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의 명예가 살아 있는 자의 권력보다 무거울 성싶으냐."
대장로 위철심의 목소리가 사당의 낮은 천장을 울렸다.
그의 발치에는 조금 전 위진악이 던져놓은 수급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분명 위진악의 손에 죽었어야 할 대장로가 멀쩡히 서 있었다.
바닥에 굴러온 머리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짜였다.
설무한은 부러진 갈비뼈의 통증을 참으며 자세를 낮췄다.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한기에 가슴팍이 따끔거렸다.
품 안의 서신을 움켜쥔 손가락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것은 단순한 종이 뭉치가 아니었다.
청운검문의 뿌리를 뒤흔들 추악한 거래의 증거였다.
대장로의 육중한 기세가 어깨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주변의 공기가 진득하게 가라앉으며 숨통을 조였다.
사당 내부의 낡은 목재들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렸다.
먼지가 자욱하게 일어 시야를 뿌옇게 흐트러뜨렸다.
"그 서신을 넘겨라. 그러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위철심이 거대한 손바닥을 천천히 내밀었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기가 바닥을 깎아냈다.
설무한은 입가에 고인 핏물을 바닥에 뱉어냈다.
입안에서 비릿한 쇠 맛이 강하게 맴돌았다.
"살아서 치욕을 견디느니, 죽어서 진실을 남기겠다."
설무한의 대답에 위철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한 걸음을 내디뎠다.
발동작 한 번에 사당의 바닥 타일이 박살 나며 튀어 올랐다.
강한 충격파가 설무한의 전신을 때리고 지나갔다.
"진실? 강호에서 진실은 승자의 붓끝에서 태어나는 법이다."
위철심의 정권이 허공을 갈랐다.
쿠우웅.
폭발적인 기운이 설무한의 안면을 향해 쇄도했다.
설무한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어 공격을 흘려보냈다.
등 뒤에 있던 거대한 불상이 맥없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설무한은 단전 깊은 곳의 한빙진기를 끌어올렸다.
파괴된 혈맥이 비명을 지르며 뒤틀리는 고통이 밀려왔다.
차가운 기운이 전신을 휘감으며 감각을 마비시켰다.
눈동자가 점차 푸른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네놈의 그 불길한 힘도 여기까지다."
위철심이 양손을 합장하듯 모았다가 좌우로 펼쳤다.
무거운 중압감이 사방에서 설무한을 압박했다.
공기조차 흐름을 멈춘 듯한 지독한 정적이었다.
설무한은 검 손잡이를 쥔 손등의 핏줄이 터질 듯 솟아올랐다.
두 사람의 공력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콰과광.
고막을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사당의 지붕이 날아갔다.
부서진 기와 조각들이 유성우처럼 사방으로 흩날렸다.
은신처를 감싸고 있던 어둠이 순식간에 걷혔다.
설무한의 신형이 뒤로 십여 보 밀려났다.
발이 닿는 곳마다 땅이 얼어붙으며 하얀 서리가 맺혔다.
위철심 역시 소매 끝이 검게 타들어가며 주춤거렸다.
그의 눈에 당혹감과 살기가 동시에 교차했다.
"이것이 사부님이 남기신 힘인가."
위철심이 침을 뱉으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곰의 형상을 한 기운이 일렁였다.
청운검문의 금기된 무공인 대력항마공이었다.
정파의 무공이라기엔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잔혹한 기운이었다.
설무한은 서신이 든 상자를 품에서 꺼내 바닥에 놓았다.
양손으로 검을 고쳐 잡으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심장 부근의 금제가 요동치며 가슴을 찔러댔다.
차가운 땀방울이 턱 끝을 타고 흘러내렸다.
"증거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니, 어리석구나."
위철심이 비웃으며 땅을 박차고 튀어 올랐다.
그의 신형이 거대한 바위처럼 설무한을 덮쳐왔다.
설무한은 검 끝에 한빙의 정수를 모아 일직선으로 내뻗었다.
푸른색 검기가 반원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다.
치열한 공방이 이어지며 주변 지형이 초토화되었다.
나무들이 뿌리째 뽑혀 나가고 바위가 가루가 되었다.
설무한은 연이은 타격에 내장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입술을 짓씹으며 몰려오는 어둠을 밀어냈다.
"이제 끝내주마."
위철심이 전력을 다해 정권을 내질렀다.
황금빛 광휘가 사방을 뒤덮으며 설무한을 삼키려 했다.
설무한은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검을 내리쳤다.
두 기운이 맞물리는 지점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파아앙.
공간이 비틀리는 듯한 충격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그 반동으로 바닥에 놓여 있던 상자가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나무 상자가 회전하며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
설무한과 위철심의 시선이 동시에 상자로 향했다.
둘 다 균형을 잃고 비틀거리던 찰나였다.
머리 위쪽, 부서진 지붕 너머에서 보이지 않는 그림자가 낙하했다.
바람 한 점 일지 않는 기괴한 신법이었다.
그림자는 허공에서 가볍게 몸을 뒤틀며 상자를 낚아챘다.
설무한이 손을 뻗었으나 손끝에는 서늘한 공기만 걸렸다.
"누구냐."
위철심이 사자후를 내지르며 땅을 굴렀다.
