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만상단의 거대한 창고 단지는 밤이 되면 요새로 변한다.
높게 솟은 담벼락 위로 횃불의 일렁임이 규칙적으로 지나갔다.
보초들의 발소리는 무거웠다.
설무한은 어둠이 짙게 깔린 담장 아래 몸을 바짝 붙였다.
코끝을 스치는 공기가 차갑다.
단전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한빙주의 기운을 천천히 끌어올렸다.
차가운 기운이 혈맥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주변의 냉기와 동화된 몸은 더 이상 생명체의 열기를 내뿜지 않았다.
담장 너머에서 컹컹거리는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경비견들이 코를 킁킁거리며 주변을 훑었다.
설무한의 위치에서는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는 가볍게 지면을 차고 올랐다.
소리도 없었다.
담장 위를 스치듯 넘은 신형이 창고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기둥 뒤에 숨어 숨을 고르자 아래층 병사들의 잡담 소리가 들렸다.
"요즘 분위기가 흉흉해."
"청운검문 놈들이 왜 여기까지 기웃거리는지 원."
"입 조심해. 상단주 어르신도 그쪽 눈치를 보느라 정신없으시니까."
설무한은 그들의 대화를 뒤로하고 환기창을 찾아 몸을 밀어 넣었다.
내부는 어두웠다.
수만 가지 물품이 뿜어내는 비릿하고 매캐한 냄새가 폐부를 찔렀다.
소여진이 일러준 비밀 보관함의 위치를 떠올렸다.
위진악의 조작된 진실을 뒤집을 유일한 증거가 이곳 어딘가에 있었다.
서신 하나에 목숨을 건 셈이다.
적막한 창고 안을 가로지르던 설무한의 발걸음이 돌연 멈췄다.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목덜미에 닿는 공기의 흐름이 미세하게 뒤틀렸다.
설무한은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치익.
그가 서 있던 자리의 목재 기둥이 소리 없이 잘려 나갔다.
어둠 속에서 세 개의 그림자가 스르륵 배어 나왔다.
검은 복면 위로 드러난 눈동자들은 감정이 거세된 기계와 같았다.
그들은 서로 신호를 주고받지도 않았다.
그저 물 흐르듯 설무한의 사방을 포위하며 좁혀올 뿐이었다.
청운검문의 암살조인 그림자 부대였다.
설무한의 입술이 가볍게 떨렸다.
직접 길러냈던 병기들이다.
오직 문주의 명령에만 복종하도록 설계된 아이들이었다.
"진악이가 보낸 개들이라면, 주인을 닮아 짖는 법이 없구나."
설무한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깔렸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세 줄기 검광이 동시에 심장과 목을 노리고 쇄도했다.
설무한은 검을 뽑지 않았다.
지금의 그에게는 검이 없었다.
빈손을 허공에 휘저으며 한빙진기를 손바닥에 응축했다.
챙.
강철과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손끝에 닿은 암살자의 검날이 하얗게 얼어붙으며 튕겨 나갔다.
좁은 통로 사이로 불꽃이 튀었다.
암살자들의 움직임은 집요했다.
한 명이 막히면 다른 두 명이 빈틈을 파고들었다.
설무한은 보지 않고도 그들의 위치를 읽어냈다.
공기의 파동과 바닥의 진동을 느꼈다.
살의의 무게가 등을 눌렀다.
뒤에서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검신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오른발을 뒤로 뻗어 상대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우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들렸다.
암살자는 비명조차 지르지 않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섬뜩한 침묵이 창고를 지배했다.
설무한은 단전의 냉기를 더욱 거칠게 개방했다.
파괴된 혈맥이 비명을 질렀다.
차가운 통증이 전신을 난도질했다.
그 고통만큼 손바닥에 맺힌 진기는 더욱 치명적으로 변해갔다.
"물러서지 않겠다면 죽여주마."
설무한이 바닥을 박차고 나갔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암살자가 검을 가로막았다.
설무한의 정권이 암살자의 검신을 그대로 통과해 복부에 박혔다.
퍼억.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암살자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옷자락부터 시작해 피부와 근육이 순식간에 하얀 서리로 뒤덮였다.
콰앙.
창고 벽면에 부딪힌 암살자의 몸은 인간의 형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는 바닥으로 추락하며 유리 조각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얼음 파편이 어둠 속에서 차갑게 빛났다.
남은 두 명의 암살자가 멈칫했다.
그들의 눈에 생소한 감정이 스쳤다.
공포였다.
자신들이 알던 사부의 무공이 아니었다.
청운의 검법은 본래 정대광명하며 부드러운 법이다.
눈앞의 남자가 휘두르는 힘은 지옥의 밑바닥에서 길어 올린 냉기였다.
설무한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남은 둘을 응시했다.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것은 피가 아니었다.
얼어붙은 진기의 잔해였다.
암살자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도망칠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들의 눈빛은 단호하게 변했다.
임무 실패는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동시에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설무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손에 들린 것은 검이 아니었다.
검은 금속으로 뒤덮인 둥근 구체였다.
