목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한기가 무인의 목줄기를 타고 전신으로 퍼졌다. 무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낙양 전장의 계좌가 동결되었다는 게 사실이냐."
설무한의 물음에 무인이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묻는 말에만 답해라."
손아귀에 힘이 실렸다. 무인이 헐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횡령범 설무한의 명의로 된 모든 자산은 이미 압류되었소."
설무한의 입가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사회적 말살이었다. 이제 그는 강호 어디에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밥 한 끼 사 먹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위진악은."
"위 소협은 이미 청운검문의 후계자로 공표되었소. 맹주님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
설무한은 무인의 목을 놓아주었다. 무인이 바닥에 쓰러져 기침을 내뱉었다.
설무한은 무인의 허리춤에서 전음구를 떼어냈다. 그리고 무인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가서 전해라."
그의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죽음이 돌아가고 있다고."
설무한은 그대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무인은 공포에 질린 채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숲을 벗어난 설무한은 작은 객잔 하나를 발견했다. 마을 외곽에 위치한 허름한 곳이었다. 그는 삿갓을 깊게 눌러쓰고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객잔 내부에는 몇 명의 무인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벽면에는 수배서 한 장이 붙어 있었다.
[청운검문의 배신자 설무한. 발견 즉시 신고할 것.]
수배서 속의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던 설무한은 구석진 자리에 앉았다. 점소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무엇을 드릴까요, 손님."
설무한은 대답 대신 품 안에서 은전 한 닢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술 한 병과 먹을 것을 좀 다오."
점소이가 은전을 챙겨 주방으로 향했다. 설무한은 탁자 위에 놓인 전음구를 만지작거렸다. 전음구에서는 정무맹 내부의 통신이 간헐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 제3구역 이상 무.
- 서쪽 절벽 하단 수색 중. 아직 생존 반응 없음.
설무한은 전음구의 채널을 돌렸다. 위진악의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그때 객잔 문이 거칠게 열렸다. 정무맹의 무복을 입은 대여섯 명의 무인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정무맹에서 나왔다. 모두 고개를 들어라."
무인들이 객잔 안의 손님들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설무한은 삿갓 아래로 눈을 가늘게 떴다.
무인들의 시선이 설무한의 자리에 멈췄다.
"너, 삿갓을 벗어봐라."
조장으로 보이는 사내가 설무한에게 다가왔다. 설무한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조용히 마시고 싶군."
"이놈이."
사내가 설무한의 삿갓을 걷어내려 손을 뻗었다. 설무한은 술잔의 술을 사내의 얼굴을 향해 뿌렸다.
"아악."
비명을 지르는 사내의 가슴을 설무한이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사내의 몸이 뒤로 날아가 탁자를 박살 냈다.
다른 무인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객잔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설무한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았다. 푸른 검기가 검신을 감싸 안았다.
"설무한이다. 설무한이 여기 있다."
무인 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밖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설무한은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검기가 무인의 발등을 스치며 바닥을 얼려버렸다.
"아무도 못 나간다."
설무한의 선언에 무인들이 주춤하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눈에는 죽었다고 믿었던 전임 수석제자의 무공이 보이고 있었다.
설무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무인들의 포위망이 좁혀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검 끝이 바닥을 긁으며 불꽃 대신 얼음 조각을 튀겼다.
그때 객잔 밖에서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누군가 강력한 기운을 내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설무한은 고개를 돌려 문밖을 응시했다. 안개를 뚫고 나타난 이는 위진악이었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러나 소매 속의 손가락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 결국 살아남으셨군요."
위진악이 객잔 안으로 들어서며 말했다. 그의 시선이 설무한의 검에 머물렀다.
"그 무공, 제가 가르쳐준 것과는 많이 다르군요."
설무한은 검을 고쳐 쥐었다.
"네가 가르쳐준 것은 배신뿐이었지."
위진악의 눈동자가 차갑게 식었다.
"그 배신 덕분에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겁니다."
그는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았다. 청운검문의 수장만이 가질 수 있는 명검 청운검이었다.
"오늘 여기서 청운검문의 마지막 흔적을 지우겠습니다."
위진악이 검을 휘둘렀다. 청운검법의 정수가 실린 검초가 설무한을 향해 쏟아졌다.
