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쁜 숨이 폐부를 찔렀다.
들이마시는 공기마다 타버린 잿가루와 매캐한 유황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설무한은 비틀거리며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는 여전히 폭뢰탄이 터지며 내뿜는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손끝은 기이할 정도로 차가웠다.
단전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온 한빙주의 냉기가 전신의 혈맥을 얼어붙게 만들고 있었다.
뜨거운 화마조차 범접하지 못한 극저온의 진기가 그의 생명을 억지로 붙들고 있었다.
설무한은 품 안의 낡은 상자를 더 세게 움켜쥐었다.
피 묻은 손가락 끝에 나무의 거친 질감이 닿았다.
이것이 청운검문의 추악한 진실을 밝힐 마지막 열쇠였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이 진흙탕을 밟았다.
질척이는 소리가 고요한 밤의 대기를 찢었다.
그는 소여진이 일러준 은신처, 낙양 외곽의 버려진 사당을 향해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눈앞이 가끔 흐릿해졌다.
한빙진기가 폭주할 때마다 시야가 푸른 빛으로 물들었다.
그는 혀를 깨물어 정신을 다잡았다.
비릿한 피맛이 입안에 퍼지자 희미해지던 감각이 잠시 돌아왔다.
멀리 어둠 속에서 사당의 퇴락한 지붕 실루엣이 보였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 입구를 가린 그곳은 죽음처럼 고요했다.
설무한은 사당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끼이익, 하는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는 벽을 짚으며 안쪽으로 깊숙이 걸어 들어갔다.
이제 이곳에서 소여진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었다.
상처를 추스르고, 서신을 확인한 뒤, 위진악의 목을 치러 갈 준비를 하면 끝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너무 고요했다.
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정적은 무인의 직감을 자극했다.
설무한은 멈춰 섰다.
바닥에 내려놓으려던 상자를 다시 고쳐 쥐었다.
어둠 속에서 미세한 금속음이 들려왔다.
칼날이 칼집을 스치는 아주 작은 마찰음이었다.
"나오너라."
설무한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대답 대신 사당의 사방에서 횃불이 동시에 타올랐다.
눈이 부셔 일순간 시야가 하얘졌다.
시력이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이 포위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흰색 무복을 입은 청운검문의 정예 제자들이 담벼락과 지붕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는 서늘한 기운을 내뿜는 장검이 들려 있었다.
포위망의 중심부로 한 여인이 걸어 나왔다.
소여진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횃불 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고 있었다.
설무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심장 부근이 차갑게 식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여진아,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소여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의 곁으로 위진악의 심복인 호법들이 다가와 섰다.
그녀는 설무한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떨구었다.
그녀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서 있는 위치는 명백히 적들의 진영이었다.
"설 사부님, 포기하십시오."
소여진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명확했다.
설무한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입가에서 흘러나온 선혈이 턱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믿음이라는 것이 이토록 가벼운 것이었나.
평생을 바쳐 지켜온 문파와 제자들이 자신을 버렸을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의 배신이 더 아프게 다가왔다.
"너마저 나를 팔아넘겼단 말이냐, 소여진."
설무한의 물음에 소여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지만 그녀는 뒤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청운검문의 제자들이 그를 향해 반 보씩 거리를 좁혀왔다.
검끝이 그를 겨누었다.
삼십여 자루의 검이 뿜어내는 검기가 사당 내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설무한은 품 안의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부러진 검자루를 꽉 쥐었다.
단전의 한빙진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혈맥이 터져나갈 듯한 고통이 몰려왔지만, 그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감정은 이미 얼어붙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사부님은 너무 무르십니다. 강호는 변했습니다."
위진악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그때였다.
하지만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당의 뒤편,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자들이 일제히 길을 터주며 허리를 숙였다.
그것은 위진악의 발소리가 아니었다.
더 깊고, 더 노련하며, 더 거대한 기세를 품은 발소리였다.
터벅, 터벅.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발소리가 바닥의 먼지를 일으켰다.
포위망 뒤쪽에서 나타난 인물은 거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무복 가슴팍에는 청운검문의 상징인 구름 문양이 금사로 새겨져 있었다.
그 문양을 달 수 있는 자는 문파 내에서도 단 한 명뿐이었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청운검문의 대장로이자, 위진악의 숙부인 위철심이었다.
그는 위진악이 권력을 잡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인물이었으며, 설무한과는 수십 년을 함께한 동료이기도 했다.
"무한, 오랜만이군."
위철심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손에는 묵직한 중검(重劍)이 들려 있었다.
위철심의 등 뒤로 소여진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녀의 눈에서 떨어진 눈물이 먼지 쌓인 바닥을 적셨다.
"자네가 살아 돌아올 줄은 몰랐네. 하지만 여기까지야."
위철심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검신이 횃불을 반사하며 기괴한 보랏빛 기운을 내뿜었다.
그것은 정파의 기운이 아니었다.
설무한은 그 기운의 정체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대장로…… 그 검기는 대체 무엇인가."
설무한의 물음에 위철심은 대답 대신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파아앙!
공기를 찢는 파열음과 함께 사당 천장의 들보가 단숨에 내려앉았다.
먼지구름이 일어나는 가운데 위철심이 성큼 다가왔다.
"자네가 알고 있던 청운검문은 이미 사라졌네. 이제 남은 건 힘뿐이지."