낙양 전장에서 특수 제작된 폭뢰탄이었다.
하나만 터져도 거대한 창고 절반을 날려버릴 위력이었다.
암살자들은 폭뢰탄의 심지를 동시에 당겼다.
치이익.
어둠 속에서 타들어 가는 불꽃이 기괴한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설무한을 향해 몸을 던졌다.
자신들의 목숨을 제물로 삼아 대상을 확실히 제거하려는 동귀어진의 수였다.
설무한은 뒤쪽의 벽을 등지고 있었다.
피할 곳은 없었다.
심지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크게 들려왔다.
암살자들의 일그러진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설무한은 두 팔을 교차하며 단전의 모든 기운을 밖으로 쏟아냈다.
폭발의 섬광이 창고 안을 하얗게 집어삼켰다.
고막이 터져나갈 듯한 굉음이 고요한 밤의 공기를 찢어발겼다.
단단했던 목재 선반들이 종잇장처럼 구겨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설무한은 밀려오는 충격파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전개했던 한빙진기의 방어막이 유리창처럼 금이 가며 깨져 나갔다.
등 뒤의 벽이 무너지며 거대한 먼지 구름이 일었다.
폐부 깊숙이 뜨거운 열기와 먼지가 밀려들어 왔다.
목 안쪽이 타 들어가는 감각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시야가 붉게 물들었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선혈이 눈가를 적셨다.
부서진 목재 더미 사이에서 설무한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왼쪽 어깨가 무겁게 처졌다.
감각이 없었다.
폭발의 여파로 으스러진 모양이었다.
그는 떨리는 오른손으로 주변을 짚었다.
암살자들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바닥에는 검게 그을린 자국과 부서진 얼음 조각만이 뒹굴었다.
폭뢰탄 두 발의 위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창고의 지붕 절반이 날아가 밤하늘이 훤히 보였다.
멀리서 경비병들의 다급한 외침과 징 소리가 들려왔다.
"폭발이다!"
"창고 쪽으로 집결하라!"
시간이 없었다.
설무한은 입안에 고인 핏물을 뱉어냈다.
비밀 보관함이 있던 자리는 다행히 폭발의 중심에서 비껴나 있었다.
그는 무너진 선반 아래를 파헤쳤다.
손톱이 깨지고 손가락 끝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통증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마침내 손끝에 매끄러운 금속의 감촉이 닿았다.
작은 은제 상자였다.
설무한은 상자를 품에 갈무리하고 무너진 벽면의 틈새로 몸을 날렸다.
낙양의 밤거리는 혼란에 빠져 있었다.
금만상단의 정문에서는 기마병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는 골목의 어둠을 틈타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숨을 쉴 때마다 갈비뼈 부근이 찌르는 듯 아팠다.
내상이 깊었다.
한빙주의 냉기가 파괴된 혈맥을 임시로 잇고 있었지만 오래 버티기 힘들었다.
그는 약속 장소인 낙양 외곽의 낡은 사당으로 향했다.
사당 안에는 희미한 등불 하나가 켜져 있었다.
소여진이 초조한 기색으로 서성이고 있었다.
피 칠갑이 된 설무한이 들어서자 그녀가 비명을 삼키며 다가왔다.
"어르신! 몸이 이게 무슨……."
"가져왔다."
설무한은 짧게 답하며 품에서 은제 상자를 꺼내 놓았다.
그의 손등은 이미 검게 타거나 얼어붙어 엉망이었다.
소여진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누렇게 변색된 서신 몇 장과 청운검문의 인장이 찍힌 명부가 들어 있었다.
서신을 읽어 내려가던 소여진의 눈이 커졌다.
"이럴 수가. 위진악이 상단과 결탁해 군량미를 빼돌린 기록이에요."
"그것뿐인가."
"아니요. 십 년 전 어르신을 모함했던 자들의 이름이 여기 다 적혀 있어요."
설무한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탁자에 손가락을 올렸다.
의식하지 못한 채 일정한 박자로 탁자를 두드렸다.
청운검문의 수련 구령이었다.
십 년의 세월을 건너온 진실이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기쁨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가슴 밑바닥에서 묵직한 돌덩이가 가라앉는 기분이 들었다.
"어르신, 일단 치료부터 하셔야 해요. 맥이 너무 불안정합니다."
소여진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설무한은 대답 대신 시선을 돌려 사당 밖을 보았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횃불이 사당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지면을 울렸다.
생각보다 빨랐다.
금만상단의 경비병들만이 아니었다.
횃불 사이로 보이는 푸른 도포.
청운검문의 정예 제자들이었다.
"누가 밀고했군."
설무한의 목소리는 무미건조했다.
그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부러진 어깨에서 전해오는 통증이 정신을 맑게 깨웠다.
소여진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서신을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뒷걸음질 쳤다.
사당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차가운 밤바람과 함께 한 남자가 걸어 들어왔다.
푸른 도포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내.
허리에는 청운검문의 문주만이 찰 수 있는 옥패가 빛나고 있었다.
위진악이었다.