설무한은 한빙진기를 끌어올렸다.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히며 강렬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객잔의 벽면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설무한은 위진악의 검을 받아내며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네가 가진 그 검은 주인에게 어울리지 않는구나."
위진악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는 검을 회수하며 연환검초를 펼쳤다.
"입 닥치십시오. 결과가 모든 것을 증명할 테니까."
전투는 치열해졌다. 무너진 객잔 터 위에서 두 사람의 검영이 어지럽게 교차했다.
설무한은 한빙주의 냉기를 이용해 위진악의 움직임을 제약했다. 위진악의 발치가 얼어붙으며 속도가 무뎌졌다.
"이건."
위진악이 당황하며 뒤로 물러났다. 설무한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검 끝이 위진악의 가슴팍을 향해 쇄도했다. 위진악은 급히 검을 세워 막아냈으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그의 입가에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스승님."
위진악이 광기 어린 눈으로 설무한을 보았다.
"당신은 역시 제 손으로 죽여야겠습니다."
그가 품 안에서 검은 단약을 꺼내 입에 넣었다. 순식간에 그의 몸에서 불길한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설무한은 그 기운을 알고 있었다. 백골동에서 보았던 마공의 기운이었다.
위진악의 근육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며 눈동자가 핏빛으로 변했다.
"이것이 맹주님께서 주신 힘이다."
위진악이 대지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의 검에 검은 번개가 서렸다.
설무한은 단전 깊은 곳의 한빙주를 강제로 쥐어짜 냈다. 전신의 혈맥이 얼어붙는 고통이 밀려왔다.
검과 검이 다시 맞부딪혔다.
콰앙.
주변의 모든 나무가 꺾여 나갔다. 설무한의 검신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평범한 철검으로는 마공이 실린 명검을 견뎌낼 수 없었다.
설무한은 검이 부러지는 순간을 기다렸다.
검이 조각나며 바닥에 떨어졌다. 위진악의 검이 설무한의 어깨를 깊숙이 베었다.
"끝이다."
위진악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그 순간 설무한이 위진악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온 극저온의 냉기가 위진악의 혈맥을 타고 흘러 들어갔다.
"아아악."
위진악이 비명을 지르며 검을 떨어뜨렸다. 그의 팔은 순식간에 동상에 걸려 검게 변했다.
설무한은 부러진 검의 파편을 집어 들어 위진악의 목에 겨눴다.
"가족은 어디 있느냐."
위진악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살아있다고 믿는 겁니까. 정말로."
그의 웃음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맹주님은 당신을 이용하기 위해 그 거짓말을 던진 겁니다."
설무한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니, 살아있다."
그는 파편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위진악의 목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때 멀리서 수십 명의 무인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정무맹의 본대였다.
설무한은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위진악을 죽이고 포위당할 것인가, 아니면 훗날을 도모할 것인가.
그는 위진악의 가슴을 걷어차 멀리 날려버렸다.
"운이 좋구나, 진악아."
설무한은 청운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숲의 어둠 속으로 몸을 날렸다.
뒤편에서 위진악의 발악 섞인 고함이 들려왔지만 설무한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한빙주의 냉기가 파괴된 혈맥을 임시로 잇고 있었지만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전신의 감각이 무뎌지며 시야가 흐릿해졌다.
그는 숲 한복판에 쓰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늘에는 어느덧 차가운 달이 떠 있었다.
설무한은 청운검을 가슴에 품고 눈을 감았다.
"포기하지 마라."
어디선가 들려오는 환청 같은 목소리에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전음구를 꺼내 위진악의 채널을 맞췄다.
전음구 너머로 위진악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잡아라. 사지를 절단해서라도 내 앞에 끌고 와라."
설무한은 전음구의 송신 버튼을 눌렀다.
"진악아, 네가 가르쳐준 대로 하마."
그는 전음구를 으깨버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낙양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의 발자국마다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복수는 이제 시작이었다. 아니, 그것은 복수 이상의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설무한은 안개 너머를 응시했다.
그의 눈동자가 푸른 빛으로 번뜩였다.
낙양의 성문이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성문 앞에는 정무맹의 무인들이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었다.
설무한은 삿갓을 고쳐 썼다.
그는 품 안에서 옥패를 꺼내 성문을 향해 던졌다.
옥패가 성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그 소리에 무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설무한은 검을 뽑아 들고 성문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