위철심의 눈이 붉게 번뜩였다.
그의 뒤에서 소여진이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사부님, 제발 도망치세요!"
하지만 이미 늦었다.
위철심의 중검이 설무한의 머리 위로 육중하게 쏟아져 내렸다.
설무한은 부러진 검을 들어 올렸다.
냉기와 보랏빛 기운이 허공에서 충돌하며 거대한 충격파를 만들어냈다.
사당 벽이 우지끈 소리를 내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설무한은 밀려오는 압력에 무릎이 꺾일 뻔했다.
단전의 한빙주가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는 물러나지 않았다.
위철심의 눈동자 너머로 소여진을 붙잡고 있는 또 다른 그림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청운검문의 제자들이 아니었다.
검은 복면을 쓴, 정체를 알 수 없는 괴인들이 소여진의 목에 칼을 겨누고 있었다.
"여진이를 놓아줘라."
설무한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위철심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검에 더 큰 힘을 실었다.
"자네 걱정이나 하게나. 오늘 이곳이 자네의 무덤이 될 테니."
위철심이 왼손을 뻗어 설무한의 가슴을 타격하려던 찰나였다.
사당 밖에서 또 다른 기척들이 느껴졌다.
단순한 무인들의 기척이 아니었다.
수십, 수백 명의 군마가 대지를 울리며 이쪽으로 몰려오고 있었다.
위철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누구냐? 누가 허락도 없이 이곳에 군을 보냈단 말이냐!"
위철심의 고함이 사당을 울렸다.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던 제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멀리서 펄럭이는 깃발이 보였다.
횃불 빛에 비친 그 깃발에는 청운검문의 문양이 아닌, 정무맹의 금색 사자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정무맹의 집행단이다!"
누군가의 외침과 함께 사당 정문이 박살 나며 거대한 철퇴가 날아들었다.
위철심은 급히 설무한을 밀쳐내고 중검을 휘둘러 철퇴를 쳐냈다.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불꽃이 튀었다.
먼지 자욱한 입구에서 황금색 갑주를 입은 사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는 위철심을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청운검문 대장로 위철심, 당신을 금지된 무공을 익힌 죄로 체포하러 왔다."
사내의 손에는 정무맹주가 직접 하사한 금패가 들려 있었다.
상황은 순식간에 반전되었다.
설무한을 죽이려던 포위망이 이제는 정무맹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하지만 설무한은 안도하지 않았다.
그는 정무맹의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서 사냥감을 발견한 맹수의 탐욕을 보았다.
"그리고 거기 있는 설무한. 자네도 같이 가줘야겠어."
사내의 철퇴가 설무한을 가리켰다.
설무한은 바닥에 떨어진 상자를 챙겨 들고 뒷걸음질 쳤다.
위철심과 정무맹, 그리고 배신한 소여진까지.
누구 하나 믿을 수 없는 아수라장이 눈앞에 펼쳐졌다.
"설마…… 이것까지 계산한 것이냐, 위진악."
설무한은 중얼거렸다.
위철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는 자신의 조카가 자신마저 정무맹에 팔아넘겼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소여진은 그 혼란을 틈타 포위망을 빠져나와 설무한의 곁으로 달려왔다.
"사부님, 제 손을 잡으세요! 비밀 지하 통로가 있어요!"
소여진의 손이 설무한의 소매를 붙잡았다.
설무한은 그녀의 눈을 보았다.
공포와 후회, 그리고 간절함이 뒤섞인 눈동자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이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지금은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었다.
"가자."
설무한과 소여진이 무너진 사당 뒷벽으로 몸을 날렸다.
위철심은 정무맹의 군사들과 뒤엉켜 난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피와 비명이 낭자한 사당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어두운 숲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한참을 달린 끝에 소여진이 멈춰 섰다.
그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설무한은 그녀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설명해라. 왜 대장로가 그곳에 있었지?"
소여진은 고개를 숙인 채 어깨를 들썩였다.
그녀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죄송해요…… 위진악이 제 가족을 인질로 잡고 있었어요.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설무한은 그녀의 목에 부러진 검을 갖다 댔다.
서늘한 검날이 그녀의 여린 피부에 닿았다.
"가족 때문이라면 나를 죽여도 된다는 뜻이냐?"
소여진은 눈을 감았다.
그녀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흐느낄 뿐이었다.
설무한은 검을 쥔 손을 떨었다.
그는 그녀를 벨 수 없었다.
그것이 그의 평생의 결함이자 한계였다.
그가 검을 거두려던 찰나, 소여진이 품 안에서 작은 종이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위진악이 대장로 몰래 정무맹과 주고받은 밀서예요. 이걸 정무맹주에게 전달하면 사부님의 누명을 벗을 수 있을 거예요."
설무한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밀서를 받아 들었다.
하지만 밀서를 펼쳐 본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곳에는 누명을 벗겨줄 증거가 아닌, 또 다른 충격적인 계획이 적혀 있었다.
"이게…… 사실이냐?"
설무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소여진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다시 위엄 있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포위망을 뚫고 나온 인물이 어둠을 헤치며 나타났다.
위진악이었다.
그는 피 묻은 손을 소매 안으로 감추며 설무한을 향해 미소 지었다.
"사부님, 아직도 그 아이를 믿으십니까?"
위진악의 뒤로 대장로 위철심의 머리가 바닥을 굴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