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구멍을 타고 비릿한 열기가 치밀었다.
입술 사이로 터진 선혈이 턱 끝을 적셨다.
밤바람은 칼날이 되어 폐부를 깊숙이 찔렀다.
지붕 위를 달리는 발소리가 기와를 짓이겼다.
저만치 앞서가는 검은 그림자가 멀어졌다.
무한은 비틀거리는 다리에 억지로 힘을 주었다.
단전 깊은 곳에 박힌 한빙주가 진동했다.
차가운 기운이 부서진 혈맥을 임시로 이었다.
살을 찢는 냉기가 전신을 무참히 난도질했다.
그는 결코 멈출 수 없었다.
상자 안의 서신은 그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청운검문 수석제자로 살아온 세월의 증명이었다.
거기 서라, 이 파렴치한 배신자 놈아.
대장로 위철심의 노호성이 등 뒤를 때렸다.
수십 명의 제자가 횃불을 들고 뒤를 쫓았다.
낙양의 밤하늘이 붉은 불빛으로 일렁였다.
무한의 시야가 갈수록 흐릿하게 번져갔다.
눈꺼풀이 무거웠고 사지는 진흙처럼 가라앉았다.
그럼에도 그는 손가락을 굽혀 허공을 긁었다.
그림자의 옷자락이라도 잡겠다는 갈망이었다.
괴인이 돌연 방향을 꺾어 골목으로 스며들었다.
무한은 망설임 없이 지붕 아래로 몸을 던졌다.
착지하는 순간 무릎이 꺾이며 바닥을 굴렀다.
거친 흙먼지가 입안으로 들어와 서걱거렸다.
그는 손바닥으로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골목 끝은 거대한 돌벽으로 막힌 막다른 길이었다.
검은 옷을 입은 괴인이 벽 앞에 멈춰 있었다.
괴인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무한은 부러진 검자루를 쥐려 애썼다.
서신을 내놓아라.
갈라진 목소리가 축축한 공기 속에 흩어졌다.
괴인이 천천히 몸을 돌려 무한을 보았다.
가려진 복면 위로 드러난 눈동자가 서늘했다.
그 눈빛은 무한에게 너무나 익숙한 질감이었다.
위진악의 심복인 흑영의 안광이 분명했다.
심장 부근이 얼음송곳에 찔린 듯 시려왔다.
모든 것이 그놈의 손바닥 위임을 깨달았다.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와 발끝을 적셨다.
괴인이 품 안에서 목함 하나를 꺼냈다.
무한은 검자루를 쥐려 했으나 손이 굳었다.
한빙주의 냉기가 손끝부터 마비시키고 있었다.
괴인이 갑자기 무릎을 굽혀 상자를 놓았다.
그는 무한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기괴한 예우였다.
주인님은 스승님이 진실을 보길 원하십니다.
괴인의 목소리는 기계처럼 무미건조했다.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연막탄을 내던졌다.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좁은 골목을 채웠다.
무한은 콜록거리며 연기 속으로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나무 상자가 닿았다.
연기가 걷혔을 때 괴인의 자취는 사라졌다.
골목 어귀에서 제자들의 함성이 가까워졌다.
무한은 상자를 품에 안고 벽을 기어올랐다.
온몸의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간신히 지붕 너머로 몸을 숨기고 숨을 몰아쉬었다.
품 안의 목함이 얼음처럼 가슴을 눌렀다.
이것만 있으면 모든 것을 되돌릴 수 있었다.
자신을 횡령범으로 만든 위진악의 거짓을.
무한은 떨리는 손으로 목함의 걸쇠를 풀었다.
끼익 하는 마찰음이 정적을 잔혹하게 깼다.
상자 안에는 낡은 종이 뭉치가 놓여 있었다.
무한은 서둘러 서신 한 장을 펼쳤다.
희미한 달빛 아래 글귀를 읽던 눈이 커졌다.
종이 위에 적힌 것은 비리 폭로가 아니었다.
그것은 무한 자신의 필체로 적힌 장부였다.
문파의 자금을 빼돌렸다는 상세한 기록들.
종이 끝에는 무한의 인장까지 선명했다.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튀어 오르며 경련했다.
이것은 증거가 아니라 정교한 함정이었다.
위진악은 이 문서를 무한에게 줄 생각이었다.
직접 죄를 증명하는 서류를 들게 하려 함이었다.