하지만 그림자는 이미 담벼락 위로 몸을 날린 뒤였다.
검은 복면 위로 드러난 서늘한 눈동자가 설무한과 마주쳤다.
그것은 청운검문의 사람도, 정무맹의 사람도 아니었다.
그림자는 대답 대신 가벼운 비웃음을 남겼다.
그는 순식간에 숲의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설무한은 비틀거리며 그 뒤를 쫓으려 발을 뗐다.
그러나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에 무릎이 꺾이며 바닥을 짚었다.
멀리서 수십 명의 발소리가 이곳을 향해 좁혀오고 있었다.
상자를 훔쳐간 자의 정체도 알지 못한 채 포위망이 완성되었다.
위철심이 살기를 띠며 설무한의 목줄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톱이 설무한의 목 가죽을 파고들기 직전이었다.
숲의 정적을 깨뜨리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공기를 갈랐다.
쉬익.
은빛 섬광이 위철심의 미간을 향해 수평으로 날아들었다.
위철심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젖히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박힌 것은 청운검문의 정식 제자만이 소지하는 투검이었다.
"거기까지 하시죠, 대장로님."
익숙한 목소리에 설무한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포위망을 뚫고 나타난 이는 위진악이었다.
그의 옷자락은 피로 얼룩져 있었으나 눈빛만은 형형했다.
위진악은 스승인 설무한을 보지 않은 채 대장로를 응시했다.
"진악아, 네놈이 감히 나를 가로막는 것이냐."
위철심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자신의 조카이자 후계자인 위진악의 배신을 믿지 못했다.
위진악은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닥의 투검을 회수했다.
그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스승님의 목숨은 제가 거두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위진악의 말에 설무한의 심장이 차갑게 식어 내렸다.
구원이 아니라, 사냥감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포식자의 외침이었다.
설무한은 비틀거리며 검을 짚고 일어섰다.
입안에 고인 핏물을 삼키자 위장이 타들어 가는 통증이 일었다.
"네 놈들이... 감히 사부님을."
설무한의 목소리는 갈라진 쇳소리처럼 낮게 깔렸다.
그는 위진악의 눈에서 읽히는 기묘한 갈등을 포착했다.
그것은 연민도, 죄책감도 아닌 뒤틀린 소유욕이었다.
위진악은 스승이 가르쳐준 검의 자세를 정확히 취했다.
"사부님, 마지막은 제 손에 죽으셔야 합니다."
위진악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설무한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며 불꽃이 튀었다.
설무한은 깨달았다.
위진악의 검 끝이 심장을 비껴가 옆구리를 스치고 있었다.
그는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숨기려 하고 있었다.
"무슨 수작이냐."
설무한이 낮게 읊조리며 위진악의 어깨를 밀쳐냈다.
위진악은 뒤로 밀려나는 척하며 설무한의 귓가에 속삭였다.
목소리는 바람 소리에 묻힐 만큼 작고 절박했다.
"낙양의 금만상단으로 가십시오. 거기서 소여진을 찾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위진악의 검기가 설무한의 어깨를 깊게 베었다.
선혈이 분수처럼 솟구치며 설무한의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설무한은 그 충격으로 뒤편의 낭떠러지 아래로 밀려났다.
추락하는 순간, 위진악의 일그러진 얼굴이 달빛 아래 드러났다.
공중에 뜬 채로 설무한의 몸이 뒤집혔다.
차가운 바람이 고막을 때리며 감각을 마비시켰다.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던 검은 그림자가 다시 나타났다.
그는 절벽 중간에서 설무한의 옷덜미를 낚아채 숲속으로 던졌다.
바닥을 구르는 설무한의 시야에 낡은 비단 신발이 들어왔다.
상자를 훔쳐갔던 복면인이 그의 앞에 내려앉았다.
그는 복면을 천천히 벗어 내렸다.
설무한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떠졌다.
"오랜만이네요, 사부님."
죽은 줄 알았던 막내 제자, 소여진이 웃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방금 훔친 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설무한의 손이 그녀의 옷자락을 잡으려 허공을 휘저었다.
소여진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상자를 등 뒤로 감췄다.
"이건 제가 잘 쓸게요. 진악 사형에겐 비밀로 해주세요."
소여진의 발 끝이 설무한의 가슴팍을 부드럽게 밀어냈다.
설무한의 몸은 다시 한번 숲 아래의 급류 속으로 미끄러졌다.
차가운 강물이 온몸을 집어삼키며 의식을 앗아갔다.
수면 위로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상자를 품에 안고 사라지는 소여진의 뒷모습이었다.
물살은 거셌고, 얼어붙은 몸은 나무토막처럼 무거웠다.
설무한은 가라앉으며 단전의 마지막 진기를 쥐어짜냈다.
손가락 끝이 강바닥의 날카로운 바위를 긁으며 찢어졌다.
그때, 물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그의 팔목을 강하게 낚아챘다.
설무한이 필사적으로 눈을 떴다.
물거품 사이로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은 위진악도, 소여진도 아니었다.
그것은 청운검문에서 파문당했던 또 다른 제자의 문장이었다.
의식이 끊기기 직전, 설무한의 귓가에 낯선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드디어 찾았군, 늙은 여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