그는 평소처럼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소매 안으로 감춘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설무한은 놓치지 않았다.
"스승님, 기어이 지옥에서 돌아오셨군요."
위진악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마치 오랜만에 만난 혈육을 반기는 듯한 어조였다.
그는 사당 내부를 천천히 훑더니 소여진이 들고 있는 서신에 시선을 멈췄다.
"그 종이 쪼가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으십니까?"
"진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설무한이 한 발을 내디뎠다.
바닥에 닿은 그의 발 주변으로 하얀 서리가 피어올랐다.
위진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천천히 검 손잡이를 쥐었다.
"스승님은 항상 그러셨죠. 도리가 힘보다 우선이라고."
"그것이 내가 너에게 가르친 첫 번째 검식이다."
"그래서 제가 스승님을 이긴 겁니다. 저는 힘이 곧 도리라는 것을 깨달았거든요."
위진악이 검을 뽑았다.
청류검(靑流劍).
설무한이 수석제자가 된 기념으로 그에게 직접 하사했던 명검이었다.
검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맑은 기운이 사당 안을 가득 채웠다.
위진악은 검을 비스듬히 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청운검법의 기본 중의 기본, 평사낙안(平沙落雁)의 초식이었다.
"이 검식을 기억하십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던 초식이었죠."
"너는 그 초식의 끝을 완성하지 못했지."
"오늘 완성해 보이겠습니다. 스승님의 목을 베어서 말입니다."
위진악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동시에 수십 줄기의 검기가 설무한의 전신을 옭아매듯 쏟아졌다.
설무한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단전에 남은 마지막 한빙진기를 끌어올려 오른손에 집중했다.
검기와 진기가 충돌하며 사당 전체가 흔들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부딪혔다.
위진악은 자신의 검을 막아선 설무한의 손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손등에는 이미 검은 반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과도한 진기 운용으로 혈맥이 타 들어가기 시작한 전조였다.
"무모하시군요. 그 몸으로 저를 막으려 하시다니."
"막는 것이 아니다."
설무한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는 자신의 가슴을 파고드는 위진악의 검날을 무시한 채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손가락이 닿은 곳부터 위진악의 도포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너와 함께 죽으려는 것이다."
설무한의 눈동자가 푸른 빛으로 번뜩였다.
그의 단전에서 한빙주의 핵이 요동치며 폭주하기 시작했다.
사당 내부의 온도가 순식간에 영하로 떨어졌다.
위진악의 안색이 처음으로 공포에 질려 일그러졌다.
그는 검을 뽑으려 했으나, 설무한의 손아귀는 강철처럼 단단하게 그의 어깨를 결착하고 있었다.
"이거 놓으십시오! 미치셨습니까!"
"지옥은 혼자 가기 외로운 곳이지."
설무한의 전신에서 눈부신 청백색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무인의 생명력인 본명진기까지 끌어다 쓰는 최후의 수단이었다.
사당 밖에서 대기하던 제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러났다.
건물 전체가 거대한 얼음 덩어리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 순간 위진악이 품속에서 작은 호루라기를 꺼내 불었다.
날카로운 음파가 사당 안을 울렸다.
설무한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듯 경직되었다.
그의 심장 근처에 심어져 있던 금제(禁制)가 반응한 것이었다.
위진악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설무한의 가슴을 발로 차며 뒤로 물러났다.
"스승님, 제가 아무런 준비도 없이 왔을 것 같습니까?"
위진악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자신의 어깨를 살폈다.
살점이 얼어붙어 감각이 죽어 있었다.
그는 증오 섞인 눈으로 설무한을 노려보며 손을 들어 올렸다.
사당 주위를 포위하고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을 겨눴다.
화살촉에는 붉은빛을 띠는 폭렬약이 발라져 있었다.
"전부 쏴라! 한 조각의 고기도 남기지 마라!"
위진악의 외침과 함께 수백 발의 화살이 밤하늘을 수놓았다.
설무한은 무너져 내리는 시야 속에서 소여진을 보았다.
그녀는 이미 사당 뒷문으로 몸을 피한 뒤였다.
그는 안도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화살의 비가 빗소리처럼 들려왔다.
콰콰콰쾅!
화살들이 지면에 닿는 순간 연쇄 폭발이 일어났다.
낡은 사당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거대한 화염이 밤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위진악은 불길을 바라보며 소매 안의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자신의 승리였다.
하지만 왜인지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불길이 잦아들 무렵 위진악은 잿더미를 뒤지라고 명령했다.
제자들이 조심스럽게 폐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이 발견한 것은 타버린 목재 조각뿐이었다.
설무한의 시신도, 소여진이 들고 있던 서신도 보이지 않았다.
"찾아라! 멀리 못 갔을 것이다!"
위진악의 비명이 정적을 깨뜨렸다.
그때 폐허 한가운데에서 차가운 안개가 피어올랐다.
불길조차 끄지 못한 기괴한 냉기였다.
안개 속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일정하고도 무거운 발소리였다.
위진악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잿더미 너머 어둠 속에서 푸른 빛을 내뿜는 두 눈동자가 서서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