낙양 성벽 너머에서 거대한 종소리가 울렸다.
청운검문의 비상 소집을 알리는 신호였다.
종소리는 밤의 고요를 찢으며 도시로 퍼졌다.
멀리서 누군가 목청을 높여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횡령범 설무한이 증거물을 들고 도주 중이다.
발아래 지붕이 제자들의 발길질에 진동했다.
그는 위조 문서를 쥔 채 어둠을 응시했다.
청운검문 본산에서 쏜 신호탄이 하늘을 태웠다.
발밑에서 횃불 무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무한은 비틀거리며 지붕 끝에서 검을 뽑았다.
검신이 반토막 난 자리에 달빛이 고였다.
부러진 단면은 마치 그의 처지와 닮아 있었다.
무한은 가슴을 짓누르는 목함을 고쳐 잡았다.
속았다기보다 도려내진 기분이 먼저 들었다.
십 년을 자식처럼 키워온 제자의 안목이었다.
위진악은 무한의 고지식함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가 이 가짜 서류를 끝까지 지키리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비참할 정도로 적중했다.
지붕 아래로 장대형을 든 제자들이 포위망을 좁혔다.
길목마다 청운검문의 푸른 도포가 넘실거렸다.
무한은 입안에 고인 핏물을 바닥에 뱉었다.
한빙주의 냉기가 이제 명치까지 올라왔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포가 얼어붙는 듯했다.
그는 상자 안의 가짜 장부를 품 깊숙이 넣었다.
이것이 위진악이 파놓은 무덤이라면 기꺼이 들어가리라.
대신 그 무덤의 주인은 자신이 아닐 것이다.
무한은 지붕 위를 박차고 옆 건물로 도약했다.
등 뒤로 수십 발의 시전이 날아와 기와에 박혔다.
투각 하는 소리가 고막을 찢을 듯 날카로웠다.
왼쪽 어깨에 화끈거리는 통증이 스쳐 지나갔다.
옷자락이 찢어지며 검붉은 선이 허공에 그어졌다.
무한은 멈추지 않고 낙양 외곽의 전장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위진악이 관리하던 비밀 계좌가 있었다.
가짜 장부와 실제 금전 흐름을 대조해야 했다.
하지만 전장 입구에는 이미 금제선이 쳐져 있었다.
낙양 관아의 포졸들까지 가세한 형국이었다.
무한은 골목 어귀의 수레 뒤로 몸을 숨겼다.
심장 박동이 귀밑까지 올라와 쿵쿵거렸다.
그때 옆 골목에서 익숙한 향취가 풍겼다.
매화 향이 섞인 서늘하고 맑은 여인의 향기였다.
무한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어둠을 보았다.
소여진이 검을 쥔 채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는 청운검문의 유일한 여장로이자 그의 친우였다.
여진의 눈동자에는 형언하기 힘든 수치가 서렸다.
무한은 입술을 달싹였으나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배신자에게 건넬 변명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여진이 천천히 검을 뽑아 검끝을 겨누었다.
정말로 네가 그런 짓을 저질렀단 말이냐.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지만 검 끝은 고요했다.
무한은 품 안의 목함을 꽉 움켜쥐었다.
대답하지 않는 것은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바닥을 차고 섬전처럼 달려들었다.
청운검법의 정수인 유운검식이 허공을 갈랐다.
무한은 부러진 검을 들어 간신히 초식을 막았다.
챙그랑 하는 금속음이 골목 안을 가득 메웠다.
손목을 타고 전해지는 충격이 단전을 흔들었다.
여진의 검초는 매서웠으나 어딘가 흐트러져 있었다.
그녀 또한 눈앞의 진실을 믿고 싶지 않은 듯했다.
무한은 그녀의 검을 흘려내며 뒤로 물러났다.
여진, 내 말을 들어다오.
시끄럽다, 이 추악한 도둑놈아.
여진의 검이 다시금 그의 목덜미를 노렸다.
무한은 검자루로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쳤다.
근육이 일시적으로 마비된 여진의 검이 흔들렸다.
그 틈을 타 무한은 전장의 담벼락을 넘었다.
담 너머는 적막이 감도는 전장의 뒷마당이었다.
금만상단이 운영하는 이곳은 철통같은 보안을 자랑했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장부 보관실의 위치를 찾았다.
위진악이 취중에 단 한 번 흘렸던 은밀한 장소였다.
복도를 달리는 무한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보관실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안쪽에서 은은한 등불 빛이 새어 나왔다.
무한은 숨을 죽이고 방 안으로 시선을 던졌다.
책상 앞에 앉아 장부를 넘기는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다름 아닌 위진악이었다.
진악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늦으셨습니다, 스승님.
그의 목소리에는 승리자의 여유가 가득했다.
무한은 부러진 검을 쥐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진악이 천천히 몸을 돌려 무한과 마주 보았다.
그의 손에는 이미 반쯤 타버린 진짜 장부가 들려 있었다.
진악은 타오르는 종이를 보며 잔인하게 웃었다.
이제 이 세상에 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스승님이 들고 계신 그 가짜가 유일한 사실이지요.
무한은 단전의 기운을 쥐어짜 검을 치켜들었다.
한빙주의 냉기가 폭주하며 그의 팔을 파랗게 얼렸다.
진악의 눈에 아주 짧은 순간 동요가 스쳤다.
그는 즉시 소매 안으로 떨리는 손을 감추었다.
무한은 대답 대신 신형을 날려 검을 내질렀다.
부러진 검 끝에서 푸른 검기가 서늘하게 뿜어졌다.
진악은 책상을 걷어차며 뒤로 물러나 검을 뽑았다.
두 사람의 검이 허공에서 맞물려 불꽃을 튀겼다.
진악의 검법은 무한이 가르친 것보다 훨씬 독했다.
정파의 기운 속에 마도의 살기가 섞여 있었다.
어디서 그런 사악한 공력을 익힌 것이냐.
힘없는 정의는 무능일 뿐이라고 가르치지 않으셨습니까.
진악의 검이 무한의 가슴팍을 스치고 지나갔다.
옷자락이 터지며 품 안의 목함이 바닥에 떨어졌다.
장부 조각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나뒹굴었다.
진악은 바닥의 종이들을 짓밟으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제 낙양의 모든 포졸이 이곳으로 몰려올 겁니다.
스승님은 현장에서 증거와 함께 체포되시겠지요.
무한은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인장을 보았다.
그것은 위진악이 십 년 전 선물했던 옥인이었다.
배신은 이미 그때부터 시작되었던 셈이었다.
무한의 눈동자가 한빙주의 영향으로 푸르게 타올랐다.
그는 부러진 검을 바닥에 꽂고 정좌를 취했다.
단전의 모든 기운을 역행시켜 한꺼번에 터뜨릴 심산이었다.
진악의 안색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미쳤습니까, 같이 죽자는 겁니까.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네놈의 거짓은 두렵구나.
무한의 전신에서 차가운 안개가 폭포처럼 쏟아졌다.
방 안의 가구들이 순식간에 서리에 덮여 하얗게 변했다.
진악은 비명을 지르며 창문을 깨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무한은 멀어지는 제자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감았다.
심장까지 파고든 냉기가 그의 의식을 갉아먹었다.
멀리서 수많은 발소리와 쇠사슬 소리가 들려왔다.
관아의 포졸들이 보관실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무한은 마지막 힘을 다해 바닥의 옥인을 으스러뜨렸다.
파편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선혈이 안개 속에 얼어붙었다.
포졸들이 들이민 창끝이 무한의 목을 겹겹이 에워쌌다.
그들 뒤로 대장로 위철심이 위엄 있는 걸음으로 나타났다.
철심은 바닥의 장부 조각들을 보며 차갑게 읊조렸다.
죄인 설무한을 지하 감옥에 가두고 사지를 봉인하라.
무한은 저항하지 않고 거칠게 몰아치는 어둠에 몸을 맡겼다.
그의 입가에 아주 작은 실소 같은 경련이 일었다.
이것이 위진악이 원한 결말이라면 끝까지 보여주리라.
거대한 쇠사슬이 그의 손목과 발목을 사정없이 옭아맸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무한의 귓가에 속삭임이 들렸다.
그것은 도망친 위진악의 비웃음도, 위철심의 노호성도 아니었다.
그의 단전 깊은 곳에서 한빙주가 내뱉는 기괴한 박동이었다.
얼어붙은 혈맥 사이로 낯선 기운이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무한은 피 섞인 침을 뱉으며 감옥 문 너머를 응시했다.
철창 너머에서 위진악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잘 쉬었느냐, 나의 가여운 스승님.